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3. 전시수탈정책
  • 1) 전시동원체제의 구축

1) 전시동원체제의 구축

일제는 1940년 10월 소위 고도국방국가건설의 완성이란 기치 아래 국민총력운동을 성립시켰다. ‘고도국방국가’란 국민, 국가의 모든 요소가 국방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되고 통제되는 국가체제이다.104)전시체제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가운영의 원리와 재생산 구조가 전쟁수행을 위해 재편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인의 노동력·정신·물자를 전면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일제는 이전보다 강력한 관제조직을 활용하여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했다. 이 절에서는 전시체제 아래 조선인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수탈하는데 기간적인 역할을 했던 국민총력운동, 이 운동의 말단조직으로 개개인의 일상까지 침투하여 동원체제를 부식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부락연맹에 대해 먼저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 체제는 기존 체제의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요소를 척결하고 전체주의 이념와 천황중심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재편되기 때문에 소위 신체제라고 하였다.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되는 만큼, 사회 전반을 전체주의 이념으로 규제해야 했다. 國民總力運動(이하 총력운동)은 소위 신체제를 조선사회에 구축하기 위한 관제조직이었다. 일제는 조선사회를 전시체제로 통제하는데 당시 일본사회보다 용이한 점이 있었다고 했다.105)常設戰時經濟懇話會 편,≪조선경제통제문답≫(동양경제신보사 경성지국, 1941), 27∼38쪽.
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 朝鮮支部 편,≪朝鮮經濟年報(1941·1942년판)≫(개조사, 1943), 11쪽.

첫째, 강력한 행정력을 들었다. 식민지 통치 아래 조선총독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의 통제력이 강고하여, 행정은 고유한 권한과 영역을 넘어 광범한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 기존 통제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새로운 정세에 직면하여 별도의 기구를 만들면 종래 기구와 마찰이 생기고 원활하게 운영되지 않을 수 있고, 새로 구한 사람이 통치목적에 따라 일하도록 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기존조직을 활용하면 이런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법규통제를 가능한 한 피했다고 하였다. 총독에게 이미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통제를 강행할 수 있는 조직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에 입각한 통제는 상황변화에 따라 법을 계속 개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간의 ‘자치통제’를 유도하고 활용했다.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자면, 자연히 강한 행정력과 강제력이 발동하게 되었다. 총력운동은 날로 확대되는 전시동원을 행정력을 앞세워 강제로 추진할 때 수반되는 마찰을 완화시키면서 그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등장했다. 총력운동은 기존 관제조직인 國民精神總動員運動(이하 정동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조직과 활동을 흡수 통합한 것으로, 공익우선과 직역봉공의 구호 아래 전체주의 이념을 사회·경제의 운영원리로 확산시켰다. 즉 총력운동은 경제의 재생산구조를 전쟁동원에 맞게 재편하고, 조선인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정신과 사상을 통제하는 중핵체였다.106)이하 김영희,<국민총력운동의 전개와 농촌통제정책>(≪한국독립운동사연구≫ 14, 2000) 참조. 총력운동은 ‘사상의 통일’, ‘국민총훈련’, ‘생산력확충’이란 핵심적인 방침을 조선민중에게 부식하고 관철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즉 천황중심 전체주의로 전시동원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전제조건으로 ‘사상의 통일’, 노동력 동원의 사전 정지작업이며 실제 동원이 이루어지는 ‘국민총훈련’,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증산하는 ‘생산력확충’에 조선민중을 편입시키려고 했다.

총력운동은 총독부의 외곽단체로서 식민지 권력이 개개인의 삶 속에 침투하여 인적·물적 자원의 ‘供出’107)供出이란 전시체제 아래 통제경제의 산물로, 생산자로부터 물자를 강제로 출하시키는 것이다. 일제는 전시체제기 극단적인 천황중심주의로 개인의 권리를 배제한 채, 의무만 부과하면서 인격과 인명을 매우 경시했다. 이 점은 일제가 ‘노무공출’이라고 하여, 노동력도 물자의 하나와 같이 취급하던 사실에서 일단을 알 수 있다.을 획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조선민중에 대한 전시동원이 심화될수록, 총력운동의 기구에 민간인의 참여를 늘려 총력운동이 관제운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국민운동’이 되도록 의도했다.

총력운동의 역할이 총독정치를 지원하여 전시동원체제를 사회 말단에까지 구축하는 것이므로, 그 조직은 행정조직과 일체가 되었다. 총독과 정무총감은 총력운동의 중앙기구인 조선연맹의 총재와 부총재를 겸임했고, 행정계통에 따라 조직된 지방연맹의 장은 지방행정의 장이 맡았다.

총력운동이 이전의 관제조직을 활용하여 재조직되었지만, 그 말단기구는 이전의 정동운동의 그것보다 한층 정치하게 확립되었다. 총력운동은 국가지상주의와 전체주의가 다른 가치와 이념보다 우월한 상황에서, 어떠한 이탈자도 허용되지 않았다. 가입대상이 ‘조선의 모든 단체 및 개인’으로 되어, 표면상 자유의사에 따라 가입할 수 있었던 정동운동과 달리 가입에 대한 강제성이 확대되었다. 또 일제는 각 개인의 능력을 파악하여 인적·물적 자원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부락연맹과 그 하부조직인 애국반을 통해, 戶의 대표와 그 가족원(개인)까지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원적인 계통조직을 구축했다. 이에 따라 전시동원정책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도연맹→부·군·도연맹→읍·면연맹을 거쳐 “정·동·리부락연맹→애국반→대표애국반원(戶대표)→애국반원(개인, 가족원)”으로 이어지는 총력운동의 조직체계를 따라 관철될 수 있게 되었다.

총력운동은 1944년 2월 현재 도연맹 13개, 부·군·도연맹 241개, 읍·면연맹 2,324개, 정·동·리부락연맹 6만 3,025개, 애국반 37만 3,750개, 애국반에 편입된 호대표 반원수 457만 9,162명을 포섭하고 있었다. 1943년 현재 일본인과 외국인까지 포함하여 전국 호수는 487만 8,901호인데, 戶의 대표 457만 9,162명이 총력운동에 포섭되었기 때문에, 전국 호수의 약 93.8%와 그 아래 편입된 개개인이 관의 통제권에 놓여 있었다. 외형상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동원체제에 편입되었다.

일제는 전시부담이 개개인에게 부과되는 만큼 직접 조선민중과의 대립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간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락연맹은 촌락 단위로 농민의 물적·정신적 생활 전부를 통제하고, 통제된 생활 전부를 전시동원체제에 협력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부락연맹은 지방행정의 최말단기구로 공인되어, 농산물 생산력확충과 노무동원정책의 실행단위였다. 전시정책은 행정계통과 총력연맹을 통해 하달되는데, 면행정까지 내려온 정책은 기본적으로 부락연맹을 단위로 할당되었다. 애국반 역시 총력운동의 최하부조직이면서, 대체로 부락연맹 아래 구체적인 정책 실행을 담보하는 매체였다.

일제는 부락연맹을 중심으로 농민통제를 달성하기 위해, 부락연맹의 역할과 기능을 꾸준히 강화시켰다. 부락연맹의 책임자인 이사장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區長의 수를 늘려 부락연맹마다 구장을 배치해갔다. 부락연맹이사장으로서 구장의 처우개선이 진전되면서 촌락에서 구장의 권위는 강화되었다. 종래 촌락에서 직접 현물로 주던 구장의 수당을, 면에서 호별세로 거두어 구장에서 지급함으로써, 구장에 대한 관의 지배력을 높였다. 구장의 수당은 계속 증액되었으며, 구장에게 지방 관직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물구장’까지 배치하면서, 구장을 통해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렇게 면의 직접 지배 아래 놓인 부락연맹은 촌락의 농산물증산과 공동작업 등을 주도하면서, 농민들의 주된 생활권을 통제할 수 있었고, 특히 배급행정의 말단에 위치하여 배급배제, 즉 생활권 박탈을 위협하면서 농민들을 규제하고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이 점은 표면적으로 전시체제에 농민들이 편입되는 모습을 띠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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