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4) 6·10학생운동
  • (2) 6·10학생운동의 추진

(2) 6·10학생운동의 추진

 순종의 승하로 국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일경의 감시가 기성 민족운동가들에게 쏠리고 있을 때 학생층은 제2의 3·1운동을 목적하고 6·10학생만세시위운동의 거사계획을 진행시켰다.814)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Ⅳ(1968), 3∼8쪽.

 전문학교 중심의 학생들은 1926년 4월 26일 마침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춘계야유회날로 회원 약 80여 명이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도중 순종의 승하소식을 호외로 보고 이때부터 어떤 방법으로든 간에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첫 거사회담이 개최된 곳은 같은 해 5월 20일 죽첨정(현재 서대문 충정로) 1정목 35번지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인 朴河均의 하숙에서였다. 이날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고, 그 준비책임자로 李柄立·李先鎬·李天鎭·朴斗鍾을 선출하였으며, 자금은 박하균·박두종이 맡기로 하였다.815) 朴龍圭,<6·10 만세운동 37주년>(≪동아일보≫, 1963년 6월 10일).
한편 전문학교생 중심의 거사계획 주동인물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병립(24), 강원도 통천군 학삼면 학고리 19, 연희전문학교 문과 2학년.
이선호(24), 경북 안동군 예안면 정포리 176,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
이천진(23), 함남 북청군 양가면 중리 1633, 경성제국대학 예과 1학년.
박두종(24), 함남 홍원군 경포면 좌상리 161, 청년학관 영어과.
박하균(25), 함남 홍원군 포청면 신평리 23, 연희전문학교 문과 2학년.

 그 후 6월 6일 이병립은 견지동 97번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사무실에서 이 회 집행위원인 이선호와 회담하고 거사일을 인산일로 할 것을 재차 다짐하였고, 같은 달 7일에는 최종적으로 박하균의 하숙에서 모든 계획을 수립하였다. 다음날에는 이선호·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애기릉(북아현동) 솔밭에서 태극기,<조선독립만세문>약 30매를 작성하였다. 다음날인 9일에는 평동 12번지 3 金鍾讚의 방에서 이병립이 기초한 “이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다. 대한독립만세”816) 경성복심법원형사부,≪6·10만세운동사건판결문≫.
이 격문을 기초한 이병립은≪동아일보≫, 1926년 6월 26일자에서 ‘조선학생회장’으로 보도되었으나, 平江汕二,≪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改訂增補), 135쪽에는 ‘고려공산청년회중앙집행위원후보’ 7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소개되어 있고, 慶尙北道 警察部,≪高等警察要史≫, 293쪽에는 ‘조선학생총연합회집행위원’으로 나오며 제1·2차<조선공산당사건판결문>에는 조선공산당후계당조직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좌경학생으로 볼 수 있다.
라는 격문을 무수정으로 통과시켰다. 이에 이병립은 이를 인쇄하기 위하여 박두종의 친구인 金洛煥에게 인쇄기계를 부탁하였는데, 마침 黃奎昌이 명함인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빌려서 사직동 이석훈의 하숙에서 약 1만 매를 인쇄하였다.

 이렇게 인쇄된 격문은 이선호가 중앙고보생 權泰晟·柳冕熙, 연희전문생 權五尙·洪明植·朴漢福에게 태극기 몇 폭과 함께 교부하였으며, 박두종은≪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에게 360매, YMCA 영어과생 劉瑗植에게 300매, 근화여자학교생 金貞子에게 태극기 한 폭과 100매를 교부하였다. 이천진은 중동고보생 김인오에게 태극기 2폭과 격문 600매를 주었으며, 박하균은 연희전문생 金奎鳳에게 500매, 이석훈에게 600매, 韓一淸에게 30매를 교부하였다. 한편 유면희는 중앙고보내에서 300매와 태극기 3폭을 교부받아 50매를 같은 학교생 朴鍾業·金鉉相에게 나누어 주었다.817)<대검찰청 소장>(≪형사재판원본≫제1책 3, 소화 2년 4월분), 508∼509쪽.

 사립중등학교학생을 중심으로 6·10학생운동의 거사계획은 중앙고보와 중동학교생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중앙고보의 朴龍圭·李東煥, 중동학교의 郭戴炯·金載文·黃廷煥 등이 순종의 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계획한 것이 5월 16일이었다.818) 중앙중고등학교,≪중앙60년사≫, 127∼129쪽.
중등학교생 중심의 거사계획 주동인물의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박용규(22), 경북 달성군 하빈면 소동805,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
곽대형(20), 전북 김제군 만경면 만경리355, 중동학교특과 2학년.
김재문(22), 전북 임실군 임실면 성가리 284, 중앙학교특과 3학년.
황정환(22),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107, 중동학교특과 3학년.
이동환(27), 전북 정읍군 산외면 형사리26,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
이날 이들은 文仁根의 하숙방에서 거사에 필요한 동지규합을 의논하고 같은 달 23일 혜화문 삼선평에서 각 학교별 축구시합을 위장하여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였고, 같은 달 26일 낙원동 255번지 황정환의 하숙방에서 격문을 인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달 29일 박용규 등 5명은 통동 71번지 金召史宅 김재문의 하숙에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의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최남선·최린

 (<重大宣傳文集>,≪朝鮮思想運動調査資料≫1, 44쪽).

 위와 같은 격문을 29일부터 31일 사이에 낙원동 250번지 金性琪에게 등사판을 빌려서 5,000매를 등사, 앞의 5명이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갖고 다시 이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 봉도대열 속에 있다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함과 동시에 살포하기로 하였다.819) 중앙고등학교,≪중앙60년사≫, 125∼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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