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2. 국가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8) 결혼정책

8) 결혼정책

민족말살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결혼을 장려하는 결혼정책에서 그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나미 총독이 내선일체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내세웠던 “形도 心도 血도 肉도 모두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조선민족말살의 의도를 그대로 관철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미나미는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통혼을 내선일체를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더구나 확대일로를 걷고 있던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부로부터 분출될 수 있는 저항을 뿌리째 뽑고, 일본인과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한 정신면에서의 정지작업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일본화된 정신이 가장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을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결혼을 통한 혼혈에서 찾고자 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8년 9월에 열린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에서는 ‘내선일체’를 완성하기 위한 여러 시책 가운데 “內鮮人의 통혼을 장려할 적당한 조치를 강구할 것”094)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諮問答申書≫(1938) 참조.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이후 결혼정책이 보다 강도있게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시국대책조사회’에서 통혼의 문제가 언급된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혼인은 그 수에 있어 급증세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내용 면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통혼정책에 또 하나 중요한 轉機를 가져 온 것은 1940년 2월 시행된<朝鮮民事令>의 제3차 개정, 즉 ‘創氏改名’으로 알려져 있는 법률 개정이었다. 이는<조선민사령>제2차 개정 당시 형식만을 도입했던 일본의 호적과 ‘家’의 제도를 그 실질적인 내용의 면까지도 조선에 적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래 조선의 ‘姓’에 대신하여 ‘家’의 칭호인 ‘氏’를 조선인에게도 붙여서 호칭질서와 가족제도의 기본단위를 ‘家’로 만들었다. 또한 婿養子와 異姓養子 제도를 신설하였는데,095)宮田節子·金英達·梁泰昊, 앞의 책, 52쪽. 특히 조선의 ‘異姓不養’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異姓養子를 인정함으로써 부계혈통의 계승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가족제도는 그 근저로부터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조선민사령>의 제3차 개정에 대해 일제는 “內鮮通婚 및 內鮮緣組에 관하여 남아 있는 유일한 장벽을 철폐하여 內地人 남자가 조선인의 養子로서 그 家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096)野村調太郞,<朝鮮家族制度の推移>(≪朝鮮≫296, 1940), 21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혼인과 양자관계를 통해 양 민족의 혼혈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식 가족제도의 도입은 일본인들의 조선인과의 통혼을 활성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통혼이 갖는 목적과 의미가 구체적으로 거론되면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즉 ‘내선일체’를 완성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혈액의 융합을 촉진시키는 것은 그 우수한 내지인의 피로써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097)朝鮮總督府,≪朝鮮統理と皇民化の進展≫(1943).이라는 민족적 우월감과 제국의식에 입각한 식민지 동화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었다. 아울러 ‘내선일체’를 인구정책의 면에서 완성시키기 위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증가책, 조선인의 일본 移住에 대한 규제책과 함께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혼인의 장려가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다.098)朝鮮總督府,<極秘 內鮮一體ノ理念及其ノ實現方策要綱>(≪大野文書≫1268, 1941). 즉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증가와 정착을 위해서는 조선인과의 통혼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통혼의 문제가 이전 시기에 비해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절실한 필요에 의해 인식되고 정책으로 구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가 통혼정책을 통해 의도한 가장 큰 목적은 조선인의 동화, 즉 민족말살이었으며, 이를 가정과 가족구조의 일본화로부터 시작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의 중심인 여성의 일본인화가 가장 급선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여자들은 낮은 취학률로 말미암아 일본식으로 사회화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조선인 여자의 일본인화가 이처럼 난관에 부딪치게 되자 일제는 지금까지 조선인 여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가족구조 속에서의 위치와 지위를 일본인 여자로 대체시키는 것에 의해 조선인의 일본인화, 조선인의 말살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조선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간의 통혼을 가장 장려하고 또 그 결과로 숫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일제는 내선일체의 완성을 위해서는 장래 일본인 여자가 주도하는 가정에서 그들에 의해 아이들의 가정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더 나아가 조선인의 가정생활을 그 속에서부터 일본화 하려는 목적으로 식민지 동화와 민족말살에서의 일본인 여성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처럼 결합된 통혼의 경우 매우 원만한 가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그 실상을 보면 결혼에 대한 이혼의 비율이 조선의 평균 비율을 거의 두 배 이상 상회하고 있다. 또한 당시 공식적인 통계에 나타나고 있는 혼인관계 외에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경우, 그리고 다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중혼관계까지도 포함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혼율은 이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통혼이 내포하고 있는 갈등의 요인은 배우자 당사자간의 애정 문제뿐만 아니라, 양 민족 사이의 문화와 풍습의 차이, 세대간의 갈등 등이 민족감정과 얽혀 나타남으로써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인이 갖고 있는 동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일본인이 갖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까지 복합되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통혼정책은 민족말살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통혼정책이 다른 민족 말살책과 다른 것은 性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을 정책적으로 이용하는 데에서 오는 많은 문제점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일제가 의도하는 통혼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이 조선인의 일본인화였기 때문에 일본인화에 뒤쳐지고 걸림돌이 되는 부분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희생된 것이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결국 조선인 여자들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에 회의적이었던 일제는 그 자리를 일본인 여자들로 대신하고자 하였고, 조선인 여자들을 부족한 노동력의 대체수단으로, 또 군대 위안부와 같은 성적 노리개로 이용할 수 있는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性을 통한 민족말살정책이었던 통혼정책의 가장 커다란 희생자는 이처럼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통혼정책의 또 하나의 피해자로서 일본인 여자들의 존재이다.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통혼이 적극적으로 장려되면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선인 남자들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인 여자들이 다수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결국 통혼정책은 식민지인으로서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민족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가부장적 전통이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던 가족제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여성의 희생과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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