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4) 한국자본주의사에서의 ‘병참기지화’ 정책

4) 한국자본주의사에서의 ‘병참기지화’ 정책

1930년대 후반기의 ‘병참기지화’ 정책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을 전후하여 조선경제가 물자공급을 위한 ‘병참기지’로 규정되는 외적 동인을 안고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전반기의 ‘조선공업화’ 정책이 대공황과 만주침략을 계기로 일본 자본주의의 독점이 심화되고 중화학공업화로 이전되는 외적 조건 외에 기존의 식민통치방식과 지주계급 위주의 농정을 전환할 필요가 있던 내적 조건이 어우러져 전개된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 기간에 조선경제의 겉모습은 큰 변화를 보였다. 가내공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전쟁수행과 직접 관련을 가진 광공업 생산이 급증하여 1939년을 경계로 중화학공업 우위로 반전되어 공업구성의 ‘고도화’ 경향을 띠었다. 또 농업종사자 비중이 여전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가내공업 종사자가 많아 노동력 흡수는 제한되었지만 노동자수와 조선인 공장이 급증했다. 이런 와중에서 ‘병참기지화’ 정책의 추진주체인 일본자본의 독점적 지배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력의 미숙련 단순노동 집중, 영세한 기술력과 자본으로 경쟁이 가능한 틈새영역으로 제한된 조선인 자본가, 원활한 원자재 공급의 차단과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한 생산독려에서 비롯된 생산성 격감으로 이른바 기술 또는 생산력 이전의 파급효과를 논하기는 어렵다.

즉 ‘병참기지화’ 정책은 조선경제의 재생산구조 형성을 가로막고 ‘일본권’의 종속적 하부단위로 고착시켜 해방 후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데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화학공업은 약품 및 염료의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한 상태였고 광물 이출과 공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장’한 금속·기계공업도 대부분 수리 또는 조립 수준의 소규모공장으로서 생산수단 생산은 여전히 취약했다. 방직공업은 일본이 군수공업에 치중함에 따라 비롯된 필수품 부족을 보완하면서 ‘일본권’의 종속적 분업연관 속에서 군수품 수요로 꾸준히 확대되었지만 그나마 원료 조달이 어려워진 1940년대에는 축소되었다. 자급체제를 꾀했던 ‘일본권’과의 교역에 집중된 무역규모도 해상통로의 두절로 1940년대에 정체 또는 축소되었다. 교역품을 보면 곡물·금이나 선철과 같은 원광물 등을 수출하고 주요 기계기구를 수입하는 강한 종속성을 드러내었고 중화학제품 등의 수입액 급증으로 식민지 전기간 무역적자의 90%가 1937년 이후에 집중되었다.

연합군의 ‘일본권’ 봉쇄가 강화되면서 원활한 원자재 공급이 차단되는 등 전황이 악화되어 가자 일제는 설비 확장보다 기존설비의 활용도를 높여 단기적 생산극대화 방침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강제동원과 공출 등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한 생산독려는 곧 한계가 드러나 생산성과 생산액의 격감 추이로 반전되었다. 공장생산액은 1943년부터 격감했고 수출액도 1940년대에는 격감 추이를 보였다. 공장수, 회사의 납입자본, 노동자수는 크게 늘어났지만 자본생산성 증가율은 1939년부터, 공장·노동자의 평균생산액 증가율은 각기 1941년과 1942년부터 마이너스로 반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업종사자가 증가한 것은 유통부문에서 물자부족의 틈새를 탄 주변부 인력이 몰려드는 식민지공업화의 비생산적 경제 운용과 기형성을 보여준다.

‘병참기지화’ 정책의 큰 특징은 일본의 대외무역 결제자금으로서 금과 군수품 생산을 위한 광산개발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재정·금융의 집중혜택을 받은 광산은 대부분 일본자본이 장악하게 된데다가 군수관련 요구로 ‘급성장’한 결과 해방 후 미군정의 폐쇄정책과 어우러져 대부분 가동이 정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식민지 전기간의 광산액 가운데, 1937년 이후에 조선이 보유한 지하자원을 비생산적으로 소진시키면서 84%가 집중되었다. 수이출품 가운데 원광물의 비중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조선 내 소비량이 늘어난 것은 해상통로가 두절된 외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는 동안 조선사회는 전쟁수행을 위해 폭력적 강제력이 수반된 인력·물자·자금 등 각종 자원의 동원대상으로 규정되었다. 수탈의 정도는 당시의 재정·금융 담당책임자조차 일본이 오류를 범했다고 인정할 정도로 극심했다. 결국 조선사회가 보유 또는 개발한 각종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전개되어 해방 후 경제건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조선인 노동력은 노동시간에 의존한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에 편승하는 구조와 총독부의 기술교육정책 부재 속에서 미숙련 단순노무직에 집중되었다. 1940년대 이후 일본인 기술자의 징집으로 기술교육과 직업훈련이 강화되었지만 조선인이 단순노무직에 집중되는 이원적 고용구조의 근간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 뿐 아니라 1938년 일본<국가총동원법>의 적용에서 시작되어 1944년<국민징용령>실시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조화된 노동력 강제동원체제는 국내외에서 ‘성노예’를 포함한 200여 만의 조선인을 전쟁터의 노예와 같은 존재로 혹사시켰다.

조세수탈·강제저축·조선은행권 증발 등 식민지화 이전부터 일제의 편의에 맞게 ‘정비’된 재정금융기구를 통해 동원된 자금은 군수(관련)산업에 집중되었다. 원자재 수입 급증에 따른 국제수지 악화 대책으로서의 수출입 통제, 물자부족에서 비롯된 물가상승에 대한 인위적 억제조치는 암거래 가격만 부채질했다. 또 전쟁물자는 물론 생활필수품까지 포함된 통제와 배급제도, 식량 등 거의 모든 물자를 암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라도 구입해서 충당해야 하는 공출정책 등으로 조선인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조선인 공장과 회사는 늘어났지만 각종 통제로 (반)휴업 상태인 경우가 포함되어 있고 가동률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영업영역도 영세한 기술력과 자본으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전쟁경기의 틈새 시장으로 제한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과 달리 군수품과 소비재 필수품의 생산 유지를 위해 중소공업의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중소공장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기업정비령>시행을 계기로 이마저도 유지되기 어려웠다. 조선인 자본가는 일제의 정책 운용에 개입할 여지도 능력도 없이 전시동원체제에 절대적으로 종속된 존재였다. 이들은 ‘일본권’의 군수산업 분업구조에서 자본축적을 꾀했던 몇몇 예속 자본가군, 투자전환을 꾀한 가운데 퇴보의 길을 걷는 자본가군, 물자난과 자금난이 겹쳐 도태되는 대다수 중소자본가군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사회를 이끌어가기보다 민족의식을 내버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적대시하면서 부의 축적을 모색했지만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국근대사에서 사회구성원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리더쉽도 지닐 수 없었던 자본가그룹의 천민성·부패성·대외의존성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에서 배태되었다.

<鄭泰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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