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3) 개량주의와 어용 노동조합

3) 개량주의와 어용 노동조합

1920∼1930년대의 세계노동운동사는 혁명적 조류에 맞서 개량주의와 기회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이미 언급했듯이 국제 노동운동은 좌편향으로 흘렀으며, 이는 일제하 노동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에서 결의한 조선문제에 대한 테제들에도 반영되었다. 예컨대 이미 언급한 코민테른의<12월테제>는 민족개량주의가 성장하는 추세에 주목하여 그들의 냉담성과 우유부단성을 폭로하는 한편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하여 더욱 정열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0년 프로핀테른의<9월테제>에서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려는 민족개량주의적 부르주아지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들 개량주의적 지도자의 기회주의적이면서 배반자적인 전술을 계통적으로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듬해 1931년 범태평양노동조합의<10월서신>도 민족부르주아지는 순종적인 민족개량주의적, 타협적 조합을 조직하고 있다고 하면서 개량주의자들의 반역적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국제기구들의 이러한 주장은 국내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에도 일정한 형태로 반영되었다. 예컨대 위의<9월테제>는 조선노동총동맹을 민족개량주의적 지도부가 주도하는 단체로 규정하였으며,<10월서신>역시 조선노총이 민족부르주아지의 앞잡이인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아울러 1929년의 원산총파업이나 1930년의 신흥탄광 노동자 파업,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에서 보인 지역 노조들의 지도양상 역시 개량주의적이었다고 평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평가는 해방 이후 특히 북한학계나 남한과 일본학계의 일부로 이어졌으며,324)윤여덕, 위의 책.
小林英夫,<1930年代 前半期の朝鮮勞働運動について-平壤ゴム工場勞働者のゼネストを中心にして>(≪조선사연구회논문집≫6, 조선사연구회, 1969;≪1930년대 민족해방운동≫, 거름).
이러한 맥락에서 강현욱은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에서 나타났던 개량주의의 구체적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다.325)강현욱,≪항일무장투쟁시기 로동운동≫(조선로동당 출판사, 1964;≪일제하 조선노동운동사≫, 일송정, 1989), 192∼193쪽.

1920년대 후반 미증유의 세계공황이 식민지에 파급되었던 사실을 배경으로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던 노동대중의 생활상의 요구와 의식의 고양은 기존의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났던 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 성향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다. 합법적 노동조합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도 여전히 합법성만을 고수하였으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하여는 공장주 및 경찰과 함께 협의나 강제조정, 또는 탄원 등에만 의존함으로써 폭발적으로 고양되고 있던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을 애써 외면한 것도 사실이었다. 합법적 노동조합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의 의식의 고양과 투쟁성의 강화라는 대중적 추세에 따라가지 못하는 ‘개량주의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93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은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이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이에 따라 불행하게도 합법영역에서의 운동 일반이 공공연하게 개량주의로 매도되는 일정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연구들에서 그러하듯이 합법 영역에서의 운동 일반이 전체적으로 개량주의적 속성을 보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견해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당시의 노동운동자들이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안에서의 활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론적 차원에서는 노동운동자들이 개량주의 조합 안에서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 공개활동과 비밀활동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했기 때문이다.326)1930년대 전반 당재건 운동에 착수하였던 이른바 화요파 공산주의자인 김단야나 박헌영 등이 작성한 노동조합방침에서는, “비록 적색노동조합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산업 부문 안에 있는 개량주의 노동조합 바깥에서 어떤 비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이 같은 경우에는 개량주의 조합 안에 혁명적 반대파 그룹을 만들어서 혁명적 정치로 노동자들을 획득하고 대중적 토대를 가진 적색노동조합을 형성하는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터,<Letter to the Communist in Korea>, 문서군 495, 목록 135, 문서철 183, 1932;최규진, 앞의 글, 129·130쪽에서 재인용).

비합법운동에 종사하였던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개량주의적 조합 안에서의 활동에 많은 역량을 경주하였으며, 이는 곧 좌선회한 국제 노동운동의 이중조합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당시 조성된 상황과 운동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개량주의적 조합 안에 들어가 “노동대중을 전취”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구호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적어도 개량주의와 혁명적 노동조합을 이분화하여 대립적으로 파악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에서 생명을 걸고 노동운동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 합법운동은 개량주의로, 비합법운동은 혁명운동으로 양분화되어 인식되는 상황이 불가피하게 조성되었다고는 하지만,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자들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합법 노동단체들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전국 주요 도시의 노동단체들은 193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지역 노동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즉 개량주의로 일컬을 수 있는 노동조합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조류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지역 내에서 노동조합의 역할과 운동역량, 일제의 매수와 탄압에 대한 대응양식 등에 따른 편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량주의 노동조합과 때로는 구별되면서도 때로는 중복되어 이해되는 개념으로 어용노조가 있다.327)1920년대 초중반에는 ‘異流團體’ 혹은 1930년대 이후에는 ‘파시스트 단체’ 등으로 일컬어 졌던 ‘반동단체’ 일반이 그것인바, 일제가 전시체제로 이행한 시기인 1930년대의 파시스트 조직은 그만 두고라도 1920년대의 합법공간에서 이류단체나 반동단체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는 노동총동맹을 비롯한 노동단체들에서 이에 관한 결의사항을 빈번히 채택하였던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용노조는 개량적 노동단체의 최저변에 위치하면서 자본이나 권력에 의한 매수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조합으로서의 자율성을 가지지 못한다. 노동자의 자주적 대중조직이라는 기본규범에 미달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체라기 보다는 노조간부,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기업가나 일제의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량주의적 노조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일부 찾아 볼 수 있었지만, 노동조합의 어용적 성격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조합내의 상층 지도부에 한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국면과 운동상황의 변동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부산의 노우회나 대구의 대구노동회 또는 원산의 함남노동회와 같은 사례들에서 보듯이328)김경일,≪일제하 노동운동사≫(창작과 비평사, 1992), 283∼303쪽. 어용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은 조합의 민주화와 자주화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왔다.

개량주의와 어용 노동조합은 주로 운송이나 운반에 종사하는 일용노동 중심의 비공장 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점은 숙련공 중심의 공장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던 서구 노동사에서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이 운수·운반 중심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용노조가 유의미했던 이유로는 이 범주의 노동자들이 산업 발전의 식민지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에 공장노동자는 경인지역과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편재되어 있었다는 식민지 노동력 구성의 특수성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로는 일본인 대공장의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조직을 거의 갖지 못하고 대자본의 노동통제 아래 개별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던 반면에, 운수·운반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교섭을 위한 편의에서 혹은 노동과정상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특히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이행하면서 전시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이들 항만하역이나 하물운반 노동자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보다 증대되었다. 일제의 어용 노동정책이 특히 이 부문의 노동자들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어용노조의 정치적 의미와 비중은 이 부문의 노동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용 노동조합은 노동자 상층인 십장, 감독뿐만 아니라 지주나 중소상인, 전직 관리나 경찰관, 지식인 등과 아울러 부랑자·遊蕩兒·한량 또는 전향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329)1930년의 한 운동가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개량주의의 토대와 구성요소로 ① 노동조합 상층에 있는 기술노동자·십장·중간배(소개인)들, ② 노동계급의 대열을 분열시키기 위한 각종 단체(함남노동회·대구노동회 등)와 지식인들, ③ 일제의 백색 테러 경찰 정책과 관제 노동조합 등의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함우석,<조선좌익노동조합의 조직적 제문제>,≪태평양노동자≫9·10, 1930, 36∼37쪽). 이들은 거의 전부가 조선인들이었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일제는 하층 노동대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고 그 역량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과도한 착취의 몫 중에서 극히 일부를 조합의 간부나 십장 등에게 떼어 줌으로써 조선인들 사이에서의 민족적 분열과 반목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조장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분할통치라는 일제의 의도가 여기에서도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존권 자체를 위협하는 노동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 의해 어용노조의 상층 지도부에 대한 노동력 재생산조건의 차별화가 가능하였는데, 일본식 노무구조의 봉건적이고 위계적인 복잡한 청부제도 등이 그것을 보다 철저하고 또 용이하게 하였다. 이들 조합을 통하여 노동의 분열과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임금의 지속적인 하락과 아울러 순종적인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 식민지에서 자본축적이 보다 용이하고 또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조직이 ‘근대적’ 조직과 결합함으로써 지배와 통제라는 일방적 관계에서 성립하였던 개량주의적, 어용 노동조합은 반봉건적 유제의 온존과 더불어 1920년대 전반기까지 일정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의 전반적 고양에 따라 상당 부분 그 존립근거를 상실하고 매우 제한된 영향력만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이행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활동을 위한 객관적 기반이 확대됨에 따라 그 영향력은 다시 증대되었는데, 그 범위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길항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산이나 원산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노동대중의 강력한 투쟁경험이 있었던 지역에서, 혹은 30년대 전반기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에서 보듯이 운동이 강렬한 시기에, 다시 말하자면 식민체제에 대한 위협이 보다 심각한 국면에서 그것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