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2. 노동운동
  • 4) 노동운동의 전개
  • (2) 종전기의 노동운동

(2) 종전기의 노동운동

193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는 이른바 일제의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로 편입되면서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노동능률의 극대화를 위한 극심한 통제와 억압을 경험하였다. 이에 따라 흔히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침체기’ 또는 ‘암흑기’로 묘사되어 왔다. 전시동원과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한 전반적 억압이 가중되었던 상황에서 이 시기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부진하였다고 평가해 온 것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342)1930년대 후반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서도 북한학계와 남한학계에서 미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에 관해서는 북한학계의 연구들에서 풍부한 내용을 제공하는 반면에 남한학계의 연구들은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운동내용의 평가에서도 후자가 이 시기를 침체기 내지는 잠복기로 규정하는 반면에, 전자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전투쟁이 전반적으로 고조되어 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 이 시기에 대한 적극적 평가는 이 시기 전개된 노동운동의 상당 부분이 북한지역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참가자들의 증언이나 현지 조사자료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운동내용을 복원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미 언급했듯이 김일성이 주도한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력을 부각시키려는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남한학계의 연구들의 대부분은 일제가 발간한 공식자료들을 기초로 이 시기 노동운동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부분에서의 편향을 일정한 형태로 반영하고 있다.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하의 서술은 북한학계의 연구(강현욱, 위의 책, 228∼240·246∼263쪽)에 의존하였다.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보면(<표 5>참조),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수는 6,929명이었으며, 이듬해인 1938년에는 10,128명으로 증대되었다. 규모로 보아 이 수치는 1920년대 후반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이후에 파업 건수와 참가인원은 1940년을 경계로 급격하게 감소했다.343)일제의 공식기록과 해방 이후 남한 학계의 연구들은 대체로 보아 이 의견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북한학계에서는 1940년에 1월부터 8월까지의 기간만 하여도 623건의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으며, 49,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고 한다(강현욱, 위의 책, 233·235쪽). 이는 위의<표 5>의 96건, 4,000여 명이라는 수치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는 당시≪동아일보≫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1930년대 후반기 우리 나라 노동자 파업은 1939년부터 급속한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942년 이후의 통계는 공식자료로 남아 있지 않지만, 일제의 군수산업 기반이 집중되어 있었던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동대중의 반제·반전 투쟁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연 도 건 수 참가 인원 원 인 결 과
임금 대우 기타 성공 실패 타협
1938 90 6,929            
1939 146 10,128            
1940 96 4,045 75 5 16 33 22 41
1941 56 1,799 38 2 16 15 16 25

<표 5>1938∼1941년 동맹파업의 추이

*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況≫(1933), 143∼144쪽;조선총독부,<勞務ノ調整ニ關スル件>(≪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諮問案參考書≫, 1938);朝鮮總督府 警務局,≪第79回帝國議會說明資料≫(1941년 12월).
비고:1941년은 9월까지의 통계임

현상적으로 보면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의 대부분은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임금인상의 요구나 체불임금의 지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시체제하에서 인플레이션의 진행, 생필품 가격의 폭등과 결핍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비록 요구조건이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임금인상이나 대우개선이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외형적 표현의 기저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전복과 그를 위한 일제의 무장해제, 강제 군사복무와 군사교육에 대한 반대 및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는 요구가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업의 또다른 원인으로는 앞 시기와 비슷하게 작업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본인 감독의 폭행과 욕설 등 비인간적인 처우와 민족차별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낮은 임금으로 인한 빈곤의 만연과 생존권의 위협은 이 시기 노동자들이 극심한 억압 아래에서도 저항할 수밖에 없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파업의 지속기간을 살펴보면 길어야 1주일 내외이고 대체로 2∼3일 정도의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또한 파업에 참가한 평균 인원수를 보더라도 대체로 100명 내외로 예컨대 1930년대 전반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참가하였다.

이처럼 전시동원체제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구호를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일제 침략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그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폭동 등의 공개적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 시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태업이나 집단탈주·기계파괴 등과 함께 노동대중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다분히 반일·반전적 성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일제의 군수물자 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침략전쟁의 수행에 크나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군수생산력’을 파괴하는 것이 일본의 전투력에 영향을 미치고 일본을 패전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공장과 광산에 대한 교란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344)변은진,<日帝末 조선인 노동자층의 전쟁 및 ‘軍需生産力’에 대한 인식과 저항-서울지역 노동자를 중심으로->(≪鄕土서울≫57, 1997), 224∼225쪽.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한 파업으로는 먼저 1938년 1월 해주 시내의 시멘트공장을 비롯한 중요 공장과 기업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을 들 수 있다. 이 파업은 동일 부문 노동자들의 진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3월에는 또한 청진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으며, 5월에는 봉산 마동 시멘트공장 노동자들이 인근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공동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곧이어 같은 달 5월에는 평북 厚昌광산 노동자들이 5·1절 파업시위를 벌였으며, 부산 동래의 스미도모(住友)광산 노동자들 또한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6월에는 인천 부두 노동자 1,200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7월에는 평양제사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주의 가혹한 착취와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임금을 제때 지불할 것과 합숙시설의 개선,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식사 차별대우 철폐, 일본인 악질 감독의 축출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희롱 반대, 그리고 일요일의 휴식 보장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태업에 들어갔다. 12월에는 대구 각 직조공장에서 290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1939년과 1940년에 일제의 폭압이 미증유로 강화된 조건 아래 전국의 주요 공장지대들에서는 반제·반전적인 노동자 파업과 태업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39년 1월 평양의 군화제조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한 것을 비롯하여 3월에는 100여 명의 신의주 자동차 운전수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함흥 본궁 화학공장에서는 삐라 살포 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에는 인천 日本車輛工場 철공부 노동자들과 신의주 펄프공장 노동자들이, 8월에는 150여 명의 평양 동우고무공장 노동자와 평북 후창광산의 노동자들이, 그리고 10월에는 경성고무공업소 여성노동자 200여 명이 임금인상과 대우개선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파업에 참가하는 등 파업과 태업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40년에 들어 와서는 1월에 경남 마산의 조면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으며, 2월에는 충남 靑陽의 美良광업소에서 200여 명의 광부들이 청부제에 반대하여, 그리고 4월에는 전북 長水의 일본 고주파 明德광산과 소화전기공업 장수광업소 광부들과 日華제유 목포공장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갔다. 5월에는 평북 碧潼의 일본광업 發銀광산 광부들과 목포 조선면화회사 노동자들이, 이어서 6월에는 경남 부산에서 大森건구제조공장 노동자들과 전남 海南의 소화광업 해남광산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이어서 7월에는 충남 靑陽의 中外광업 九峯광업소 광부들과 충북 永同의 黃鶴金山 광부들이, 그리고 8월에는 부산의 피복회사 직공들이 파업에 참가하였다. 10월에는 인천 부두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공업용 석탄 하륙작업을 중지하는 집단적 파업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서울 지역 각 군수공장들의 전시 군수품 생산에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 1941년 2월에는 평북의 후창광산 광부들과 아울러 3월에 경남 부산의 조선釣針공장 노동자들이 잔업수당의 증액을 요구하고 파업에 들어갔으며, 이어서 같은 달에 황해도 新溪의 조선석유광업회사의 광부들이 임금지불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단행하였다.345)朝鮮總督府 警務局,≪第79回帝國議會說明資料≫(1941).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은 일제의 전시정책을 파탄시키기 위한 각종 형태의 반일·반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컨대 1940년부터 1943년 사이 문평제련소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전시 생산을 파탄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은밀한 방법으로 태업을 진행함으로써 제련소의 전시 생산을 지속적인 방식으로 저하시켰다.346)이에 따라 문평제련소의 기본 생산지표였던 粗銅은 1940년의 1,925톤으로부터 1941년에는 1,302톤으로, 1942년에는 1,101톤, 그리고 1943년에는 1,017톤으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특히 1941년 5월 중순부터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대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제기하여 개별적으로 또는 소규모로 태업을 진행하였다. 같은 해 봄에는 종연방직 신의주 직포공장 노동자들이 일제의 차별대우에 격분하여 집단적인 태업을 단행하였다. 1942년 5월에는 동방광산 東山갱 광부들이 일제의 전시 징용정책과 임금체불 및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가혹한 노동조건과 저렴한 기아임금에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 오던 4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악질 감독이 노동자들을 구타한 것을 계기로 취업을 거부하는 한편 광산 사무실과 선광장을 비롯한 시설물들을 파괴하여 버렸다. 노동자들의 폭동적 진출은 이후 광산이 한 달간 휴업상태에 있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공사 방해나 방화·폭발·시설과 기계의 파괴 등은 반일·반전 투쟁의 성격을 띠고서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1943년 여름 회령광산에서는 탄광 인입선 폭파사건이 일어났으며 연이어 탄광 역구내에서 마초 160톤이 완전히 소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남포제련소 노동자들도 생산량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계파괴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원광산 노동자들은 광산의 기계와 설비를 파괴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 또한 같은 해 여름 부산의 조선중공업 주식회사에서 공장 6동과 주택 9채가 소각되었고, 9월에는 조선항공회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비행기 1대, 글라이더 2대, 오토바이 1대가 소각되었는가 하면 평남 선천에서는 帝國섬유 아마공장이 소각되어 버렸다. 이어서 12월에는 군수용 석탄을 생산하던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군수공장인 일진축산 청주공장이 소각되어 버린 사건도 있었다. 특히 본궁 화학공장에서는 1942∼1944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가스탱크가 폭발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44년 온성탄광 노동자들이 방화한 저탄장은 거의 1년 동안 계속 불타 올라 이로 인하여 4만여 톤의 석탄이 재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투쟁은 일제의 전시생산과 전시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와 아울러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졌다는 정세판단 아래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일제의 비밀경찰 문건에 의하면 평양철공 노동자들은 1941년 1월에 비밀리에 자체 철공소를 설치하고 무기를 제작하여 결정적 시기의 반일 무장폭동을 계획하였으며 함북 계림탄광의 노동자들도 비밀 근거지를 두고 무장투쟁을 통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경남 진주에서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가까운 시일에 민족해방 전쟁이 도래할 것이라고 보고 항일유격대에 호응, 궐기하기 위하여 만주로 갈 것을 계획하고 투쟁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극히 한정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반일 무장폭동의 준비는 부산이나 공주 등 각지에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항일무장투쟁에 노동대중이 직접 참가하려는 움직임은 194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 시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양상이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전국 각지의 혁명적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농민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 속에서 진행되었고, 따라서 대세의 움직임으로 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그것은 다분히 북부 조선을 중심으로 한 특정 지역이나 노동자층의 일정 범주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평양 등지의 전기 부문 노동자들의 반일결사와 일제의 강제징병에 반대하는 투쟁, 함남 북청 양복직공들의 무장봉기에 대한 참여 결의, 평양 병기창 노동자들의 반일투쟁 삐라 살포 등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전국 각 지역에서 무장폭동에 호응하거나 그것에 대비하려는 준비들이 진행되었다는 사실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청진지구에서 전개된 혁명적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지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를 제공한다.347)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강현욱, 앞의 책, 259∼263쪽.

전시동원체제의 억압이 더욱 가중되어 가는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1943년 이후에 들어오면서 더욱 완강하고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예컨대 1943년 여름에 나진의 부두노동자들은 일제의 민족적 탄압과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파업을 단행하는 등 반일·반전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청진의 부두 노동자들도 여러 형태의 태업을 조직하여 일제의 전시 수송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또한 일제의 주요 군수공장의 하나였던 성진 고주파공장 운반노동자들은 1943년 6월과 1944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단행하였으며 청주 화학공장에서도 파업과 태업들이 빈번하게 전개되었다. 그런가하면 함흥 편창제사의 여성노동자들은 1942년 7월과 1943년 9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단식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전시 생산에 타격을 주었다.

흥남 비료공장을 비롯한 흥남의 공장들에서도 파업과 태업투쟁이 계속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군수산업지대였던 흥남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정사복 경찰과 헌병, 스파이들이 거미줄처럼 깔려서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였고, ‘요시찰인’으로 등록된 혁명적 노동자들의 뒤에는 늘 경찰과 밀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이전과 같이 대규모의 공개적인 파업을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작은 규모의 투쟁형식들이 선호되었으며 선동이나 태업과 같은 다른 방법들을 통하여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비료공장의 인산 부문의 보크사이트 직장 노동자들은 3개월이면 할 수 있는 제품의 생산을 고의적으로 1년 이상 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변색된 오제품을 생산하였다. 또한 군수품 생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황린 제조 부문에서는 노동자들의 태업 및 작업 방해 활동으로 인하여 1943년에 시험생산까지 한 제품이 해방될 때까지 전혀 생산되지 못하였다.

본궁의 화학공장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민족적 멸시에 반대하는 투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개하였다. 카바이트 직장 노동자들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일본인의 모욕에 격분하여 집단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을 비롯하여 징용반대투쟁, 악질 일본인과 그에 야합하였던 조선인들에 대한 불의의 습격 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본궁 요업공장에서도 있었다. 1943년 이래 이들은 요업공정에서 중심을 이루는 승강기를 파괴하여 버렸으며 제품원료의 배합률을 고의로 어겨 제품의 질을 약화시켰다. 또한 목조공장 노동자들은 목형을 오작 시공함으로써 제품생산에 타격을 주었으며, 1944년 9월에는 일본인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것을 계기로 공장 시설들을 파괴하여 버렸다. 1944년 봄에는 운곡광산에서 노동자들 파업을 조직하여 일제의 전시생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같은 해 6월에는 朝日경금속 주식회사 기양공장 노동자 수천 명이 일제의 민족적 멸시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주요 건설공사장이나 항만, 군수공장 등에서는 강제로 동원되어 온 노동자들이 탈주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전시체제의 극심한 억압 아래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에 의한 저항의 또 다른 형식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의 이러한 집단적 탈주투쟁은 더욱 격화되어 보편적인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예컨대 일제의 중요 군수산업지대인 함남에서 각 군수 시설 공사장·철도 공사장 등에 강제로 끌려온 ‘알선 인부’들 중 60%가 도주하여 버렸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보고자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전력증강을 위한 중점적 노무활용 대책에 따라 중요 공장·광산·사업장 등에 대한 관알선·징용·근로보국대 기타에 의한 노무의 수요는 더욱이 긴급을 요하게 된 실정인데, 鮮內外를 통한 노무 수요의 漸高에 따르는 이의 송출은 더욱더 곤란하게 되고 있다. 즉 최근의 노무송출 강화에 따라 주요 노무공급원인 농촌에서는 식량공출의 강화와 아울러 기타 시국의 중압 때문에 실생활이 궁핍화하고 있으므로 노무 송출에 대한 기피적 경향이 농후하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反官的 기운도 높아졌다. 노무 송출에 대한 집단 기피, 수송 도중의 도망, 노무 관계 관공리에 대한 폭행·협박 사범 기타 비협력적 내지 반관적 특수사건이 상당히 다발하고 있어 치안상으로도 엄중한 경계를 요하고 있다(近藤釰一 編,≪太平洋戰下の朝鮮≫, 1961, 55∼56쪽).

이와 같이 강제 노무동원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빈번한 탈주나 결근으로 표출되었다. 일제의 공식자료를 보더라도 1940년대 초 광산노동자의 노동이동률은 월평균 약 11%였다. 광산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월평균 노동이동률이 무려 5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사정국 노무과의 조사에 따르면 1942년 조선의 공장 및 광산에서 노동자 이동율은 공장에서는 평균 7.5%, 광산의 경우가 10.2%였으며, 출근율은 공장의 경우가 매일 평균 80%, 광산에서는 75%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348)김윤환, 앞의 책, 328∼329쪽.

이와 같이 노동자들의 높은 이동율과 낮은 출근율은 대륙침략을 수행하기 위한 일제의 군수생산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제86회 일본제국의회에 제출한 예산설명자료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 광부의 1인당 채탄량은 1942년도에 연평균 101톤에서 이듬해인 1943년에는 95톤으로 저하되었다. 공장 노동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1936년 불변 가격을 100으로 할 때 노동자들의 1인당 생산액은 1938년에 96, 1941년에는 81, 1943년에는 74로 급격히 저하하고 있었다.349)김윤환, 위의 책, 327∼328쪽.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는 공장과 광산노동자의 높은 노동이동률과 낮은 근속기간, 출근율 등을 군수생산력 증강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하고, 법령 등의 제정을 통한 규제와 아울러 강제노동을 강압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일제가 패전하는 1945년까지 높은 노동이동율을 낮추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노동이동형태로 표출된 노동자의 ‘저항’은 비록 적극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생산현장에서 노동통제효과를 상쇄시키는 주요한 요소였다. 탈주나 결근 등의 노동이동률이 높았던 것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동통제에 대한 노동자의 개인적·집단적 저항이 그만큼 격렬했던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무단도주·결근 등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결국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인간 사냥’식의 노동력 강제 동원정책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으며, ‘감옥’으로 일컬어졌던 생산현장의 작업환경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실질임금의 감소와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재해의 격증, ‘병영화’된 노동통제, 그리고 만성화된 빈곤과 식량의 부족에 따라 노동자들은 생산현장으로의 영구적 이탈(개인적·집단적 탈주)이나 일시적 도피(결근)를 시도했던 것이다.

일제하의 노동운동은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급속한 발전과정을 밟아 왔다.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를 보더라도, 지역내의 각종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을 망라한 지역별 노동조합에서 동일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으로, 그리고 동일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을 조직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짧은 시기 내에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서구 노동운동사에서 이러한 변화가 백 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일제하의 노동운동은 비교적 단기간에 압축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서구 노동사와의 비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제하 노동운동의 중심은 서구의 사례에서처럼 장인이나 직인층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운수·운반, 토목·건축 등의 부문에서 일용노동형태로 고용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에 비로소 공장노동자가 의미있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미 보았듯이 숙련공 중심의 공장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던 서구에서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과는 달리, 식민지에서 개량주의와 어용 노동조합이 주로 운송이나 운반에 종사하는 일용노동 중심의 비공장 노동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3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20년대 중·후반 이래 비교적 일관되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쳐왔다. 물론 사회민주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전혀 기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노동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의 영향력은 미치지 못하였다. 1930년대 이후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것의 전통은 1945년 이후의 이른바 해방정국의 노동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운동에서 단일한 이념의 지배는 한편으로는 강력한 응집력을 제공하고 운동의 지속성을 보장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유연성을 확보한다거나 비판·견제를 통한 발전의 가능성을 차단하였으며, 비록 점차 극복되는 양상을 보였다고는 하더라도 노동운동의 내부에서 심각한 파벌투쟁의 양상을 노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이 시기의 노동운동에서 지식인들이 차지하는 역할이 컸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이 발전하는 초기에는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일제하의 노동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지식인들이 일정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전반기로 이행하면서 이른바 합법영역에서의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노동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주체적 역량이 점차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30년대 이후 혁명적 조류가 노동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는 시점에서는 대중적 파업들이 전반적으로 억압됨에 따라 지하활동을 통한 지식인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어 가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한 탄압을 배경으로 지식인들이 점차 탈락함에 따라 노동운동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간접적이고 부차적인 성격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또한 이 시기 노동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반대하고 민족 독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성격을 지향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민족별 차별임금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보듯이 식민지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민족차별에 대한 반대를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이후에 노동자들의 저항은 반일·반전 운동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1940년대 이후 전쟁에 반대하는 구호를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그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폭동 등의 공개적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요구는 비록 그것이 단순한 임금인상이나 대우개선 등이라고 하더라도, 일제 식민통치의 전복과 그를 위한 일제의 무장해제, 강제 군사복무와 군사교육에 대한 반대 및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는 요구가 깔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 노동운동은 국제주의적 연계와 영향 아래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류가 단일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던 사실을 배경으로, 일본과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은 노동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이른바 비합법운동기에는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 태평양노동조합, 또는 중국이나 일본의 당조직들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하 노동운동에서 나타났던 이러한 국제주의적 지향은 한편으로는 일제하의 노동운동을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동계급의 국제연대와 공동의 관심을 추구하는데 기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문제와 관련한 식민지 차원에서의 문제제기와 해결방식을 고안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노동운동의 토착화라는 과제를 소홀히 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일제하의 노동운동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착취와 종속에 반대하는 경제적 성격과 아울러 민족차별에 반대하고 반일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 지식인이나 민족운동가들의 원조와 영향 아래에서 성립하였던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점차 노동자들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주체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45년의 해방 이후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면서 이 시기 노동운동은 해방 이후의 노동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과 생활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제적 임무와 아울러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지향은 해방 이후에는 노동 영역에서 민주적인 권리들과 아울러 사회 일반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金炅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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