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2. 국가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7) 신도 강요

7) 신도 강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일본의 神道를 강요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종교마저도 부정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가 神社參拜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1925년 朝鮮神宮을 비롯하여 꾸준히 신사를 건립하고 참배를 강요해 왔던 일제는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인들의 정신을 통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신사보급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6년 8월 조선총독부령 제76호로<改正神社規則>을 공포하면서 일거에 새로이 57개의 신사를 건립하였다. 이후 1938년 9월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개최되면서 일제의 신사정책은 1面 1神社·神祠主義로 확대되어086)山口公一,<戰時期 朝鮮總督府の神社政策>(≪朝鮮史硏究會論文集≫36, 1998), 202쪽. 1925년에 231개였던 神社·神祠의 수가 1945년에 이르면 1,141개로 급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087)손정목,<朝鮮總督府의 神社普及·神社參拜 强要政策硏究>(≪韓國史硏究≫58, 1987), 120∼121쪽. 그러한 가운데 신사가 설치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신사의 대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神宮大麻의 배포, 神棚의 설치, 궁성요배,<황국신민서사>제창 등을 강제하였다.088)山口公一, 앞의 글, 207쪽. 또 ‘내선일체의 王都’ 부여에 부여신궁을 건립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전당으로 만드는089)손정목,<日帝下 扶餘神宮 造營과 소위 扶餘神都建設>(≪韓國學報≫49, 1987), 128쪽. 계획을 세워 1939년 6월 완공하였다. 일제는 국민총력운동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地域·職役을 망라한 국민운동의 형태로 신사참배를 대대적으로 강요하였는데 朝鮮神宮 참배자 수만 1942년 260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제는 일본민족이 우주 창조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嫡子이며 일본 천황은 그 神孫으로 살아 있는 現人神이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을 皇道 이데올로기로 강조하고 조선인들에게 이 신도사상 이외의 일체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090)손인수,<일제 식민지교육정책의 성격>(≪일제하의 교육이념과 그 운동≫, 한국정신문화연구소, 1986), 91쪽. 그러나 이미 수천 년의 문화·사상·종교 유산을 갖고 있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도란 雜神을 숭배하는 유사종교에 불과한 것이었으며,091)石剛,≪植民地支配と日本語≫(東京:三元社, 1992), 22쪽. 신사참배 또한 일제의 폭력에 못이긴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법에 의존해서라도 정신동원을 하지 않고서는 조선에서 총동원체제를 유지해 나아갈 수 없는 실정이었음을092)山口公一, 앞의 글, 208쪽.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신도는 이외에도 역사인식을 왜곡시켜 식민사관을 만드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093)김승태,<日本 神道의 침투와 1910·1920년대의「神社問題」>(≪조선사론≫16, 1987), 292쪽. ‘皇國史觀’에 의해 일본의 역사를 과장·날조한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역사를 비하시키면서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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