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4) 6·10학생운동
  • (1) 6·10학생운동의 사회적 배경

(1) 6·10학생운동의 사회적 배경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여러 곳에서 움텄던 독립운동은 기대하였던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의 원조가 없었고, 일제의 교묘한 탄압에 따라 점차 영락되어 가고 있었다.

 무릇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상해에 모인 청년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처음부터 너무나 많은 분란·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되었던 망명정부였다. 즉 임시정부 각료로 추대된 인물들의 대부분은 미국·만주·연해주·중국본토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구한말 이래의 우국지사들이었다. 이들은 오랜 망명생활 중에서 각기 그 나라의 생활양식에 젖어 민족의 독립이란 공통된 유대가 있을 뿐, 그것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모든 정파를 망라한 좌우합작의 연합정부였다. 그 위에 그때만 하여도 농후하였던 지방색은 자연적으로 파벌을 조성하여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레닌(Lenin)정부에서 보낸 독립원조자금문제를 계기로 하여 1921년 1월 좌파의 영수 국무총리 李東輝가 사직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분열되었으며, 거기에다가 구미파인 대통령 李承晩의 구미위원부와 기호파인 노동국총판을 역임하고 초창기 임시정부의 사실상 실권자였던 安昌浩와의 대립은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대통령 직위에서 면직시키기로 결의함으로써 결정적인 난파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805) 在上海日本總領事館 篇,≪朝鮮民族運動年鑑≫(東文社書店, 1946), 315∼318쪽.

 만주의 무장독립투쟁은 3·1운동 후 間島를 비롯한 각지에서 우후죽순과 같이 독립단체가 조직되고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대승리를 절정으로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에 밀려 러시아 방면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1만 명에 달하였던 러시아 각지의 한인 무장세력도 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알력 및 유혈충돌로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1921년 6월의 소위 ‘자유시 사변’806)일명 ‘黑河事變’이라고 한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무장독립단들의 일대 참사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과 약소민족의 해방을 도와준다는 소비에트정부의 협조를 기대하고 1921년 1월 李靑天부대 1,000여 명을 마지막으로 흑룡강 건너 黑河(愛渾)에서 150리 들어간 스람스케에 독립군 1만여 명이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독립군 사이에 무장해제반대, 지휘권 문제로 충돌이 일어나 전사 272명, 익사 31명, 포로 917명, 실종 250명을 낸 사건을 말한다.을 계기로 큰 상처를 입고 그 후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의 전력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국외의 사정과 함께 국내에서도 1920년부터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실력양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교묘한 탄압과 회유의 양단정책에 말려 1925년을 분수령으로 좌절·부진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기대했던 1921년 미국의회 의원단의 내한이나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도 한국의 독립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거듭되는 독립쟁취를 위한 실패가 주는 상처 위에 날개를 펴간 것이 러시아혁명과 더불어 싹트고 자라난 사회주의였다. 일제 경찰문서가 지적하듯이 당시의 사회주의는 혼미 속에서 헤매던 독립운동에 하나의 참신한 자극이었으며 광명이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당시 레닌정부의 정책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실정, 곧 일제식민지에서 최선결문제가 민족독립에 있었기 때문에 총독정치의 타도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방편으로서, 초창기 사회주의가 민족주의적 경향이 농후하였다는 것은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 이론이 없는 바이다. 여하간 사회주의 세력의 팽창은 민족운동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고, 이러한 사정이야말로 반일 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탄생을 가능케 한 여건이었다.

 이러한 사회현실 속에서 학생층은 1919년 동경유학생들에 의한 2·8학생운동, 같은 해 3·1운동에서 전위적 역할과 3·5학생운동을 강행하였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인 학생단체의 조직, 문화계몽활동의 전개, 학생비밀결사의 조직, 동맹휴학 등으로 좁게는 학원내의 문제에서 넓게는 식민지 교육철폐, 총독정치 거부, 근대화의 추진 등을 전개하면서 민족운동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각지의 연이은 애도 속에 인산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일경은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한국인의 행동을 예의 감시하였지만, 애국의사 宋學先의 ‘金虎門義擧’807)임정으로부터 밀파된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한 사건이 즉 4월 28일 경성평의원 高山 일행이 자동차로 금호문을 나와 돈화문으로 향하는 것을 총독으로 오인하고 자동차를 습격하였으나 현장에서 체포당하였다.가 일어나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경성을 비롯하여 평양·함흥·원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육·해군 등 도합 7,000명을 경성으로 집결시키고 부산 및 인천항에는 제2함대를 대기시켜 놓고 인산일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삼엄한 경계 속에 일경에게 검속당한 한국인이 71명이었고, 행동을 제지받은 인사가 2만 8,000명이나 되었다.808)≪東亞日報≫, 1926년 4월 16일.

 또한 일경은 6월 8일 전격적으로 서울시내 전사상단체의 수색에 나서, 각 단체가 보관하고 있던 많은 문서들이 압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견지동 소재:서울청년회·경성청년연합회·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관은 형사 4명이 수색하여 철공동맹창립총회록 50여 장과 기타 잡지≪革命≫등 수종을 압수.
  조선노동회·경성인쇄직공동맹·赤雹團사상동맹창립준비위원회관을 형사 4명이 수색하여 문서 약간을 압수.
  조선노동총동맹회관을 형사 5명이 수색하여 문서 약간을 압수.
  조선학생회·조선학생과학연구회관을 수색.

② 서대문정 소재:조선청년동맹회관을 형사 5명이 포위, 수색하여 2주일 전 동경에서 가져온 성명서 여러 장을 압수.

③ 인사동 소재:신흥청년동맹·한양청년동맹을 수색하여 문서 여러 장을 압수.

④ 재동 소재:정우회·경성청년회관을 수색하여 많은 문서를 압수.

⑤ 와룡동 소재:형평사 본부를 수색.

⑥ 낙원동 소재:여성동우회·경성여자청년동맹을 수색.

⑦ 관수동 소재:조선인쇄직공청년동맹을 수색.

  (≪東亞日報≫, 1926년 6월 10일).

 한편 1925년 4월 17일 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한 좌파청년들이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이어서 18일 홍정동 朴憲永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되었다.809) 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주의운동사≫2(고대 아시아문제연구소, 1969), 285∼320쪽. 그러나 같은 해 11월 신의주사건이 확대되어 조선공산당세력의 대부분이 검거되고 이를 피한 姜達永·權五卨·洪南杓·李準泰·洪悳裕 등이 다시 재조직을 위하여 활동 중 순종의 승하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계열은 1926년 4월 3일, 권오설·李智鐸·朴珉榮 3명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권오설에게 6·10만세운동의 총책임을 맡기고 6월 10일 10시를 기하여 반일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던 중 6월 3일 중국지폐위조사건과≪개벽≫지 압수사건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6월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즉 제1차 공산당사건에 관련되어 망명중인 曺奉岩·金燦·金丹冶 등과 사회주의로 전향한 呂運亨 및 권오설이 상해에서 회동하여 제2차 공산당을 조직, 조선의 적화를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그 날을 세계노동자들의 날인 메이데이(May-day, 5월 1일)로 잡고 국내에서 대규모의 사회주의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해에서 밀입국한 권오설은 국내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한국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방편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으니 이를 6월사건이라 하였다.

 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 권오설 일파가 인산일을 맞아 조선독립의 실현과 아울러 극단적인 사회주의 선전을 목적하였으니, 이들은 3·1운동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추진되고 실현되었음에 반하여 이번의 거사는 반드시 사회주의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동자금은 권오설이 상해에서 적화공작금으로 조봉암으로부터 받은 1,500원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권오설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위하여 당시 노동동맹과 천도교청년회 간부 朴來源과 같은 해 5월 1일 회동, 동조를 얻고 그를 격문인쇄의 책임자로 선임하였다.

 박래원은 일본으로부터 인쇄기 2대를 구입, 같은 해 5월 17일부터 조선독립운동에 사용할 조선독립을 위한 격고문810) 慶尙北道 警察部,≪高等警察要史≫, 289∼290.
李錫台 編,<六·十運動條>(≪社會科學大辭典≫), 487∼488쪽.
과 4종의 전단 합계 5만여 매를 안국동 8번지 감고당 閔昌植의 집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인쇄가 완료되자 권오설 등은 천도교청년당원인 孫在翼과 상의하여 6월 3일 밤 천도교당내 손재기의 집에 보관토록 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을 민족주의 단체들과 연합하여 일으키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아지며, 또한 종교단체에 보관하여 당국의 눈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라고 보아진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자들은 적화운동에 필요한 격문서는 상해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 인쇄된 것을 비밀리에 서울로 가져와<조선독립격고문>과 함께 사용하려고 하였다.811) 李錫台 編,<六·十運動條>(≪社會科學大辭典≫), 487∼488쪽. 상해 불꽃사 명의로 되어 있는 이 격고문의 제목은<喪에 복하고 곡하는 민중에게 격함>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던 중 중국지폐위조단이 검거되고 그들이 소지했던 격고문 1매가 일경에 발견됨으로써 주모자가 권오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일경은 권오설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격고문 은닉장소도 알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開闢≫지 압수사건이 일어났다. 즉 6월 6일 오전 개벽사를 급습, 수색 중 잡지 제본 여직공들의 잡담이 단서가 되어 손재기 집에 보관, 은닉되었던 격고문과 전단 등을 발견, 압수하였고 아울러 상해 불꽃사에서 만든 격문도 압수하였다.

 처음 일경은 이 격고문에 의한 거사가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각 사회단체연합의 운동인 줄 알고 천도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즉 동대문밖에 있는 4대교주 朴寅浩의 常春閣을 수색하고 천도교 간부들을 검거하였으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그들과 관계없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운동인 줄 알고 모두 석방하였다.812)≪東亞日報≫, 1926년 6월 21일,<유월사건의 진상경계>(3).

 그리하여 6월 6일부터 6월사건에 관련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7일에는 주모자 권오설이 도피하던 찰나 체포되고, 계속하여 모두 16명의 사건관련자가 검속되었으며, 아울러 제2차 공산당조직사건도 폭로되어 여기에 관련된 인사들도 모두 체포당하였다.813) 慶尙北道 警察部,≪高等警察要史≫, 290∼292쪽.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된 자는 권오설·박래원·문창식·양재식·이용재·백명천·손재기·이선우·안정식·이동규·이지탁·박민영·김항준·강연천·홍덕유·강달영 등이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계획되고 추진되었던 6월 10일의 조선독립만세시위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성세대의 민족운동과는 별도로 학생들에 의한 6·10만세학생시위운동은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진행되어 3·1운동에 뒤이어 학생들에 의한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6·10학생운동의 추진은 대체로 두 갈래로 추진되었으니, 한 갈래는 조선공산당과 연계된 전문학교학생 중심이었고, 다른 한 갈래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중등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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