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시작된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1944년부터 실시된 징병제는 모두 조선인들을 병력으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시목적과 그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일제의 의도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절박해진 병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징병제와는 달리, 지원병제도의 경우는 일제의 침략전쟁 확대와 장기화에 따른 병력 부족을 해소한다는 목적과 함께 조선인들에게 황국의식을 주입하기 위한 의도 아래 실시되었다.
즉 지원병제도를 통해 조선인의 일본인화의 바로미터로 사용하는 한편, 조선에서 완전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단계가 되어야만 비로소 조선인들을 안심하고 병력자원으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병역의무의 부과, 즉 징병제의 실시는 50년 정도 적어도 20∼30년 후의 일로 상정하고 있었으며,099)<朝鮮人志願兵制度ニ關スル意見>(≪舊陸海軍文書≫No. 678, 別冊 二). 지원병제도가 징병제의 전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었다.100)朝鮮總督府,<朝鮮人志願兵制度施行ニ關スル樞密院ニ於ケル想定質問及答辯資料>(≪大野文書≫1276-2, 1938). 그리고 지원병의 자격요건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사실상 일제가 병력으로 필요로 하는 조선인의 황민화 상태의 상징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계획은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커다란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일제가 필요로 하는 병력의 규모가 평균 200만 내지 250만에 이르는데 반해 일본 민족만으로 병력을 충당할 경우 적정규모는 120만에 불과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101)陸軍省兵務課,<大東亞戰爭ニ伴フ我カ人的國力ノ檢討>(1942).
高崎隆治 編,≪十五年戰爭極秘資料集≫1(1977). 게다가 계속되는 일본 내의 출생률 저하는 병력의 부족과 더불어 노동력의 부족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제는 外地民族의 활용에 착안을 하게 되었고, 그 일차적인 대상이 된 것이 조선인들이었으며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되게 되었다.
지원병제도와는 달리 모든 조선청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징병제의 실시는 조선인들의 완전한 일본인화, 일본정신의 주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확대 속에 병력부족을 해소해야 하는 필요에 몰린 일제로서는 그러한 조건을 검증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일제의 당초 의도와는 달리 징병제가 그 전제조건이었던 의무교육이 구체적인 계획도 입안되기 전에 갑작스럽게 도입되게 되자 일제로서는 징병제의 준비작업으로 청년특별연성소를 통해 징병 대상자들에 대한 빠짐 없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의 내용은 일본어, 일본식 생활의 수련 등으로 일제가 30여 년 추진해 왔던 동화정책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일제가 조선 통치를 시작한 이후 태어나 일제에 의한 교육 속에 자라난 청년들의 의식상태에 대해서도 신뢰를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은 일제의 내선일체론이 조선인들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성을 갖고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인들의 생명을 전쟁에 몰아 넣는 징병제에 대한 선전·계몽이었고, 그 주된 논리 역시 내선일체론이었다. 즉 조선인의 내선일체화 작업이 완성되어 비로소 숭고한 병역의 의무가 부여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병력의 부족을 조선인의 징집을 통해 보충하려 한다는 일제의 본래의 의도를 교묘히 감추고 있었다.102)<朝鮮同胞ニ對スル徵兵制施行準備決定ニ伴フ措置狀況竝其ノ反響>(≪大野文書≫1262, 1942). 지금까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이유로 설명되고 있었던 民度의 차이와 황민화 정도가 미흡하다는 점등은 이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징병제의 실시와 더불어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 조선인들의 참정권 문제였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자 1930년대 전반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조선 민족개량주의자들 사이의 참정권 논의가 다시 재연하게 되었다. 즉 血稅를 납부하는 데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조선인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제는 지금까지 조선인들의 참정권 요구에 대해 극히 제한적이고 형식적인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대응방식을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직후인 1939년 경부터 변화시키고 있었다.103)朝鮮總督府內務局,<極秘 制度改正ニ關スル諸資料>(≪大野文書≫1256, 1939).
참정권 문제의 해결을 지방자치제의 확대라는 방식으로 계속해 나아갈 경우 이것이 조선지방의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조선의 자치령화와 독립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자치제 확대는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지금까지 캐스팅 보트를 쥘 수도 있다는 이유로 금기시되어 왔던 조선인 의원의 일본의회의 중의원 참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참정권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 선거방식은 국세 15원 이상 납세자를 선거권자로 하는 엄격한 제한선거였기 때문에 전 조선인의 2.3%만이 선거권을 갖는 것이었고, 그 가운데 29%는 일본인이 점하고 있었다. 즉 극히 일부의 친일적인 조선인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이들이 뽑은 몇몇(23명) 조선인들을 일본의회에 참여시키는 방법을 통해 일제의 지배구조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민족분할통치를 실현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징병제의 실시로 확인한 조선인들의 내선일체화의 결과를 일본의회 참여라는 제도를 통해 완성시켰다는 논리로 선전해 가고 있었다. 바로 내선일체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참정권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같은 논리를 내세워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던 징병제의 실시를 가능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는 징병제와 참정권 문제를 내선일체의 구현이라는 같은 논리로 조선인들에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징병제 실시에 적극적이었던 일본 군부와 정부는 참정권 문제에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가 참정권 해결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인들을 정치적 차별 상태에 방치해 놓고는 전쟁에 동원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입각하여 징병을 위한 명분과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참정권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징병의 명분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내선일체의 논리를 어떤 구체화된 모습으로든 보여주지 않고는 징병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없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속에서 이 문제에 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이용된 내선일체의 논리는 전 조선인의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제와 엄격한 제한선거로 전 조선인의 2%에도 못 미치는 경제적 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참정권을 함께 포괄하기에는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상으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특히 1937년을 전후한 내선일체론의 등장과 1938년 국가총동원체제의 확립 시기로부터 살펴보았다. 민족말살정책은 위에서 살펴본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국민총력운동 등의 관제운동·교육정책·언론통제·조선어 말살·창씨개명·神道 강요·결혼정책·징병제와 참정권 문제 등을 포함하여 전방위에서 강요되고 있었다. 일제가 내세운 조선인의 동화란 결국 조선인들이 조선민족으로 생활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철저한 민족파괴작업이었고, 이것은 조선인을 하급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차별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일제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연구들은 각각의 정책에 대한 실상 폭로를 위주로 하여 상당히 감정적인 면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대응으로는 일제의 정책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지배이념과 그 메카니즘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각 시기마다 일제에 의해 주장되었던 지배이념이 정책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관철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의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崔由利>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