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3. 전시수탈정책
  • 2) 농업증산정책과 농산물 수탈
  • (1) 조선증미계획의 전개 과정과 그 결과

(1) 조선증미계획의 전개 과정과 그 결과

1930년대 초 농업공황을 계기로 일제는 조선미가 일본의 농업을 압박한다고 하여, 1934년 산미증식계획을 중단시켰으나, 中日戰爭의 발발로 조선미의 증산계획을 다시 모색했다. 당시 일본의 연간 미곡소비량은 8,000만 석인데, 연평균 생산량은 약 6,300∼6,400만 석이어서, 조선과 대만의 약 1,400∼1,500만 석을 이입하여 소비량을 충당하고 있었다. 또 일본과 조선에서 군수 생산력확충 중심의 산업이 팽창하면서 미곡수요가 증대할 전망이었고, 조선미의 만주·북중국 등지 수출도 중일전쟁 후 격증하고 있었다(1938년 35만 9,000석, 1939년 9월 말 현재 83만 7,600석).108)嶋元勸,≪食糧政策再建と朝鮮≫(경성일보사, 1939), 34쪽.
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 朝鮮支部 編,≪朝鮮經濟年報≫(1941·1942년판), 65쪽.

식량 수급의 대비책으로 1939년 조선과 일본에서 증미계획이 실시되었다. 1939년 조선의 증미계획은 3개년 계획으로 주로 경종법 개선으로 120만 석을 증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해로 미곡생산량은 1,453만 석에 불과하여 전년도 생산량보다 1,000만 석이 감소하였다. 남부지방 8개 도의 경작예정면적 중 58%(70.9만 정보)가 7할 이상 감소·수확전무 혹은 경작불능의 상태에 빠졌고, 평년 생산량의 54%(916만 석)가 감소되었으며, 이재농가는 미작농가의 60%(118만 호)에 달했다. 특히 이재농가가 전라북도는 95%, 경상북도는 80%에 이르렀다. 총독부가 인정한 要구조농가는 미작농가의 40%였다.109)조선총독부 사정국 사회과,≪昭和十四年旱害誌≫(1943), 63·90쪽.

1938년 전체 논 면적 173만 9,187정보 중에서 관개시설이 없는 천수답은 52만 2,373정보, 전체의 30%를 차지하였다. ‘관개답’ 121만 6,814정보(70%) 중에도 수리안전답 83만 894정보(47.8%), 수리불안전답 38만 5,920정보(22.2%)가 있었다.110)남조선과도정부편,≪조선통계연감(1943년판)≫(1948), 46∼47쪽. 약 83만 정보가 수리안전답인데 반해, 천수답과 수리시설이 있으나 불안전한 논을 합쳐 약 90만 정보, 전체 약 52%가 한해에 취약한 상태였다. 이런 수리불안전답이 존재하는 한, 경종법 개선만으로는 증미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다. 1939년 한해는 수리안전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진행된 경종법 개선을 무효로 만들었고, 관개개선을 포함한 토지개량사업의 중요성을 다시 대두시켰다. 또한 천수답을 포함한 수리불안전답은 강우만 기다리기다가 비가 오면, 단기간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서 모내기를 해야 했다. 따라서 수리문제는 증산만이 아니라 농촌노동력을 공광업 방면으로 공출하려는 노무동원계획과 관련해서도 해결되어야 했다.

일제는 1939년에 실시하던 계획을 계승하여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조선증미계획(이하 증미계획)을 1940년부터 실시하였다. 증미계획은 6개년 동안 680만 석을 증산하여 총생산량 3,005만 석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경종법 개선으로 511만 석(75.1%), 토지개량사업으로 169만 석(25%)을 증산하려고 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경종법 개선의 중점은 판매비료의 투하와 종자개량사업의 장려였으나, 이번에는 이외 모든 방안이 검토·활용되었다. 실행단위는 부락연맹 및 그에 준하는 단체로 하고, 공동 못자리 설치, 병충해 방제, 신품종 육성, 판매비료 시비법 개선, 深耕과 秋耕의 장려, 적기작업, 자급비료 증산, 촌락공동작업 장려 등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였다. 이를 실천하려면 노동력이 이전보다 많이 소요되어야 했다.

1939년 증미계획이 수리시설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간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는 토지개량사업을 소극적이나마 추진했다. 1920년대 토지개량사업은 개간·개척·지목변경 등으로 논의 면적을 적극 확장해왔다. 그러나 이 때는 급속한 증산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고 자재부족으로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기존 논의 수리시설개선에 중점을 두고, 새로 논의 면적을 확장하는 사업은 수리시설개선과 동시에 실시하는 것이 유리한 곳으로 한정했다.111)조선총독부 농림국,≪朝鮮の農業≫(1942), 290∼295쪽.

1940∼1941년 토지개량사업의 실적은 관개개선 2만 7,000정보, 경지정리 6,000정보, 암거배수 2,000정보, 소규모사업 4,000정보 등이었다. 미곡수확량은 1940년의 경우 2,152만 석으로 1939년보다 약 700만 석 증가하였지만, 평년 수확량 2,300∼2,400만 석과 비교하면 저조한 실적이었으며, 1941년에는 2,488만 석으로 평년작을 약간 웃돌았다.

1942년에는 太平洋戰爭이 시작됨에 따라 증미계획이 장기적인 계획으로 확충되어(이하 갱신증미계획), 1951년까지 사업을 전개하여 1953년까지 완료하기로 했다. 토지개량사업은 1942년 이후 10개 년간 시행면적 57만 7,000정보를 새로 설정하고, 1943년에는 300정보 이상의 대지구 관개개선사업과 간척사업을 대행하는 조선농지개발영단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갱신증미계획의 증산량은 1,138만 3,000석인데, 경종법개선으로 518만 7,000석, 토지개량사업으로 619만 6,000석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토지개량사업에 의한 미곡증산의 비율이 이전 증미계획의 25%보다 54.4%로 대폭 상향조정되었다.

갱신증미계획의 실적을 보면, 조선농지개발영단이 담당하기로 한 토지개량사업 31만 6,000정보에 대해, 착수면적은 1945년까지 9만 정보에 그쳤다.112)최유리,<일제말기 조선증미계획에 대한 연구>(≪한국사연구≫61·62, 1988), 387∼389쪽. 수리불안전답의 해소가 증미의 절대적인 조건인데, 토지개량사업의 부진은 증미계획 실패의 큰 원인이 되었다. 1942년 이후 계속된 한발로 미곡수확량은 1942년 1,568만 석, 1943년 1,871만 석, 1944년 1,660만 석으로 증산은 커녕 평년작(2,300만 석)의 70%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었다. 1942년의 한수해는 1939년 한해에 못지 않게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는데, 이 때는 식량공출의 강화로 농가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다. 1939년과 1942년 한수해 피해 호수를 비교하면, 구조호수는 1939년 10만 7,051명에서 1942년 31만 2,512명, 구조인원은 22만 5,772명에서 75만 1,885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113)樋口雄一,≪戰時下朝鮮の農民生活誌≫(사회평론사, 1998), 219쪽. 피해 정도를 숫자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1942년 한수해 피해 농가도 1939년과 마찬가지로 총독부의 노무공출의 대상이 되었다. 1942년부터 관알선 노무동원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1943년 말, 농업생산책임제(1944년)를 앞두고, 천수답 해소에 중점을 두고 토지개량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직접 자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공사방법으로 1944년 모내기까지 확실히 완성할 전망이 있는 小溜池·井戶·洑 등을 급속히 축조하여, 전국에 10만 정보의 수리시설을 갖추기로 하였다. 또 경지확장을 위해 開烟 2,000정보, 野溪개수·경지보전사업 8,100정보, 소하천보수·황폐지복구사업 4,100정보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 사업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하는 ‘전국적인 일대국민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114)<第二次食糧增産對策決す>(≪朝鮮≫, 1943. 12), 74쪽. 1944년 조선인 노무동원 중 근로보국대 192만 5,000명을 포함한 ‘도내동원’ 245만 4,000명은 이러한 토지개량사업의 실시와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화 전
1937 1,736,368 2,769,876 437,525 4,943,369
1938 1,750,844 2,764,833 442,044 4,957,721
1939 1,762,774 2,763,983 431,750 4,958,507
1940 1,770,395 2,740,763 423,072 4,934,230
1941 1,769,572 2,719,964 399,014 4,888,550
1942 1,767,344 2,707,982 374,247 4,849,573
1943 1,704,257 2,878,051 4,582,308

<표 1>경지 면적의 추이 (단위:정보)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 12쪽.
비고:소수점 반올림.

또한 주요식량 밭작물인 맥류·잡곡 등을 급속히 증산하기 위해, 휴한지의 이용, 면작 등의 맥간작 장려, 경작방식의 개선 등으로 신규경작면적 3만 정보, 과수원·桑園의 간작 등으로 1만 정보, 답이작의 신규면적 2만 3,000정보를 확보하기로 했다. 특히 상습적으로 한해를 입는 논 5,000정보를 밭작물로 전환하기로 했다.115)위와 같음.<표 1>에서 보듯이 전체 경지면적은 1940년부터 줄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공업의 발달로 인한 부지증대도 큰 원인이었다. 논의 면적은 1941년부터 줄곧 감소하였고, 밭은 1940년부터 감소하다가 1943년부터 증가하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전개된 경지확장이 밭의 면적을 중심으로 진행되거나, 수리불안전답의 밭으로 전환 등도 그 원인이었다.

일제는 미곡 등 농산물의 증산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필요량을 확보하기 위해 1943년 공출사전할당제를 실시하였고, 사전할당제를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각 농가의 생산책임량을 결정하는 농업생산책임제를 1944년부터 실시하였다. 농업생산책임제는 미·맥·잡곡 등 필수농산물 13개 품목에 대해 촌락별 책임생산 수량을 할당하여 부과하는 조치였다. 13개 품목을 증산하다 보면, 경작면적이 경합하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는데,116)久間健一,≪朝鮮農政の課題≫(成美堂書店, 1943), 382쪽. 이를 방지하기 위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의 증가와 천수답을 밭으로 전환하여 경지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도 함께 제시되었다. 할당생산의 책임자는 지주이며, 농민은 촌락연대로 책임수량을 경작하도록 되었다. 1944년 미곡생산책임은 경작예정면적 162만 2,000여 정보에 증수량 160만 석을 포함하여 2,600만 석의 획득을 목표로 하였다.117)<농업생산책임제실시요강>(≪朝鮮≫, 1944. 5), 5쪽.

종래 판매비료의 투입량 증가는 품종개량의 보급과 함께 미곡의 생산량을 확대하는 데 주된 요소였다. 그러나 판매비료의 소비량은 1938년 24만 5,079톤을 최대로 이후 감소하였다.<표 2>와 같이 1944년 질소비료의 소비량은 7만 8,000톤으로 1939년 12만 6,360톤의 약 62%에 불과하였다. 대신 자급비료의 소비량을 증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원료인 짚이 가마니 등 藁工品의 중요자원이 되었고 양곡 공출이 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급비료의 원료부족으로 퇴비제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1941미곡년도 이후 공출강화로 영농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경지의 일부 반환 혹은 농경태업이 우려될 수준이었다. 1944년 실제 미곡 경작면적은 132만 2,000정보에 불과하였고, 생산량도 평년작에서 700∼800만 석이나 감소하여 1,660만 6,000석에 그쳤다.118)村上勝彦·富田晶子·橋谷弘·竝木眞人,<植民地期朝鮮社會經濟の統計的硏究>(1)(≪東京經大學會誌≫136, 1984), 13쪽.
<농업생산책임제실시요강>(≪朝鮮≫, 1944. 5), 5쪽.

  질 소 인 산 가 리
1939 126,360(757) 50,344(302) 6,446(39)
1940 115,542(694) 49,225(296) 5,376(32)
1941 108,159(655) 40,832(247) 3,804(23)
1942 108,159(655) 19,679(120) 3,183(19)
1943 68,545(525) 10,042( 61)
1944 78,000(472) 7,000( 42)

<표 2>판매비료의 소비량 (단위:톤)

*≪조선경제통계요람≫, 1949, 31쪽.
비고: ( )는 경지 1반당 소비량

1945년도 증미목표는 2,940만 석이었으나 심각한 생산조건의 저하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0만 정보를 밭으로 전환하고, 미곡경작면적 149만 1,569정보에, 생산책임량을 2,360만 석으로 조정하였다. 또 자급비료의 사용량을 확대하기 위해 농업책임생산 품목 중에서 새로 퇴비를 추가하고, 대신 소·말·돼지·면양을 삭제하였다. 논의 밭으로 전환, 퇴비의 증산도 모두 촌락 공동책임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119)近藤釰一 편,≪太平洋戰下の朝鮮≫4(우방협회, 1963), 6·22·123쪽.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에는 기후가 순조롭고 강우량도 많아 천수답도 모내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10만 정보의 밭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곡생산량도 약 2400만 석 정도를 획득하였다고 한다(石塚峻,≪朝鮮における米穀政策の變遷≫, 우방협회, 1983, 55쪽).
大藏省 管理局,<조선편>(≪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61쪽.

농기구의 부족, 비료의 절대량 부족 등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노동력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생산여건으로 보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노동력은 농외로 유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뒤의<표 3>에서 보듯이 1941년 이후 계속 감소하는 수확량이나마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농촌에 남아 있던 노동력의 강도 높은 혹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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