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1) ‘조선공업화’ 정책에서 ‘병참기지화’ 정책으로의 전환

1) ‘조선공업화’ 정책에서 ‘병참기지화’ 정책으로의 전환

이른바 식민지공업화는 1930년대 전반기의 ‘조선공업화’, 1930년대 후반기 이래의 ‘병참기지화’001)‘병참기지’는 ‘대륙전진병참기지’를 줄인 표현이다. ‘병참기지화’ 정책은 일제가 도발한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동원책 또는 생산증진책으로서 광공업정책과 군수식량 확보를 위한 식량증산정책·인력동원책 등 여러 범주를 총칭한다. 정책 시행기 등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두 단계 모두 일제의 전쟁 도발, 즉 1931년과 1937년의 만주 및 중국대륙 침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도 그 과정이나 내용·성격 면에서 큰 차별성이 있다.

대공황을 전후하여 조선농가가 파탄에 빠지고 민중운동이 급성장한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1931년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지주계급 위주로 이루어졌던 이전까지의 농정과 식민통치 방식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기된 ‘조선공업화’ 정책은 일본 자본주의의 독점이 심화되고 중화학공업화로 이전되는 외적 조건과 어우러져 비교적 순조롭게 착수되었는데 그 전개 방식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무렵 제국주의 국가들은 대공황을 타개하고 시장 확보를 위해 폐쇄적인 블록경제를 구축하는 정책을 세웠고 일본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엔블럭권’의 자급자족전략을 세웠다. ‘조선공업화’ 정책은 조선을 일본-精공업지대, 만주-농업지대를 잇는 양 지역의 교량지대로서 값싸고 풍부한 석탄·전력·노동력 등을 이용한 粗공업지대로 설정하면서 추진되었다.

둘째, 일본에서 공황극복책으로서 모색된 중요산업별 생산·판매 독점체인 카르텔 체제를 규정한<중요산업통제법>(1931. 4)이 시행되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부자본의 새로운 출구처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러한 주변부자본군은 전쟁호황기인 1916년에 장시간 노동과 아동노동의 규제, 노동자 생활보장책 등을 규정한<공장법>실시를 전후하여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특히<중요산업통제법>시행 이후 적극적으로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인접지역인 조선이 최적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셋째, 새로운 출구처가 절실했던 일본자본을 위해 조선총독부는<중요산업통제법>의 적용 시기를 늦추면서<공장법>을 시행하지 않는 등 적극적인 유인책을 제공했다. 아울러 장진강과 부전강의 전력개발 등을 통한 값싼 전력 공급, 공업용지의 저렴한 확보를 위한 지가등귀 억제조치, 보조금·장려비·조사연구비 등의 재정자금을 제공했다. 이렇게 조성된 투자환경은 일본의 주변부자본과 독점자본에게만 매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서 이미 활동하던 자본에게는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조선 내 유산층들에게는 농업 위주의 투자를 분산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조선공업화’ 정책은 식민통치의 차원에서 조선 내의 필요에 일정하게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와 달리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착수된 ‘병참기지화’ 정책은 전쟁수행을 위해 ‘일본제국’ 전체의 관점에서 조선경제가 담당할 역할과 방향이 하향적으로 설정되면서 이루어졌다. ‘대륙전진병참기지’라는 용어는 경성에서 열린 로터리대회 및 日滿실업협회 총회(1938. 5)에서 행한 총독의 연설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새로운 공업화정책의 윤곽은 일제의 중국침략 이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즉 미나미 총독 부임 직후에 개최된 ‘朝鮮産業經濟調査會’(1936. 10)는 ‘국책상’ 그리고 ‘국방상’ 필요한 부문에 대한 공업의 특별한 ‘진흥책’을 강조했는데 이는 군수(관련) 부문으로 조선이 보유한 자원의 집중적 개발과 동원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철을 비롯한 지하자원의 개발 및 가공공업과 대체연료로서의 인조석유공업 등이 중요 업종으로 부각되었고 일본자본 유인책으로서 조선에서 시행을 유보했던<중요산업통제법>이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둔 1937년 3월부터 시행되었다. 모든 가용 자원을 군수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경금속·석유 및 소다·황산암모늄·폭약·공작기계·자동차·철도차량·선박·항공기·피혁 등 중요산업으로 지정된 업종에 초점을 둔 통제경제체제가 시작된 것이다.002)河合和男·尹明憲,≪植民地期の朝鮮工業≫(未來社, 1991), 27∼29쪽. 이렇게 시작된 군수산업과 관련된 공업화의 첫걸음은 결국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각종 자원과 생산력을 고갈시키면서 전개되어 해방 후에도 경제건설을 어렵게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003)강만길 엮음,≪한국자본주의의 역사≫(역사비평사, 2000), 191쪽.

일제 말기 공업화의 방향과 성격은 로터리대회 직후에 열린 제1회 산업부장회의(1938. 8)에서 총독이 조선경제를 ‘平戰兩時’에 ‘일본의 대륙에 대한 물자공급 거점’인 ‘병참기지’로 개편하겠다고 밝힌 것에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침략 과정에서 식량·잡화 등 상당량의 군수물자를 보급하고 있던 조선이 향후 일본으로의 “해상수송로를 차단당할 경우에도 조선의 능력만으로 이를 보충할 수 있을 정도로 산업분야를 다각화하고 특히 군수공업 육성에 역점”004)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朝鮮支部 編,≪朝鮮經濟年報≫(1939), 399·403쪽. 제1회 산업부장회의는 ‘병참기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각도에 산업부가 설치된 직후 소집되었다.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병참기지화’ 정책은 일본이 생산력이 훨씬 우월한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의 전쟁을 도발하기 이전부터 몇 년 후에 현실화되고 만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옥쇄작전과 같은 동원책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비슷한 무렵에 열린 ‘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1938. 9)에서는 조선경제를 군수공업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생산력확충안으로서<지하자원 개발에 관한 건>등 ‘시국대책’ 전반에 걸친 18개 항목에 대해 답신을 정리했다. 이 가운데 군수공업 확충안으로서 1941년까지 기업의 신설이나 증설에 의해 알루미늄·마그네슘·석유·폭약·공작기계·자동차·철도차량·선박·항공기·피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확충계획 목표를 세웠다. 확충방법으로서 관계법규 정비, 기업부지의 알선, 기술자·숙련공 양성기관의 확충, 자금융통의 원활화, 보조금의 교부, 운수시설의 정비, 동력요금·운임의 경감, 원재료의 공급알선, 하청공업의 확충 등 노동력 확보에서 중소기업의 하청화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는 일정한 기준을 설정하는 수준이었던 1936년의 ‘조선산업경제조사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치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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