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4) 노동운동의 전개
  • (1) 1930년대의 노동운동

(1) 1930년대의 노동운동

1930년대 초 세계대공황이 식민지에 엄습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업생산이 위축되는 한편,<회사령>의 철폐를 계기로 발흥했던 소규모 공장을 중심으로 ‘자연도태’ 현상이 발생하여 곳곳에서 휴폐업 공장이 속출했다. ‘산업합리화’를 명분으로 한 자본측의 정리해고방침에 따라 실업자가 대량 양산되었다. 여기에 물가상승이 잇달아 임금저하현상을 가져왔으며, 이것은 결국 민중 생활의 불안정을 야기했다. 이에 따른 노동자들의 불만과 이에 대한 저항이 이 시기 노동운동을 고양시켰던 객관적 배경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1929년의 원산총파업을 비롯하여 1930년의 신흥탄광 노동자들의 집단투쟁과 평양 지역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등에서 보듯이 투쟁을 통한 경험의 축적에 따라 노동자들의 주체적 역량은 급격히 강화되었다.

다음의<표 1>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의 파업건수는 1929년에 100여 건을 보이던 것에서 1930년에는 160건으로 급격히 상승하였으며 1931년에는 식민지 시기에 가장 많은 200여 건을 기록하여 193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높은 건수를 유지하였다. 파업에 참가한 인원을 보면 1930년에 가장 많은 19,000여 명을 비롯하여 1931년에 17,000여 명을 기록하였다. 1932년부터는 점차 감소하여 1935년에 이르기까지 12,000∼15,000명 선을 유지하다가 1936년 이후에는 8,000명대로 대폭 떨어져서 1920년대 후반과 비슷한 참가 양상을 보였다.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파업 건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공황기라는 상황이 파업을 발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자본의 공세가 강해지면서 파업 과정에서 노동자의 소극성을 강화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연도 건수 참가 인원 원 인 결 과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임금 대우 기타 성공 실패 타협 미해결
1929 102 7,412 49 832 8,293 57 10 35 24 44 34  
1930 160 17,192 172 1,608 18,972 89 26 45 41 63 56  
1931 205 16,854 131 129 17,114 141 16 48 34 100 71  
1932 152 14,170 591 63 14,824 99 14 39 30 69 53  
1933 176 13,599 213 23 13,835 118 26 32 37 74 65  
1934 199 12,941 86 71 13,098 134 16 49 57 86 56  
1935 170 12,062 101 24 12,187 107 25 38 47 72 51  
1936 138 8,100 145 1 8,246 86 13 39 34 32 72  
1937 99 8,706 291 90 9,148 55 7 37 25 36 37 1

<표 1>1929∼1937년 동맹파업의 추이

*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1933), 143∼144쪽;조선총독부,<勞務ノ調整ニ關スル件>(≪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諮問案參考書≫, 1938).

좀더 구체적으로 파업의 발생 건수를 서울과 평양 및 부산의 3대 도시에 한정해서 살펴보면(<표 2>참조), 1925년과 1926년의 두 해 및 1930년부터 1935년에 이르는 시기에 파업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대 전반기는 일제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은 파업 건수가 기록되었는데, 1930∼1935년 사이에 일어난 파업은 177건으로 식민지 시기 전체 378건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6.8%를 차지한다. 특히 1930년부터 1933년에 걸치는 시기에 파업은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4개년 동안에 일어난 파업은 130건으로 전체의 1/3을 약간 넘는 34.4%를 기록하였다.

  연도
지역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서 울 7 6 7 20 9 14 10 7 12 5 16 11 8 13 15 9 5 6 2 4 0 186
평 양 0 0 0 3 1 9 12 3 4 7 14 13 5 19 5 9 2 1 2 2 0 111
부 산 0 4 5 2 1 2 2 0 4 10 11 8 6 6 3 6 2 4 3 0 2 81
7 10 12 25 11 25 24 10 20 22 41 32 19 38 23 24 9 11 7 6 2 378

<표 2>3대 도시에서 시기별 파업 발생건수

*김경일,≪일제하 노동운동사≫(창작과 비평사), 1992, 310∼312쪽에서 작성.

다음에 위의<표 1>에서 원인별로 보면 1930년대 전반기의 노동자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나 임금인하를 반대하는 방어적인 성격의 파업이 많았으나 그것이 매우 격렬한 성격을 지니고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방어적 성격의 파업이 빈발하게 일어났던 것은 불황으로 인한 피해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측의 시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노동자들 역시 불황으로 인한 생활고로 인해 그만큼 절박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파업투쟁의 완강성은 파업의 지속일수가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 파업투쟁이 증가되었던 것에서도 입증될 수 있다.330)강현욱, 앞의 책, 126쪽. 그러나 1930년대 이후가 되면 오히려 노동자들의 요구는 점차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 성격으로 변화해 가는 경향을 보인다.

다음에는 파업의 결과를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기에 걸쳐 파업결과를 분석한 김윤환의 연구에 따르면 요구조건이 거절되는 건수의 비율은 점차 높아지고 반대로 관철되는 건수의 비율은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331)1921∼1924년 사이에 거절된 건수는 전체 파업건수의 5.0%, 관철된 건수는 32.7%였는데, 1925∼1929년 사이의 후반기에는 거절이 17.1%로 늘고 관철은 30.8%로 줄었다. 그런데 다시 1930∼1933년 사이에는 거절이 27.4%로 대폭 늘어난 반면에 관철은 20.5%로 축소되었다(김윤환, 앞의 책, 249∼252쪽). 1930년대만을 놓고 보면 1930년대 전반기에는 성공한 파업보다는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례가 더 많았는데, 후반기로 가면서 실패한 파업에 비하여 요구조건이 관철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방어적인 성격이라고는 하더라도 파업이 완강하게 전개될수록 노자 사이에 타협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종결되었던 반면에,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린 30년대 중후반에는 오히려 이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지역별로 보면 192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경향이 나타났지만 북부 지방에서 파업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일제하의 3대 파업으로 알려진 1929년의 원산총파업을 비롯하여, 1930년의 신흥탄광파업과 평양고무노동자들의 파업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에서 보듯이, 이 지역에서 파업은 그것의 지속성과 완강성, 그리고 투쟁전술 등에서 두드러진 점이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방에서의 파업발생 건수 또한 적어도 19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전체 발생 건수에서 20% 내외의 비율을 보였지만, 후반기에 이르러 10% 이하로 그 비중이 감소하였다. 전반적으로 보면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파업발생 건수가 감소할 뿐만 아니라 파업 1건당 참가 인원수 역시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역별로는 북부지방의 파업 1건당 참가 인원수가 100명 이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중화학 공업지대로서 이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후반기로 가면서는 50명 내외로 떨어지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다소 불완전한 통계이기는 하더라도 직업별 파업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표 3>에서 보듯이 1930년부터 1935년의 6개년에 걸친 자료가 나와 있다. 표에서 보듯이 거의 모든 직업 부문에서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망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방직이나 정미·고무 등의 공장노동자가 대략 40%, 인부나 짐꾼, 또는 토목건축 노동자와 같은 비공장노동자가 6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공장노동에서는 잡공장을 제외한다면 방직·제사 노동자들이 가장 활발한 투쟁양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 시기 동맹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고무공장 노동자들이 1930년부터 1933년에 이르기까지 전혀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비공장노동자의 직업범주에서는 인부나 짐꾼과 같은 자유노동자들이 가장 활발한 참여양상을 보였고 토목·건축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연 도 방직
제사
직공
제분
정미
직공
잡공

직공
고무
공장
직공
인부

짐꾼
광부 인력
거꾼
양복
직공
우편
신문
배달
직물
공장
직공
토목 목공 기타
1930 건수 19 10 44   33 8   2 2   24 2 16 160
인원 3,707 2,182 5,173   2,613 1,113   158 13   2,988 31 994 18,972
1931 건수 16 17 44   40 8   2 2   52   22 203
인원 1,487 1,340 2,401   2,787 333   37 22   7,331   1,376 17,114
1932 건수 13 4 30   34 10   1 3   32 2 23 152
인원 2,999 344 2,141   2,729 1,286   18 36   3,742 121 1,408 14,824
1933 건수 13 7 24 30 57 13 1   2   2 8 19 176
인원 3,077 203 1,419 2,022 3,970 760 114   16   262 359 633 12,835
1934 건수 13 13 37 9 46 22   1 1   31 3 23 199
인원 1,805 570 1,978 449 2,551 1,462   11 23   3,128 177 944 13,098
1935 건수 10 6 25 12 20 30 9     8 29 4 17 170
인원 1,650 226 1,818 1,433 1,296 2,031 82     394 2,288 143 697 12,058

<표 3>직업별 파업 발생 건수 (1930∼1935)

*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1936), 171∼172쪽.

다음의<표 4>는 서울과 평양·부산의 3대 도시에서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생한 파업을 필자가 산업별로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위의 직업별 동향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이는데 우선 공장노동자의 파업 참가비율이 이른바 비공장 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332)공장 노동자는 섬유·화학·인쇄출판·제재 및 목제품·금속·요업·식료·가스·전기 부분을 합한 245명으로 전체 378명의 64.8%를 차지하고 있다. 앞의 표와는 달리 공장 노동자의 참가 비중이 높게 나타난 것은 대도시 지역이라는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공장노동자에서는 방직·제사 등이 중심이 되는 섬유업이 가장 많은 발생 건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위의<표 3>에서의 동향과 일치하고 있다. 고무업이 중심이 되었던 화학 부문이 그 다음을 차지하였는데,<표 3>에서는 없었던 인쇄출판업 노동자들 또한 활발한 투쟁 양상을 보였다. 다음에 비공장 노동자를 보면<표 3>(인부 및 짐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용노동이 가장 많은 발생 건수를 기록하였던 반면에, 토목·건축 노동자들은 대도시라는 특성을 반영하여 미미한 발생 건수를 보이고 있다. 대신에 상업 및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이 활발한 참여양상을 보였다.

  산별
지역
섬유 화학 운수
통신
인쇄
출판
피복
신발
일용 상업 및
서비스
제재 및
목제품
금속 요업 식료 토목
건축
가스
전기
기타
서 울 48 17 26 33 21 11 6 4 9 5 2 1 0 3 186
평 양 23 28 9 5 6 11 13 6 1 1 5 1 1 1 111
부 산 23 20 12 4 4 2 2 2 1 4 3 2 0 2 81
94 65 47 42 31 24 21 12 11 10 10 4 1 6 378

<표 4>3대 도시에서 산업별 파업 발생건수 (1920∼1940)

*김경일,≪일제하 노동운동사≫(창작과 비평사), 1992, 314∼315·557∼563쪽에서 작성.

1930년대 전반기 노동쟁의의 특징으로는 노동자 대중에 의하여 노동단체 내의 개량주의자들을 반대·배격하는 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이 흔히 지적되어 왔다.333)강현욱, 앞의 책, 126∼128·191∼193쪽.
윤여덕, 앞의 책, 137·193∼197쪽.
식민지에서의 경제공황과 일제의 대륙침략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강화되고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가 전면화되는 가운데, 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비합법 영역에서 혁명적 노동운동가들의 지도를 매개로 한층 고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예컨대 1930년의 신흥탄광 노동자 파업이나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의 파업 사례들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에 의한 대규모의 폭력적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도 이 시기의 또다른 특징이었다. 또한 이미 언급하였듯이 파업의 규모와 범위가 다른 시기에 비해 대폭 확대되었으며, 같은 지역이나 동일 산업 부문에서의 연대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아울러 일제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1920년대 후반 이래 이미 두드러진 현상으로 여러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거니와, 노동조합 조직결성의 자유나 일제 경찰의 간섭에 대한 반대, 또는 노동자에 대한 민족차별을 거부하는 요구들이 이 시기에 빈번하게 제기되었던 사실에서 보듯이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파업으로는 1930년 1월의 부산 조선방직공장 노동자 파업,334)이 파업에 대해서는 일제하에 강창호,<조선방직주식회사 2,200명의 대파업>(≪문예전선≫7-3, 1930;배성찬 편역,≪식민지시대 사회운동론 연구≫, 1987)에 의한 보고가 있다.
해방 이후의 연구들로는 다음과 같다.
김인걸, 앞의 책, 109∼111쪽.
김윤환, 앞의 책, 253∼256쪽.
윤여덕, 위의 책, 137∼139쪽.
같은 해 5월의 신흥탄광 노동자 파업,335)이 파업에 관해서는 한영해,<1930년 신흥 탄광 로동자들의 전투적 폭동에 대하여>(≪력사과학≫4, 1956;김경일 편,≪북한학계의 1920·1930년대 노농운동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9) 205∼234쪽이 가장 체계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인걸, 위의 책, 112∼116쪽.
김윤환, 위의 책, 256∼259쪽.
이어서 8월에 있었던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336)이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송지영,<1930년 평양 고무 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력사과학≫5, 1959;김경일 편, 위의 책) 235∼253쪽.
김경일,<일제하 고무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운동>(≪일제하의 사회운동≫,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9, 문학과 지성사, 1987), 107∼120쪽.
김인걸, 위의 책, 116∼122쪽.
김윤환, 위의 책, 259∼265쪽.
1933년 7월의 부산 고무공장 노동자의 연대파업,337)이 파업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강현욱, 앞의 책, 176∼179쪽.
김윤환, 위의 책, 269∼271쪽.
김경일, 위의 글, 120∼132쪽.
그리고 1934년 10월과 1935년 7월에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던 흥남제련소와 1935년 7월의 진남포 제련소 노동자 파업338)이들 파업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강현욱, 앞의 책, 181∼182·184∼190쪽.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력사사전≫Ⅱ(1971), 1064∼1065쪽.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동조합운동사≫(1979), 207∼209쪽.
姜在彦 編,≪朝鮮における日窒コンツェルン≫(동경, 不二出版, 1985), 305∼306쪽.
김경일,<1930년대 일본인 독점 기업에서 노동자 상태와 노동운동>(≪한국의 노동문제와 노동운동≫,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30, 문학과 지성사, 1991), 69∼79쪽.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에 1930년대 후반기로 넘어 가면서 노동운동은 전반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파업의 결과나 노동쟁의의 건당 참가인원의 변화를 통해서도 이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후반의 이러한 변화는 전시체제로의 이행에 따라 일제의 노동정책이 한편으로는 기존의 강압 위주로부터 상대적으로 유화적 태도를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반기의 구체적인 파업양상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학계에서 다소의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한학계에서는 이 시기 노동자 파업이 전시체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고 다소 유보적으로 평가하거나,339)김윤환, 앞의 책, 326쪽. 이 시기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생략하고 곧바로 1940년대의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넘어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학계에서는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파업투쟁 건수와 참가자 수에서 볼 때 이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가장 활발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340)기준으로 잡고 있는 연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예컨대 김윤환(위의 책, 326쪽)은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4개년 동안 430건의 쟁의가 발생하였으며 24,967명의 노동자가 이에 참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강현욱(앞의 책, 235쪽)은 1930년대 후반기에는 1939년을 제외하고도 4년 동안 939건의 파업에 72,455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제시하는 1930년대 전반기 4년 동안의 678건의 파업과 53,944명의 노동자수보다 오히려 많은 수치이다. 전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로서 해방 후인 1949년에 간행된≪조선경제통계요람≫(조선경제사)에서 인용한 것이고 후자는 구체적인 전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쪽의 진술이 실제에 접근한 것인지의 여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학계의 연구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력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는 반면에 남한학계의 연구들에서 1930년대 후반에 대한 서술이 다소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따라 예컨대 1936년의 노동자 파업은 대소규모의 운수 부문 노동자들의 연속적인 진출에서 시작되어, 각지 항만과 광산을 비롯한 대규모 기업소 노동자들의 진출이 점차 강화되었고, 1937년에는 노동자 대중의 파업투쟁과 함께 태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동일 부분이나 동일 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의 연대성이 강화되었으며, 1938년에는 해주와 평양을 사례로 주요 공장과 기업들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과 아울러 반전·반제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주장되었던 것이다.341)강현욱, 위의 책, 221∼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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