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3. 전시수탈정책
  • 3) 노동력 동원정책과 노동력 수탈
  • (2) 노동력 동원의 방식과 규모

가. 모집·관알선·징용

일본정부는 군수산업의 노동력 수요 급증과 병력동원에 따른 노동력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1939년부터 노무동원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 중의 하나가 조선인 노동자의 ‘이입’과 생산현장에 대한 배치였다. 총독부는 국내외 노동력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노동력의 동원방식을 모집·관알선·징용 등으로 강화하였다.

첫째, ‘모집’은 1910년 이래 일본의 탄광, 댐공사 등에 필요한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1939년 7월 일본정부는 조선인 8만 5,000명의 ‘공급목표’를 포함한 1939년도 노무동원계획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전시체제 ‘모집’ 방식의 노무동원이 개시되었다. 모집수속은 우선 후생성으로부터 고용인가를 받은 사업주가 조선총독부의 모집허가를 받아, 지정된 지역에서 할당수를 모집하여 집단 도항시키는 것이다. 노무고용자·고용조건·모집지역·모집기간·수송방법 등 모두가 후생성, 조선총독부와 그 하부기관의 계획과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1939년 대한해의 구제사업으로 총독부는 이재민 중 5만 1,176명을 조선내 토목건축공사, 광산 방면의 노동자로 취업을 알선하고 또 일본 2만 2,608명, 만주개척민 849호를 알선, 이주시켰다.187)≪朝鮮經濟年報≫(1941·1942년판), 62쪽.
조선총독부 사정국 사회과,≪昭和十四年旱害誌≫, 181∼182쪽.
1939년 일본으로 모집방식의 동원이 이루어졌던 배경에는 이재농민을 포함한 영세농이 존재하였다.

둘째, ‘관알선’이다. 총독부는 국내외 노동력 수요 급증에 대한 동원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개입이 필요하자, 1934년부터 수행해 오던 관알선을 재정비했다. 1940년 12월<조선직업소개소령>에 따라 부·읍·면 행정기관은 직업소개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고,188)허수열,<조선인 노동력의 강제동원의 실태-조선내에서의 강제동원정책의 전개를 중심으로->(차기벽 엮음,≪일제의 한국 식민통치≫, 정음사, 1985), 320쪽. 또 같은 해 10월 총력운동의 실시로 지방연맹의 조직망이 구축되어,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제도장치가 보완되었다. 1941년 6월 조선노무협회가 총독부 산하에 설치되어 동원사무가 일원화되고 강화되었다. 노무동원기구가 보강되어 가자, 총독부는 1941년 3월<조선인노무자 내지이입알선요강>을 공포하고 1942년 2월 ‘관알선’ 방식에 따라 일본으로 노무동원을 실시하였다.

일본내 알선수속은 일본에서 고용인가를 받은 사업주가 제출한 알선신청에 대해 총독부는 사정 승인한 인원을 도별로 할당하고, 할당받은 도는 군과 직업소개소를 통해 면에 인원을 할당하여 조달하는 것이다.189)<勞務動員實施計劃ニ依ル朝鮮人勞務者ノ內地移入斡旋要綱>(≪復命書綴≫, 정부기록보존소 소장문서 no. 88-12). 조선내 알선 수속은 사업주가 노동자사용계획서를 11월 말일까지 사업지를 관할하는 도에 제출하면, 도는 이에 의거하여 ‘所要勞動力數調書’를 작성하고, 이 조서와 ‘노무자원조사’의 결과에 의거하여 ‘도내노무조정계획’을 수립 후, 이를 12월 20일까지 총독부에 보고하도록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각 도의 노무조정 계획서를 수합하여 ‘본부노무조정계획’을 수립하여 다음해 1월 20일까지 각 도에 시달한다. 도는 부·군을 통해 읍·면에 할당하고, 읍·면은 ‘出稼(轉業)희망자’ 및 ‘출가(전업)가능자’ 명부를 작성하여 두었다가, 국민총력읍면연맹 및 부락연맹의 협력을 받아 노동자를 공출하는데, 이 때 경찰과 긴밀히 연락하여 원활히 공출하도록 되었다.190)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勞動者斡旋要綱竝ニ同細則≫(1941),≪復命書綴≫소수.
각 도에서도 관알선의 내부지침이 마련되었다. 경상남도의 경우, 공출할 수 있는 노동자를 경찰과 함께 부락연맹마다 그 명부를 작성한 뒤, 읍·면은 할당이 있을 때마다 명부에 따라 노무자를 선출하여 조달하고 있었다(경상남도 노무과,≪勞動關係法令集≫, 1944;樋口雄一,≪戰時下朝鮮の農民生活誌≫, 247∼249쪽).

이같이 식민지 행정기구를 축으로 노동력 조달기구의 계통화·일원화는 할당인원에 대한 실행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입계획수는 1939년 8만 5,000명, 1940년 8만 8,000명, 1941년 8만 1,000명에서 관알선이 시작되는 1942에는 12만 명으로 크게 늘었으며, 실제 이입수도 1941년 5만 3,482명에서 1942년 9만 6,010명으로 계획수에 대한 이입실수의 비율도 66%에서 80%로 증가하였다.191)海野福壽,<朝鮮の勞務動員>, 106쪽.

셋째,<징용령>은 1939년 7월 공포되어 1944년까지 다섯 차례 개정되었다. 1943년 개정 이전에는 특별히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인원 모집의 보충적 방법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발동하도록 되었는데, 1943년 개정으로, “국가의 요청에 기초하여 제국신민으로 하여금 긴요한 총동원업무에 종사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는 자유모집으로 소요인원의 확보 여부와 관계없이<징용령>을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192)山內敏彦 외,≪朝鮮經濟統制法全書≫, 463쪽. 징용은 국가권력으로 노무를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피용자는 그 의사와 관계없이 노무에 복무해야 하며, 징용을 거부할 때는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징용은 “일정수의 인원을 반드시 채우지 않으면 안되며, 징용에 의존”한다고 하듯이193)大藏省 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72쪽. 다른 동원방식보다 가장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하여 동원계획을 완전히 달성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다나카(田中) 정무총감 스스로 밝혔듯이 관알선도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강제공출’인194)국사편찬위원회,≪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13, 644쪽. 점에서는 징용과 같지만, 법적 제재가 뒷받침되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징용이 실시되면서 일부를 제외하고 다른 방식보다 징용으로만 노무동원을 도모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195)大藏省 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 68∼69·72쪽.

조선에서는 징용은 1941년 군요원에 한해 실시되었다. 근로보국대와 같은 광범한 동원수단이 있고, 조선민중의 반발이란 정치적 이유도 고려하여 전면적인 실시는 1944년 2월 이후부터였다. 우선 공장·광산의 현원징용이 있었고, 8월부터 일반노무자의 징용이 시작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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