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1) 1930년대 초반 농촌사회의 변화
  • (3) 소작쟁의의 격증

(3) 소작쟁의의 격증

1930년대 초반 조선의 농촌 사회는 지주소작관계를 중심으로 급속히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층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하였고 이에 따라 농민층의 일제와 지주에 대한 투쟁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결과 농민층의 소작쟁의는 급증하였다. 이 시기 소작쟁의의 연도별 증감현황은 다음<표 4>와 같다.

연 도 발 생 건 수 동원인원수 사건당인원수
1921 27 2,967 110
1922 24 3,539 148
1923 176 9,060 52
1924 164 6,929 42
1925 11 2,646 241
1926 17 2,118 125
1927 22 3,285 149
1928 30 3,572 119
1929 36 2,620 73
1930 92 10,037 108
1931 57 5,486 96
1932 51 2,910 57
1933 66 2,492 38
1934 106 4,113 39
1935 71 2,795 39
1936 56 3,462 62
1937 24 2,234 93
1938 30 1,338 45
1939 24 969 40
합 계 1,085 72,572  

<표 4>소작쟁의의 연도별 증감 현황 (1921∼1939년)

*조선총독부 경무국편,≪최근 조선의 치안상황≫1938년판, 97∼99쪽;<1940년도 조선내 노동쟁의 및 소작쟁의에 관한 조사>(≪사상휘보≫22, 1940), 14∼15쪽;지수걸,≪일제하 농민조합운동연구≫(역사비평사, 1993), 44쪽에서 재인용.

이를 다시 원인별로 보면 다음의<표 5>와 같다.

연도\원인 소작권의 취소 및 이동 소작료 증액반대 기 타
1920 1 6 8 15
1921 4 9 14 27
1922 8 5 11 24
1923 117 30 29 176
1924 126 22 16 164
1925 1 5 5 11
1926 4 4 9 17
1927 11 1 10 22
1928 21 3 6 30
1929 15 7 14 36
1930 29 42 22 93
1931 17 27 13 57
1932 26 8 17 51
1933 36 18 12 66
416 187 186 789

<표 5>소작쟁의의 원인별 비교표 (1920∼1933년)

*朝鮮總督府警務局,≪朝鮮の治安狀況≫(1933년판), 108쪽;並木眞人 외 엮음,≪1930년대 민족해방운동≫(거름, 1984)에 수록.

위의<표 4>와<표 5>를 통해 볼 때 1930년을 고비로 소작쟁의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원인은 주로 소작권의 이동과 소작료의 인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농민층의 요구는 그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농민층의 투쟁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분석에서도 쟁의의 수단이 종래(1920년대 중반 경까지)에는 대개 온건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경부터는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과 함께 사회주의자들이 각지에서 농민단체를 설치하여 이를 좌익적으로 지도·조종하고 쟁의에 관여하여 계급의식을 선동하므로 쟁의도 점차 첨예화하기”249)朝鮮總督府 警務局,≪朝鮮の治安狀況≫(1933), 105쪽(並木眞人외 엮음,≪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에 소수).에 이르렀다. 이는 사회주의가 농민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사회주의가 농민운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23∼1924년 경부터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조직되기 시작한 청년단체는 1920년 251개, 1921년 446개, 1922년 488개로 급증하였고, 이들 단체는 실력양성론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1923년 무렵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1924년 무렵에는 사회주의가 조직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1923년에는 청년단체의 수가 549개, 1924년에는 702개로 급증하였다.250)朝鮮總督府 警務局,<各種 結社累年 盛衰表>(≪朝鮮の治安狀況≫, 1930), 202쪽. 예를 들어 단천의 하자회, 영흥의 삭풍회, 정평의 제로회, 홍원의 이럿타회, 양양의 양양신청년동맹, 고성의 변성청년회 등 각지에서 지역사회의 운동을 주도하던 청년단체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1923∼1924년 경에 청년단체의 수가 급증한 것은 조선청년총동맹의 조직과 관련이 깊다. 서울청년회와 신흥청년동맹 등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조직들이 지방에 자신의 세력을 부식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청년단체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지방에 조직된 청년단체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결국 지방이 농촌 사회인 까닭에 이들은 농촌 청년대중을 상대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농촌 사회와 농민운동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농촌 사회와 농민운동에 대하여 지방의 청년단체들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농민운동에도 사회주의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251)예를 들어 양양지역의 경우에는 1924년 조직된 양양신청년동맹의 지도자인 오일영·김대봉·최용대의 활동과 농민운동의 활동이 매우 관련이 깊게 나타난다. 이는 양양지역뿐만이 아니라 농민조합이 조직된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조성운,<일제하 양양지역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18,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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