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1) 노동조합의 조직과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

1) 노동조합의 조직과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

1920년대 후반기 이후 노동운동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흐름의 하나는 기존의 직업별 노조를 산업별 노조로 바꾸거나, 새로이 산업에 따라 노동조합들을 조직하려는 시도였다.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나타났던 노동조합 조직 발전의 일반적 경향이 직업별 노조에서 산업별 노조로 이행하여 왔듯이, 일제하 노동조합 조직도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이러한 발전과정을 경험하였다. 산업별 노조로의 조직문제는 일찍이 1927년 8월 조선노농총동맹이 노동과 농민의 양 동맹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한 방침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을 조직형태로 구체화한 것은 1928년 6월 서울의 인쇄출판업 노동자들이었는데, 이후 1930∼1931년으로 넘어가면서 전국 각지 노동단체들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산업별 노조로의 조직방침이 어느 곳에서나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도시와 지방의 중소도시, 그리고 업종과 산업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은 대도시에서 먼저 추진되어 지방의 중소도시들로 파급되어 갔으며, 같은 지역에서도 인쇄출판업과 같이 선진적 산업부문이 주도하고 다른 부문이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지방의 중소도시, 또는 대도시라고 하더라도 영세 업종에서와 같이 산업별 조직이 어려운 경우에는 일정 지역내의 공장들을 한데 묶은 조직방식이 고안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그 지역의 이름 다음에 합동노조라는 명칭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단순히 지역의 명칭만을 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이 노동조합의 조직에 가져온 주요한 변화들 중에서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이전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강령이나 구호보다는 생산현장에 보다 접근하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강령이나 목적들을 노동조합들이 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컨대 1920년대 노동조합들이 노동계급의 해방이나 계급의식의 고양과 같이 상대적으로 급진적이고 관념적인 목표를 추구하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보다 실제적이고 생산현장에 적합한 요구들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시기 노동조합들이 순수한 경제투쟁만을 지향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민족차별에 대한 반대나 8시간 노동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유년노동금지와 부인노동자의 출산에 대한 임금지급, 단결권 등의 획득,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획득에서 보듯이 이전 시기와 비슷하게 정치투쟁적 성격을 지니는 요구들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에 따라 나타난 또다른 현상으로는 노동운동의 전략과 조직방침이 변화하면서 공장과 기업 중심의 운동을 지향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의 노동운동이 공장보다는 흔히 가두에서 전개되었다고 평가되어 왔듯이, 노동조합이 노동자와 공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산업별 조직운동이 제기된 배경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산업별 노조에서는 공장반을 조직하여 노동조합의 활동과 조직의 중심을 공장과 기업으로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내의 각 공장에 공장반을 두어 노동조합의 분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내에 산업에 따른 노조의 지회를 설치한 다음, 이를 전국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이 산업별 노조의 조직방침이었다.

산업별 노조로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났던 또다른 조직적 변화로는 노동조합들에서 부인부나 청소년부·실업부 등의 전문부를 설치하여, 미숙련 노동자의 대다수를 이루는 여성이나 청년·소년 혹은 실업자들을 단일 조직으로 묶기 위한 조직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여성이나 소년·청년·실업자 등을 포괄하는 전문 부서는 1929년에 들어오면서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주요 노동조합들에서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청소년부나 부인부·실업부와 같은 부서의 설치는 1920년대 후반의 세계공황과 1930년대의 군수산업 중심의 ‘중화학공업화’를 배경으로 부인노동자와 유소년노동자가 주축이 된 미숙련노동자 및 실업노동자의 수가 증대되었던 상황에서 이들 노동자 층을 포괄하는 단일한 조직을 결성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 시기 제기된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이 원래 독점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생산기술의 고도화와 대규모 생산의 일반화에 따라 공장내의 분업과 아울러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미숙련·반숙련 노동자가 생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에 따라 동일 산업부문에서 직능이나 직업의 특수성에 따른 이해관계의 상이성을 극복하여 동일 산업부문의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조합으로 조직함으로써 자본가에 대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정한 형태로 이러한 상황이 출현하고 있었다. 즉 1929년 세계공황을 계기로 1930년대 이후 일본 독점자본이 대거 조선에 진출하였으며, 특히 군수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양적·질적 성장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1930년대 이후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이른바 산업합리화 정책의 진전으로 숙련노동의 쇠퇴와 여성 및 아동노동자가 주력을 이루는 미숙련 노동자의 증대가 일정 정도 진행되었으며, 실업 노동자의 수 또한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층 내부에서 다양하게 분화된 이들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전문부서들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에 따른 조직상의 변화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주도에 의해 추진되었던 산업별 노조운동이 과연 당시의 노동자 상황과 노동운동의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적합한 방식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식민지에서 공황의 진전과 자본주의의 일정한 발전에 따른 미숙련노동자와 실업노동자들의 증대 등은 산업별 노조 건설운동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객관적 조건으로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자본주의 발전 정도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운동노선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아직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군수산업 부문과 관련되어 발전하기 시작한 일부 산업을 제외한다면 이 시기 산업 부문이 산업별 노조의 당위성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가에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 산업별 노조로의 이행은 사회경제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이유가 훨씬 강했다. 원래 산업별 노조는 파업과 함께 등장했고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은 산업별 노조와 함께 생겨난 것이며, 나아가서 산업별 노조의 발전에는 정치사회적 전망과의 결합이 중요시된다는 점에서,313)한국사회연구소, ≪노동조합조직연구≫(백산서당, 1989), 19·49∼50쪽. 당시 노동운동가들은 경제적 근거들 못지 않게 정치적 이유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국내에서는 자신의 지지세력이나 동조계급을 확보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이 시기의 노동운동가들은 흔히 코민테른(Comintern) 등의 국제적 원조나 지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하의 노동운동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혁명운동의 한 고리로 전개되었으며 산업별 노동운동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측면이 강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의 산업별 노조 건설운동은 궁극적으로 전국적 차원에서의 단일조직을 결성하여 전국적 연대와 단결을 기반으로 한 투쟁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1928년의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이후 개최된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의<조선문제에 대한 결의>(이른바<12월테제>)를 배경으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한 조직방침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즉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은 소부르주아적 지식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던 종래의 조직방식을 지양하고 노동자와 빈농을 중심으로 특히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쉐비키적 대중적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는 방침에 입각하여 전국 각지에서 합법·비합법의 노조를 결성하기 위하여 집중적으로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운동은 비록 그 성과는 미미했더라도 지속적으로 시도된 전국적 단일조직 건설운동이라는 점에서 해방 이후 산업별 노조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합법적 노동단체에서의 이러한 시도들에 이어 이 과제는 이른바 비합법 영역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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