•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3) 1920년대 학생운동의 기저
  • (1) 학생단체

(1) 학생단체

 1919년 3·1운동은 이를 실행하였던 우리 민족이나 일본제국주의 모두에게 현실에 대한 반성을 안겨주었다. 일제는 지금까지의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책으로 바꾸었다. 즉 총독부관제의 철폐, 헌병경찰 폐지, 총독부직원 복제의 폐지, 조선인관리의 임용, 조선舊慣舊習의 존중, 행정처분의 신중, 민중의 편익 도모, 언론출판의 취체 완화와 민의 창달, 지방자치제 시행조사 준비 등의 시정방침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통치책은 일본 국내에서 일어나는 반군국주의·민주주의적 풍조와 노동운동을 선두로 한 사회주의운동이 앙양되고 국제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고립화가 진행되는 현실 속에서 조선지배는 迂廻戰이었고, 우리 민족을 보다 기만하고 교활한 술책에 의하여 지배하고자 한 통치책이었다. 더구나 식민지 교육정책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의 치중, 편수관·시학관의 증원, 조선역사·지리교과의 삭제, 조선어의 수의과목화, 일본어시간확대, 일본역사·지리교과의 신설 등을 단행하고 1922년 제2차<朝鮮敎育令>을 공포, 다소의 진전을 보았으나 동화교육, 노예교육에는 변함이 없었다.

 3·1운동은 국내 민족운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비폭력·무저항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가 무너지면서 민족적 각성 속에서 실력양성이 대두되었다. 이 실력양성의 2대 지주는 교육의 진흥과 산업의 개발이었고, 그것은 1923년 民立大學設立運動과 物産獎勵運動으로 나타났다.793)민립대학설립운동은 金鎬逸,<日帝下 民立大學設立運動에 대한 一考察>(≪中央史論≫1, 中央大史學會, 1972).
물산장려운동은 趙璣濬,<朝鮮物産獎勵運動의 展開過程과 그 歷史的 性格>(≪歷史學報≫41, 歷史學會, 1969).
그러나 이 두 운동은 일제의 교묘한 탄압책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1920년대는 사회주의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상당한 관심과 매력을 주었다. 즉 “독립운동가들의 관심을 모으는 공산주의의 장점은 상당히 많았다. 그것은 당시 식민지 인민해방에 가장 중점을 두는 운동으로서 인식되었으며 이것만으로서 한국의 많은 애국자들에게 하나의 광명이 될 수 있었다”794)R. A. Scalapino 著, 李廷植 譯,≪韓國共産主義運動의 起源≫(韓國硏究院, 1961), 36쪽.라고 한 것을 보아, 당시 사회주의는 민족운동에 있어서 활력소였고 보수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공동의지로 민족주의 속에 사회주의가 용해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사회주의가 민족운동에 가세되면서 1920년대는 집회·결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각양각색의 많은 단체가 결성되었다.795)이 시기 대표적 기성세대의 단체로서는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조선청년연합회, 1921년의 서울청년회, 1922년의 조선노동연맹회 등이며, 1926년에는 청년단체가 1,092, 정치단체 338, 노동단체 182, 형평단체 130 개가 존재하고 있었다.

 기성세대들의 단체 조직과 함께 학생계에도 합법적인 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하였으니 1920년대 학생단체는 대체로 3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민족주의 성격의 朝鮮學生會, 중도적인 신간회 학생부, 사회주의 계열의 朝鮮學生科學硏究會가 대표적인 단체였다.

 조선학생회는 1923년 2월 전조선전문학교의 연합기구로 창립되었다. 이보다 먼저 1920년 5월 朝鮮學生親睦會 후신으로 朝鮮學生大會가 창립되었다. 이 회의 중등학교생이 탈퇴하게 되어 전문학교 학생들만으로 조선학생회가 조직된 것이다. 조선학생회에 가입한 전문학교 학생은 당시 9개의 전문학교 소속으로 전국적인 규모였다.796) 당시 9개의 전문학교는 다음과 같다.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수원고등농업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숭실대학·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전문학교 학생만으로 발족한 조선학생회는 강령으로 ① 조선학생의 단결을 도모하고 당국의 학생문제의 해결을 기함, ② 학생상호간의 선도나 친목을 기함이었다. 학생회는 초대임원구성에 착수하여 중앙집행위원장에 金鼎相(경성의학전문학교)을 선출하고, 상무집행위원 洪大權(경성법학전문학교) 등 6인, 회계 2인, 서기 1인과 학교별 중앙집행위원 각기 3인씩 선정하여 완료하였다.

 조선학생회의 두드러진 문화계몽운동은 학술대회 및 지방순회강연과 체육행사였다. 1923년부터 전문학교연합학술대회를 실시하여 자신들의 학문연구의 성과를 검증받기도 하였으며, 전조선전문학생웅변대회도 1924년부터 개최하였으며, 1927년부터는 전조선중등전문학생웅변대회로 발전하여 1928년에는 전문·중등학교 21개교가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797)≪東亞日報≫, 1928년 12월 4·8·9·10일.

 조선학생회의 중요한 행사는 체육대회였다. 1924년 5월 11일(일요일) 훈련원에서 개최한 전조선학생육상경기대회는 3개월의 준비를 거쳐 100m경주 등 15종목의 경기를 치루었다. 이 대회는 각계의 성원과 언론기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성황리에 끝났으니 당시 언론에서는 우리 체질을 잘 기르는 여러 가지 준비 중의 하나라고 평하였다.798)≪東亞日報≫, 1924년 5월 13일,<여러 준비중의 하나>. 육상경기와 함께 1923년부터 시작된 전문학교연합정구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장안의 인기를 얻어 전문학생들의 친선을 도모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체육행사로 고정되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5년 9월 27일 시천교당에서 7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결의사항과 임원을 선출하였다. 일제경찰의 해산명령을 받고 주춤했으나 재차 당국과 교섭하여 같은 해 11월 3일 총회를 개최하고 회의 발족을 보았다. 당시 발표한 강령은 ① 사회과학의 보급, ② 학생의 사상통일, ③ 상호단결, ④ 인간교육 본위의 실효, ⑤ 조선학생 당면 문제의 해결이었고, 임원은 집행위원 대표에 鄭達鉉, 서무부·사업부·도서부·조사부·연구부로 나누어 각기 2명의 위원을 두었다.799) 朝鮮總督府 警務局,≪高等警察用語辭典≫(1933), 250쪽.

 이 회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창립 다음 해인 1926년 6·10학생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실행에 옮겼다는 데 있었으며, 그밖에 각급 학교에서 일어났던 동맹휴학에도 음으로 양으로 간여했으며 사회과학과 과학사상에 대한 학술강연회, 농촌계몽운동과 농민강좌의 실시, 학생도서관 설립도 추진시켜 나갔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조직되고 20세 이하의 학생은 별도 학생부를 설치한다는 결정에 따라 신간회 학생부가 탄생되었다. 이는 민족·사회주의 양계통으로 대립되어 있던 학생계가 통일되어 협동전선이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이로써 종래 분산, 고립적으로 전개되었던 학생운동이 협동전선 아래 조직적이고 통일적 활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1932년 신간회가 해소됨에 따라 신간회 학생부도 해체되고, 이어서 1933년 조선학생과학연구회도 일제의 엄중한 감시와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조선학생회로 합류하고 말았다.800) 中川矩方,≪思想犯罪調査提要≫(新光閣, 1934),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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