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3. 전시수탈정책
  • 2) 농업증산정책과 농산물 수탈
  • (3) 미곡공출의 전개 과정과 농가경제의 파탄

가. 전시체제 아래 식량수급사정의 변화

<표 3>에서 보듯이 1937년은 미곡 대풍작으로 최고생산량 2,600만여 석을 얻었고, 1938년 2,400만 석을 거둔 후, 1939년에는 대한해로 급격히 감소하여 1,400만 석을 생산하는데 그쳤다. 조선미의 일본 이출량은 1938미곡년도(1937년 12월∼1938년 11월) 1,000만 석을 돌파한 뒤, 1939미곡년도 690만 석, 1940미곡년도 약 600만 석으로 격감하였다. 1939년의 대감소는 전시하 식량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내 미곡소비는 1937년까지는 1,200∼1,300만 석 정도에서, 1938년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1942년 1,800만 석에 이르렀다. 소비증가의 주된 이유는 전시 공업화의 결과로 공장·광산노동자의 증가에 따른 소비의 증가에 기인하였다.

    내역
미곡년도
공 급 량 수 요 량
생 산 량 수이입량 수이출량 소 비 량
1937 19,411 200 7,202 12,579
1938 26,797 44 10,997 15,784
1939 24,139 308 6,895 17,646
1940 14,356 372 601 13,982
1941 21,527 213 4,232 17,345
1942 24,886 73 6,273 18,613
1943 15,687 897 1,303 15,306
1944 18,719 20 4,121 14,597
1945 16,052 1,756 14,295

<표 3>조선의 미곡수급상황 (단위:천석)

*近藤釰一 편,≪太平洋戰下の朝鮮≫4, 88∼90쪽;조선은행조사부,≪조선경제연보≫Ⅲ, 28쪽.

일제는 증미계획 등 일련의 농업생산력의 확충에 노력했지만, 미곡생산량은<표 4>와 같이 1941년 이후 감소하였다. 미곡 감소에 직면한 일제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있는 식량대책은 소비규정과 배급기구의 편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라고 하며,141)≪朝鮮經濟年報≫(1941·1942년판), 249쪽. 식량의 출하(공출), 유통(집하 및 배급), 소비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필요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