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3) ‘병참기지화’ 정책과 조선경제
  • (2) 생산력과 기술 이전의 제약

(2) 생산력과 기술 이전의 제약

원료조달과 생산의 자급체제로 구상되었던 ‘일본권’에 종속된 조선의 무역은<표 4>에서 보듯이 일본과 만주에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수송체계가 위협을 받는 1940년대에 무역규모가 크게 축소되거나 정체되었다. 1936∼1937년간에 수이입액이 13.6%, 수이출액이 15.5% 증가한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증가 추이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수이입액은 1940년까지 늘어나다가 1941년부터 감소하여 1943∼1944년간에는 38%나 축소되었다. 수이출액은 이보다 빠른 1940년부터 감소했는데 특히 1942∼1943년간에는 25%나 축소되었다. 1940년대 이후의 무역 축소는 전적으로 대일무역, 즉 이출액과 이입액이 격감했기 때문이다.035)송규진,≪일제하 조선의 무역정책과 식민지 무역구조≫(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8), 136∼137쪽.

‘일본권’ 무역에 집중되어 값싼 전력과 노동력에 기초한 조선경제는 기계기구의 대일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철광의 경우에도,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철은 일본으로 이출되어 강철 또는 기계로 제조된 후 조선으로 반입되었다. 이 때문에 급증한 기계류 수이입액은 1931∼1936년간(4.9배)에 수이입액에 대한 비중(2.8∼6.0%)도 급증했는데 1936∼1942년간(3.5배)에는 총수이입액 증가율(1.96배)을 훨씬 능가했고 특히 1940년에는 수이입액 가운데 최다비중(14.8%)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즉 일본의 수이출품이 면직물 등 경공업품에서 기계기구류 등 중공업품 중심으로 바뀌어 갈 때 착수된 식민지공업화는 조선경제의 중화학제품 수요를 촉진시켰고 ‘병참기지화’ 정책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기술의 축적 보다 원자재 생산과 인력동원에 집중된 공업화는 대일무역적자의 급증을 불러왔다. 1910∼1945년간의 무역적자 총액(54억여 엔) 가운데 1937∼1945년간의 무역적자액(48억 4,000만여 엔)이 무려 90%나 차지했다.036)1937년 이후의 무역적자액은 아래 표와 같다.

1937년 1939년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합계
17,790만엔 17,632 38,163 58,856 54,604 43,401 5,893 5,207 484,127

*송규진, 앞의 책, 158∼160쪽의<표 4-21>.
1944년과 1945년에 무역적자액이 격감한 것은 극심한 생산성 저하와 해상통로 두절에 의해 대일무역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식민지공업화가 진행될수록 조선경제는 재생산구조의 기반이 취약해지고 ‘일본권’으로의 종속성이 더욱 심해졌다. 특히 ‘병참기지화’ 정책은 경제논리를 넘어 강제동원 방식을 수반하고 조선의 자원을 유실·고갈시키면서 전개되어 해방 후 민족경제 건설 과정에서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큰 장애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식민지공업화 과정에서 흡수된 노동자들은 미숙련 단순노동에 집중되어 이른바 기술이전의 파급효과도 운위하기 어려웠다. 농촌과 분리되어 공장이나 광산으로 흡수되는 노동력의 범주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반농반공의 계절노동자가 많아 조선사회의 취업구조가 질적으로 변화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인과 일본자본이 물러간 해방 후 이들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그 근거가 그대로 유지된 상태였다는 점은 이를 반영한다. 이런 가운데 전 인구 가운데 상업종사자가 7∼8%나 차지했고 1930년대 이후 오히려 증가 추이를 보였다는 것은 통제경제하에서 물자난의 틈새를 타고 유통 부문으로 몰려든 식민지공업화의 기형성 또는 비생산적 경제 운용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추이를 개관해 보면, 1933∼1942년간에 공장·광산·토목건축 부문의 노동자는 74만 4,000여 명으로 증가(3.3배)했다.037)안병직,<植民地 朝鮮의 雇傭構造에 관한 硏究>(≪近代朝鮮의 經濟構造≫, 비봉출판사, 1989), 395쪽. 여기에 교통운수업·자유업 노동자를 감안하면 1942년에는 175만여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된다.038)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Ⅲ, 19쪽. 이 가운데 공장노동자는<표 1>을 보면 1936∼1943년간(1.93배)에 18만 8,000여 명∼36만 3,0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1942년에도 노동자 총수의 21%에 불과했다. 총인구 가운데 공업종사자는 1930년대에 2.5∼3.2%에 불과하다가 1942년에야 5.0% 정도를 차지했는데 가내공업 종사자를 제외한 공장노동자의 비중은 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광업종사자의 비중은 1939∼1942년간(1.2∼2.1%)에 급증한 이후 다소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농업종사자(가족 포함) 비중이 1931∼1942년(77.9∼66.2%)간에 크게 감소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구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039)1930년대 이후 업종별 종사자(가족 포함) 비율은 아래 표와 같다.

  1931 1936 1939 1940 1941 1942
총인구 (만명) 2,026.3 2,204.8 2,280.1 2,370.9 2,470.4 2,636.1
농업종사자 (%) 77.9 75.0 72.5 70.7 69.2 66.2
광업종사자 (%)     1.2 1.7 2.0 2.1
공업종사자 (%) 2.5 3.2 3.2 3.5 4.4 5.0
상업·교통업종사자 (%) 7.0 7.6 8.4 8.6 8.7 8.8

*≪朝鮮經濟年報≫Ⅲ(1948), 18∼19쪽;≪朝鮮總督府統計年報≫각년판.
비고:상업·교통업종사자는 교통업이 제외된 수치임.

산업구조의 현상적인 ‘고도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보면,<공장법>도 적용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조건 위에서 빈농 출신의 미숙련 단순노동과 강제동원 방식이나 노동시간을 늘려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에 의존하는 낙후된 구조였다. 이 시기의 산업생산성이 갈수록 떨어진 것은 물자난뿐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한 약탈적 생산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1937년 공장 조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12시간 이상인 경우가 41%나 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심했다고 봐야 한다. 1939년에 제정된<공장취업시간제한령>이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금지했다는 것은 이러한 살인적 노동이 당시에 일반적인 추세였음을 반영한다. 통제경제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법령이 제대로 집행되었는가도 의문스럽고 이마저도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1943년 7월에 폐지되어 오히려 장시간노동이 합법화되는 모습까지 드러냈다.

장시간 노동은 저임금체제를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조선인 미숙련노동자가 받는 평균 90전 정도의 日給으로는 노동력 재생산은 커녕 가족의 부양 또는 생계조차 꾸려갈 수 없었다. 농한기에 광산이나 토목건축업에 계절적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고,040)李憲昶,≪韓國經濟通史≫(法文社, 1999), 356쪽. 이는 저임금체제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물론 조선인 간에도 미숙련노동자와 숙련노동자의 임금이 2배 정도의 차이를 보였고 조선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것은 직무상의 차이뿐 아니라 조선인이 승급·승진에 제한을 받았고 일본인에게 별도로 外地근무수당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임금을 비용으로 지출해야 하는 자본가의 입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임금격차를 민족차별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조선경제와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미숙련 조선인 노동자들이 적체될 수밖에 없던 당시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 기술인력 부족은 경제외적 강제와 ‘독려’를 당연시하는 전쟁 분위기, 물자난과 어우러져 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술자수/총노동자수] 비율은 1937년(2.7%), 1939년(3.1%), 1940년(3.5%)을 지나는 동안 완만하게 늘어났지만 여전히 낮았고 기술자의 대부분도 일본인이었다. 공업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기술자가 드물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술자 양성과 고급기술 교육을 억제했던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이 큰 몫을 차지한다. 실제로 1937년 이전까지 갑종실업학교 이상의 공업계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공업학교 두 개 뿐이었고 민족별 입학쿼터제 때문에 조선인 학생 수는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 1930년대 이후 광산 및 토목건축업, 1937년 이후에는 금속공업과 기계공업 분야에서 기술자 수요가 증가했지만 필요한 기술자를 조선에서 채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술자의 공급은 1939년 경까지 일본에서 교육받은 일본인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인 회사에 고용되었다. 조선인 회사는 필요한 기술자를 공급받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기술자를 필요로 하는 업종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술자를 채용한 36개의 조선인 회사도 대부분 1명만 고용한 정도였고 2명 이상 고용한 조선인 공장은 경성방직·삼양사·충남제사 등 7개 회사에 불과했다.041)허수열, 앞의 글, 204∼209쪽.

중화학공업 및 군수공업의 기술인력 수요는 더욱 커지는데 반해 일본인 기술자들이 징병으로 전쟁에 동원되면서 기술자수는 1940∼1944년간(10,406∼6,129명)에 41%나 격감했다. 1944년의 공장노동자 수를 1943년보다 10% 이상 늘려 잡아 40만여 명으로 추산해도 [기술자수/총노동자수] 비율은 1.5%에 불과하여 그나마 1940년까지 늘어나던 추이와 달리 격감했다. 이 때문에 총독부의 전통적인 기술자 및 기능공 정책도 일정하게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공백을 메우는 조치로서 경성광산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를 설치했다. 또 고등기술학교를 신설 또는 증설하고 갑종 및 을종 실업학교와 직업학교를 만들어 기능공을 배출함과 더불어 직업훈련을 강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인 기술자는 1942∼1944년간에 1,215∼1,632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42년 조사에서도 공업부문에서 조선인은 여전히 기술자의 18%에 불과했고 노무자의 93%를 차지했다.042)안병직, 앞의 글, 430∼431쪽. 즉 일본인이 관리직과 기술직을 독점하고 조선인이 미숙련 단순노무직에 집중된 이원화된 고용구조의 골간은 해방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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