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5) 광주학생운동
  • (3)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

(3)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은 일제의 보도관제 때문에 단 한번 신문보도에 게재되었을 뿐 한국민이나 학생들에게 그 전말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소식은 구전으로 차차 전국 각지로 전파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혹하여 학생들이 신음 속에 허덕이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한국민, 특히 한국학생들의 분노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식민지체제에 대한 항일민족운동으로 승화케 하였다. 우선 광주와 가까운 전남지역에서 먼저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전남의 대표적 지역은 목포와 나주였다.

 목포에서는 목포상업학교에서 일어났다. 이 학교는 공립학교로 한국학생이 121명, 일본학생이 130명 재학하고 있던 한일공학제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의 崔昌鎬·李麟炯 등이 11월 9일 광주에 와서 장재성을 만나 광주 학생들의 항일운동의 활동상을 듣고 이에 호응할 것을 결심, 계획을 세운 뒤 목포에 돌아와 11월 19일 총궐기를 감행하였다.846)≪東亞日報≫, 1930년 1월 9일.

 한국인 학생들은 이날 교내의 전화선을 절단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학교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후 1시 경 “우리 2,000만 생령을 사랑하고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 남녀학생 수십 명은 빈사의 중상을 입고 200여 명은 불법검거로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시위했던 것이다. …”라는 격문 살포와 “광주학생 만세”를 외치면서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시내의 양동·무안통을 지나 목포역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사후 연락을 받은 목포경찰서에서는 100여 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70여 명의 학생을 검거하고, 시위를 해산시켰다. 이때 검거된 학생 중 주모자로 꼽힌 李光雨·朴鍾植 등 16명은 최고 1년에서 5년의 체형 또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나주에서는 학생들과 기성 민족운동가들이 합세하여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즉≪중외일보≫지국 기자이며 신간회 집행위원인 金亨浩,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 朴恭根, 나주청년동맹집행위원 梁東澤 등이 나주농업보습학교 2년생인 柳贊玉·洪敏原과 항일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시위일을 11월 13일로 정하였다가 나주 장날이 11월 27일이므로 이날로 결정하고 26일 격문을 보습학교 2년생인 李昌信이 등사판으로 약 24매를 등사하였다.

 이같은 격문을 등사한 후 다음날인 27일 정오 나주보습학교생 50여 명과 나주보통학교생 28명이 군청 앞 광장에 모여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항쟁에 들어가 시장방면으로 행진하였으나 출동한 경찰과 교직원의 제지로 해산당하였다. 이 항쟁으로 보습학교생 9명과 보통학교생 7명이 체포되어 이들 중 박공근 등 5명은 징역 1년∼10개월의 체형을 받았다.847) 光州地方法院,≪昭和 4年 刑公 第51號≫참조.
≪東亞日報≫, 1929년 12월 28일.

 전남에서는 이 밖에 각 지역에서 계속 항일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함평에서는 12월 2일 함평농잠학교생의 시위운동계획이 미연에 발각되어 주모자 4명이 구속되었다. 1930년 1월 28일에는 광주수피아여학교에서 시위계획이 있었으며, 이달에 담양군 창평보통학교, 강진 대구보통학교·왕양보통학교·여수수산학교 등의 시위계획이 있었으며, 2월에는 담양보통학교·보성보통학교·순천농업보습학교·목포정명여학교 등이 동맹휴교 내지 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848)≪東亞日報≫, 1930년 2월 7·10·13일.

 동일한 역사적 상황하에 놓여 있던 한국민과 학생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자신들의 것으로 간주하고 전남뿐만 아니라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서울에서는 신간회를 비롯한 각종의 사회단체·학생단체들이 광주학생운동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활동과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당시 신간회 경성지부장이었던 趙炳玉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사정을 술회하고 있다.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항쟁이 벌어진 다음 날 신간회 광주지회로부터 신간회 중앙본부에 보고가 왔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광주청년 장석천이 급거 상경하여 신간회 중앙본부를 방문하고 사건의 동기와 내용을 상세히 알려줌으로써 신간회 중앙본부에서는 진상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간회본부에서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그 대책을 협의한 후에 이날 장성·나주·담양·광주의 각 지회에 전보지시를 하여 그 다음날까지 각 지회간부는 광주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앙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허헌, 그리고 서기장 황상규는 밤열차로 광주로 떠났던 것이다. 이들이 다음날 아침에 광주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전기 4개 지회의 간부, 우호단체, 각 신문사 기자들을 합친 약 30여 명의 인사가 환영해 주었고, 반면에 그와 비슷한 정사복의 경찰이 동태감시를 위해 광주역까지 파견되어 있었다. 이들이 광주로 가게 된 목적은 진상조사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내세웠던 것이다. 김병로·허헌·황상규 등은 광양여관에 투숙하였고,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면서 광주중학교장·광주경찰서장·검사정 등을 만나서 한국학생만을 처벌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들에게 항의하고 진상을 조사하고 상경하였다. 전기 3인이 상경하자 신간회에서는 긴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사건보고대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선전삐라 살포를 계획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항의하고자 ‘언론탄압강효대강설회’의 개최를 추진했으나 이 집회도 좌절당하고 말았다(趙炳玉,≪나의 回顧錄≫, 民敎社, 1959, 104∼106쪽).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인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간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민중대회를 개최할 사.

2) 시위운동을 할 사.

3) 하기표어로 새 민족 여론을 환기할 것.

  ① 광주사건의 정체를 폭로하자.

  ② 구금한 학생을 무조건으로 석방케 하자.

  ③ 경찰의 학생 유린을 배격하자.

  ④ 포악한 경찰 정치에 항의하자.

 이러한 결의문 채택과 함께 “래하라! 투하라! 형제여! 자매여! 광주대연설회”, “아등의 자질이 희생되는 것을 묵시키 불능하다” 등의 격문을 만들어 광주고등보통학교 사건보고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좌절되자 다음 단계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하고 韓龍雲·조병옥·柳東鎭·허헌·洪命熹·金恒奎·李源赫·李灌鎔 등이<민중선언서>를 작성하고, 1929년 12월 13일 안국동 네거리에서 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그러나 대회 6시간 전 신간회본부는 일경에 의하여 포위되고 현장에서 대회 준비에 열중하고 있던 조병옥 외 44명의 회원과 근우회·청년총연합회·노동총동맹 등의 관련자 47명을 합하여 도합 91명이 검거되어 대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11월 7일 학생전위동맹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조사키 위하여 夫鍵·權遺根을, 조선학생회에서는 李漢星을 광주에 파견하였고 9일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朴日이 광주로 출발하였다.849) 朝鮮總督府 學務局,≪全羅南道光州に於ける內朝鮮生徒鬪爭事件の眞相竝て鮮內諸學校に及ほる影響≫, 32∼33쪽. 그러나 이들은 광주에 도착은 하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방해로 제대로 진상을 조사하지도 못하고 10일 광주서에 구속되었다가 상경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 광주에서의 항일운동은 그 무대가 서울로 옮겨져 서울 학생들에 의한 격렬한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아침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중동학교·경성여자상업학교·동덕여자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기타 시내 공·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전국화를 위하여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되었다. 이에 놀란 일경은 종로경찰서에 수사 총본부를 설치하고 12월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체·근우회 등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을 검거하고 조사에 나서 13개 처를 수색, 격문 8,000매를 압수하였다. 계속하여 12월 5일 40여 명이 다시 검거되었다. 이때 살포된 격문은 앞서 상경한 장석천·강영석 등과 학생전위동맹간부 및 각 학교 비밀결사 간부들이 모여 11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車載貞이 낸 인쇄비 70원으로 郭良勳이 8,000매를 인쇄한 것이며, 한편으로 권유근·鄭鍾根 등이 申用雨와 협의하여 격문 8,000매를 인쇄하여 살포한 것으로 그 격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격문>

 조선청년학생대중이여!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반항적 투쟁으로서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하라!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약자가 아니다. 반항과 유혈이 있는 곳에 승리는 역사적 조건이 입증하지 않았던가? 조선학생대중이여! 당신들은 저 제국주의 이민배의 광만적 폭거를 확문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광주조선학생동지의 학살의 음모인 동시에 조선학생에 대한 압살적 시위이다. … 그들의 언론기관은 여기에 선동하였으며 그들 횡포배들은 일본인의 생명을 위하여 조선인을 죽이라는 구호 밑에 소방대와 청년단을 무장시켰으며, 재향군인연합을 소집하여 횡포무도한 만행이 있은 후에 소위 그들의 사법경찰을 총동원하여 광주학생동지 400여 명을 참혹한 철쇄에 묶어 넣었다.

 여러분! 궐기하라. 선혈의 최후까지 조선학생의 이익과 약소민족의 승리를 위하여 항쟁적 전투에 공헌하라.

  ① 검속된 광주조선학생동지를 즉시 탈환하라.

  ②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항하라.

  ③ 살인적 폭도인 일본이민군을 구축하라.

  ④ 신간회와 청총에 민족적 환기로 호소하라.

  ⑤ 삭제

  (≪東亞日報≫, 1930년 9월 9일, 1931년 4월 9·14일).

 일경은 이 사건을 차재정사건 또는 학생전위동맹사건이라 하여 장석천·차재정의 검거에 혈안이 되었으며, 이에 연루된 45명을 검사국에 송치하고 그 중 12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격문 살포는 서울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5일부터 14일까지 계획된 순서에 따라 제1차 서울학생항일 시위운동이 감행되었다. 1929년 12월 5일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3·4학년생이 2교시 직전 운동장에 집합하였다가 다시 강단에서 집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결의문>

① 학우회의 자치.

② 조선역사의 교수.

③ 조선어문법과 작문시간 편입.

④ 광주학생에 대한 응원.

⑤ 식민지 노예교육반대.

 그리고 교문을 나가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교직원의 필사적인 저지로 좌절되고 말았다.850)≪朝鮮日報≫, 1929년 12월 28일. 그렇지만 이로 인하여 7일에는 제1고등보통학교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으며, 경신학교와 중동학교에서도<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특히 제2고보와 제1고보의 항일시위는 비록 교내항쟁으로 끝났지만 양교가 공립학교이며 가장 우수한 한국학생들의 학교로서 이들 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서전을 장식하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한편 이날 오전 9시 30분 경 조회를 마친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은 학생대표가 행한 ‘광주학생지원’ 연설을 듣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교문을 박차고 시가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일경기마대의 포위망을 뚫고 혜화동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중학교)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합류를 권유하였으나 남대문상업학교에서는 교문을 굳게 닫고 교직원들이 합류를 저지하여 할 수 없이 경신학교생들은 교문 밖에서, 남대문상업학교생은 교실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보성고등보통학교생 400여 명이 가두로 진출, 경신·보성 양교의 시위대가 합세하여 사기 충천한 가운데 두 대로 나누어 제1대는 경성제국대학 앞을 지나 종로 5정목으로 진출하고, 제2대는 창경원 앞을 지나 종로 4정목으로 행진하던 중 제1대는 제국대학 앞에서, 제2대는 박석고개에서 일경에게 포위되어 시위학생 1,100여 명 중 95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이 포위망을 탈출한 학생들은 창덕궁 뒷산을 넘어 계동 중앙고등보통학교 뒷산으로 가서 400여 명의 중앙고보생과 합세, 화동과 팔판동을 지나 경복궁 뒷길로 나오려 하였으나 일경에게 포위·검거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숙명여자고등학교생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이려 하였으나 일경의 제지로 교내로 들어와 통곡하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휘문고등보통학교생 400여 명도 궐기하여 가두시위를 벌이려다가 실패하고 교내에서 광주학생지원집회를 갖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협성실업학교생 150여 명도 광주학생지원과 대일본규탄연설을 갖고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다음 날도 계속되어 10일에는 휘문·숙명·근화·협성실업·청년학관·배재 등이 궐기하였고, 11일에는 이화·서울여자상업·동덕·실천여학교·경기농업·법정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 등이 궐기하였다. 13일에도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간이상공 등이 광주학생지원과 일제에 대한 성토·통기·동맹휴학 등의 형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851) 朝鮮總督府 警務局,≪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風媒社, 1979), 139쪽.
≪朝鮮日報≫, 1930년 1월 15일, 號外.

 제1차 서울학생항일독립만세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제는 2,400여 명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남녀학생 1,40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처럼 전 서울시내의 각급 학교가 동요하자 일제 당국은 12월 13일 조기 동계방학을 실시토록 하였고, 소요가 극심한 학교에 대해서는 휴교토록 하였다.

 1929년 11월 13일 이래 일제 당국에 의하여 보도금지되었던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기사는 12월 28일 동아일보사장 송진우가 조선총독부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정무총감을 면담하고 강력 항의한 끝에 해제되어 광주학생에 관한 기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학생운동상황이 호외로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 12월 조기 동계방학에 들어간 서울 시내의 학교들은 1930년 1월 초순부터 휴교했던 학교부터 개학하기 시작하였고, 지방학생들도 상경하여 학원가는 정초부터 동요하였다. 처음에는 학교별로 산발적인 동맹휴교에 그쳤으나, 1월 중순부터는 전문학교에서 남녀 중학교와 보통학교생까지 총궐기하여 가두시위의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 1월 15일 서울시내 각급 학교생 5,000여 명이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오전 10시 경 200여 명의 학생이 교정에 모여 광주학생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수업을 받을 수 없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일경의 제지로 좌절되자 교정에서 농성 시위로 들어갔다. 이때 학생들은 ①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할 사, ② 학원을 독립시킬 것 등을 결의하여 이를 조선총독부의 총독과 학무국, 일본내각 및 문부성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 시위로 李源七 등 15명의 학생이 종로서에 피검되었다.852)≪東亞日報≫, 1930년 1월 16일.
≪朝鮮日報≫, 1930년 1월 16일.

 한편 경신학교를 비롯한 시내 남녀 중등학교생들은 각기 교정에서 광주학생 지원 연설을 한 후 교문을 나와 시위운동을 벌였다. 제2차 학생시위운동은 제1차 학생시위 때보다 그 수가 약 3배가 넘는 학생이 참가하였다. 일경은 서울의 경찰병력으로는 제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천 지방의 경찰력을 동원하고 자동차를 강제징발하여 무차별 검거에 나서서 종로서를 비롯한 각 서는 검거 학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검거에도 불구하고 항일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기만 하였다. 16일에는 경성여자상업학교·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협성실업학교 등의 1,200여 명이, 17일에도 중앙기독교청년학관 전학생과 경성실업전수학교생 100여 명, 배재보통고등학교생 6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감행하였다.853)≪東亞日報≫, 1930년 1월 17일.

 이와 같이 만세시위가 연일 일어나자 일제 당국은 17일 시위에 참가한 모든 학교에 대해 휴교조치를 내렸다. 천수백 명이 일시에 구속되고 그 중 480여 명의 학생이 정식 구속된 상황하에 휴교령이 아니라도 각급 학교에서는 정상수업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제2차 서울학생만세시위운동의 특징은 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총궐기한 사실에 있다. 이것은 제1차 시위운동이 남학생 중심인 데 반하여, 제2차 시위운동은 여학생들이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화여고보의 崔福順은 광주 학생의 지원과 학생민족항쟁을 위하여 여학생의 궐기가 필요함을 느끼고 동급생인 金鎭賢·崔允淑과 협의하여 당시 근우회 서무부장인 許貞淑을 방문하여 자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

① 학교는 경찰의 침입을 반대한다.

② 식민지 교육정책을 철폐하라.

③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여 분개한다.

④ 학생희생자를 석방하라.

⑤ 일본의 ○○정책을 반대하라.

⑥ 각 학교의 퇴학생을 복교시켜라.

 (≪東亞日報≫, 1930년 3월 19일,<市內女學生萬歲事件公訴事實要略>).

 宋桂月·최복순 등은 이상과 같은 격문과 대소의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든 다음 1월 14일 밤 가회동 48번지에 진명·숙명·실천·근화·미술·여상·정신·배화·동덕·이화 등 각 학교 대표들을 모이게 하고 휘문고보 張洪淡 등과 회합하여 15일 오전 9시를 기하여 총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제2차 학생시위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학생운동은 서울에서 2차에 걸친 대규모 학생운동으로 발전하고 다시 1930년 2월 초순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경기도에서는 1930년 1월 9일 개성송도고보·호수돈여고보·개성상업학교·미리령여고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보다 앞서 1929년 12월 13일 인천상업학교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있었다.854)≪朝鮮日報≫, 1930년 1월 9일.

 전라북도는 전주를 중심으로 1930년 1월 20일을 전후하여 전주고보·전주농교·전주여고보·신흥학교 등이, 22일에는 고창고보가 보통학교와 제휴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좌절되었고, 그 밖의 정읍농업학교·삼례영신학교·삼례보통학교·이리농림학교·정읍보통학교·군산고보 등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855)≪朝鮮日報≫, 1930년 1월 22·23·26·27일.
≪東亞日報≫, 1930년 1월 22·23·25·27·28일.

 경상남도는 진주·익산·마산 등이 가장 강렬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진주에서는 진주고보·진주제일보통학교·일신여고보 등 1,000여 명이 1930년 1월 17일 궐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감행하였고 이 시위로 진주고보생 29명이 검거되고 11명이 퇴학, 24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856)≪朝鮮日報≫, 1930년 1월 19·23일
≪東亞日報≫, 1930년 1월 28일.

 경상북도에서는 1928년 11월 초순 대구학생비밀결사가 발각되어 대구고보·대구사범·대구상업학교 학생간부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의 공판이 1930년 3월에야 판결되어 지도급 학생들의 투옥으로 전국학생운동에서는 활발한 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30년 1월 20일 대구시내 전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이 계획되었으나 1월 18일 발각되었다.857)≪朝鮮日報≫, 1930년 1월 21·22·23·25·26일, 2월 12일.
≪東亞日報≫, 1930년 1월 24·25·26·30일.
19일 다시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것도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858)≪朝鮮日報≫, 1929년 9월 12일,<大邱學生事件公判>참조.

 충청남북도는 공주와 청주를 중심으로 1930년 1월 20일을 전후하여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즉 청주고보·청주농교·공주고보·공주영명학교·공주금성보통학교와 그 밖에 대전상업보습학교·홍성공업전수학교·당진석문보통학교·조치원농업보습학교·대전제2보통학교·부여농업보습학교·예산대흥보통학교·괴산청천보통학교·충주대소보통학교 등에서도 동맹휴교 내지 독립을 위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859)≪朝鮮日報≫, 1930년 1월 21∼26일·28일.

 황해도에서는 1930년 1월 21일 해주고보생 300여 명의 시위운동이 있었고 사리원농업학교도 보통학교와 연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860)≪朝鮮日報≫, 1930년 1월 31일.

 강원도는 춘천과 철원이 중심이었다. 1929년 12월 19일 춘천고보의 동맹휴학이 있었고, 1930년 1월 24일 춘천농교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강릉농업도 거사계획 중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861)≪朝鮮日報≫, 1930년 1월 26일·10월 30일.

 평안남도는 평양이 중심이었다. 1929년 12월 5일 경부터 광주학생운동을 격려하고 일제의 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여 16일 경 시내 관립학교 7개교 대표들이 “광주학생들이 철창에서 떨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겠는가”라는 항의문을 작성, 각 학교에 보내고 동맹휴교를 단행하였으며, 1930년 1월 21일 남녀학생 3,000여 명이 일제히 궐기하였다. 숭실전문을 비롯하여 광성고보·숭실중학·숭의여고보·평양고보·평양사범·숭인학교·평양공립보통학교·평양여고보·정의여고보 등의 학생들이 참가하였으며, 다음날도 시내 12개교가 총궐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21일∼22일 사이의 사건으로 피검된 학생이 138명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일에는 명륜여자보통학교·광성보통학교·숭덕보통학교·숭실여학교 등이 만세를 불렀고 더구나 기생학교생 200명도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 평양학생들의 만세시위운동은 인근 지방에 파급되어 진남공립상공학교·안주농업학교·인화학교·영변해림공립학교 등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862)≪東亞日報≫, 1930년 1월 25일.

 평안북도에서는 신의주고보와 오산고보의 항일운동이 가장 격렬하였다. 신의주고보는 1월 8일 개학식 도중 전교생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25일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2월 중순에는 동맹휴학을, 20일 제3차 만세운동을 단행, 도합 3차에 걸쳐서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항일운동을 감행했다. 신의주농업학교도 제2차 신의주고보만세시위에 합세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정주오산학교도 광주에서의 학생운동소식을 듣고 1월 18일 전교생 380여 명이 궐기하여 만세를 외치면서 30리나 떨어진 정주읍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90여 명이 검거되고 7명이 퇴학, 200여 명이 무기정학을 받고 학교는 휴교조치가 취해졌다. 그 외에 선천신성중학교·영변농업학교·숭덕중학교·숭덕여학교·영변보통학교·영변고성보통학교·소림보통학교·팔원보성학교·의주지신학교·박천보통학교·봉산보통학교·성천농림학교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863)≪朝鮮日報≫, 1930년 1월 28일, 2월 21·25일, 3월 2일.
≪東亞日報≫, 1930년 1월 19일.

 함경남도는 함흥고보가 1929년 11월 16일 제1차로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에 호응하는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제2차로 12월 16일 시위운동을 감행 동맹휴교로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로써 50명의 퇴학·정학생이 나왔고, 수십 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그 중 5명은 체형을 받기까지 하였다. 함흥상업학교에서도 1930년 1월 14일 만세시위가 있었고, 이어서 영생중학·영생여고보·영생고보생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단행하였다. 그 밖에 신상보통학교·단천농업학교·광천보통학교·감흥농업학교 등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고, 원산에서는 1930년 1월 3일 루씨여학교 학생 300여 명이 청년학관생과 합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여 6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또한 원산상업학교와 원산고등여학교에서도 동맹휴교로 일제에 대항하였다.864)≪東亞日報≫, 1930년 2월 22일.

 함경북도에서는 1930년 1월 25일 경성고보생 500여 명과 경성농업학교생 500여 명이 합세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여 102명이 검거되었다. 이에 경성 시민들은 피검학생석방요구 시민대회를 열었다. 27일에는 시민·학생들이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밖에 회령상업학교·회령여학교·청진상업보습학교·회령보광여학교·경성어량보통학교·어대진보통학교·주을보통학교·학동학교·성진임명보통학교·길주농교·길주덕산보교·성진보교·명간보교·나남중학교·청진청공학교·청진여보고 등에서 만세시위운동이 계속 일어났다.865)≪朝鮮日報≫, 1930년 1월 27·30일.

 이상과 같이 전국학생운동은 광주에서 불꽃을 피운 후 한반도 전지역에 학교가 설립되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는 항일민족운동으로 그 불꽃은 꺼지지 않고 번져만 갔던 것이다. 학생들의 항일학생운동은 학생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전국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받은 학생이 2,330명, 피검자가 1,462명이나 되었으며 참가교는 194개교로 초등교육기관이 54개교, 중등교육기관이 146개교, 고등교육기관이 4개교였고 참가학생 수는 약 5만 4,000여 명이나 되었다.866) 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Ⅴ 資料編(1968), 261쪽.

 광주학생운동은 그 사회적 배경으로 당시 국내사상의 동향, 전남 광주의 사회적 조건, 성진회·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와 동맹휴학의 영향이 이 운동을 일으키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을 고찰하였다. 이제 이 운동이 전개, 확산되어간 과정과 그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대일 민족독립을 절규하던 민족운동이었으며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사회문화운동이었다. 일제는 광주학생운동을 ‘광주학생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사회주의운동으로 간주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학생들의 민족운동을 축소하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둘째 이 운동은 단순하고 순간적인 폭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꾸준하게 전개하였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전남 광주에서 한국인 통학생과 일본인 통학생간의 통학열차에서 비롯된 충돌은 하나의 계기였지 그것 자체가 광주학생운동은 아니었다.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에 의하여 1926년부터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비밀결사 성진회·독서회 등의 활동과 1920년대에 들어와 격화되고 있던 동맹휴학에 의한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연결되어 일어났던 것이다.

 셋째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전국학생들의 궐기를 가져와 전국 방방곡곡의 보통학교에서 전문학교에까지 확산된 항일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보 등에 수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과의 충돌은 광주시가지 전체를 휩쓸었고, 일제경찰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2일까지 계속 학교별로 항일시위가 감행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 시위내용은 일체 보도금지시켰으나 광주와 가까운 전라도 나주·목포에서 여수·함평·담양·강진·보성·순천으로 이어지고 서울에서는 같은 해 12월 5일에서 14일까지 제1차 서울학생항일시위가 감행되었고 1930년 1월 15일 제2차 항일시위가 일어나면서 광주학생운동은 서울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후 항일독립시위 운동은 요원의 불길과 같이 확대되어 전국 각도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파급되어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넷째 광주학생운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전국학생운동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을 인식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광주만이 지니고 있었던 특수성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 전지역에 걸쳐 일본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데 기인한다고 보며 아울러 항일독립운동은 학생계층뿐만 아니라 민족전체가 수행하여야 할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민족 전체가 후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11·3학생운동’으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광주를 기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된 1929년부터 1930년 사이의 전국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이 감행한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 이는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에 대한 일침이었으며 우리민족이 추구하여 왔던 실력양성운동의 성과가 가져다 준 결실이었다.

<金鎬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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