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3) 1930년대 전반기 여성운동
  • (1) 여성노동운동

(1) 여성노동운동

일제시기 여성공장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방직·제사·고무·정미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대 여성노동자의 투쟁양상을 보면, 처음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항하여 도망·탈주라는 소극적 저항을 비롯하여 직접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장 많았던 것이 임금인상, 임금인하 반대 등의 생존권적 차원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 즉 일본인 남성감독에 의한 폭행·구타·희롱·강간 등에 반대하는 투쟁도 많았다. 이러한 대중적 투쟁 속에 여성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여성단체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면서 노동운동단체 내에서도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주도한 노동쟁의에서도 임금문제가 가장 기본적이었지만 봉건허례타파, 인신매매금지, 공창금지, 미성년남녀의 결혼금지, 여성 청소년에 대한 차별철폐와 같은 여성 일반의 요구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불’, ‘유년 및 부인의 야간작업·갱내 위험작업 금지’ 등 여성노동자의 특수 요구를 당면 요구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여성노동문제에 대한 즉자적 인식에서 벗어나 차츰 근본적인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단체 내에서 여성노동문제를 제기하고 여성노동자의 조직화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구조, 즉 여성부의 출현까지 나아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30년대에도 여성공장노동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에도 여성노동자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방적·고무·식료품공업이었다. 1931년 말 방적공업에서 전체 노동자(10인 이상 공장) 중 여성노동자의 비율은 20.7%(동일업종 전체에서 78.8%), 전체 여성노동자의 59.0%, 방적여공 중 15세 이하 유년여공은 24.2%였다. 고무공업으로 대표되는 화학공업에서는 4.5%(29.6%)·12.9%·1.4%, 식료품 공업에서는 7.8%(30.0%)·22.1%·5.1%였다. 이 자료에 의하면 전체 공장노동자 중 여성노동자는 35.6%였다.351)高橋龜吉,≪現代朝鮮經濟論≫(千倉書房, 1935), 420쪽 자료로 작성.

1930년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여성노동자의 대중투쟁과 여성노동자의 조직화 등을 통해서 여성노동운동은 일단의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은 물론 1920년대의 여학생과 여성운동가들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갔으며 노동운동에서도 여성노동자 조직이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하다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미조직 여성공장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모든 노동조직에 반드시 여성운동을 위한 특별한 부문과 조직자의 설치, 그 구체적 조직형태로서 노동조합 내에 여성부의 설치가 제안되었다. 여성부의 설치는 산업별 노동조합으로의 개편과 함께 추진되었다.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편이 가능한 노동조합은 기존 노동조합을 개편하여 여성부·청년부를 설치했다. 산업별로 개편이 불가능한 지역합동노동조합은 조합 내에 청년부·여성부를 두어 미조직 노동자를 흡수하고 계급역량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많은 경우 당재건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혁명적 노동조합조직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이익을 대변할 뿐 아니라 조선혁명에 부과된 정치적 임무까지 수행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전북의 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 작성한 정치테제에서 잘 볼 수 있다. 즉 ‘성적 차별의 철폐, 결혼법 및 종족법 개정에 의한 법률상·경제상 남녀의 절대평등, 일체의 봉건적 결혼반대 및 결혼자유, 봉건적 가족제도 및 억압으로부터의 부녀해방, 남녀의 교육기회 균등, 부녀특수교육 철폐, 남녀교육의 동일대우’ 등의 일반 민주주의 요구와 함께 여성노동자의 특수 요구, 즉 ‘부인의 야간 및 특별위험부문 노동금지·산전산후 각 8주간 휴양 및 휴양기간의 임금전액지불제도 확립, 부인노동에 대한 특별입법보호 및 시설획득과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모성 승인, 산모 및 유아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휴양시설·공공탁아소 및 조산원의 완전설치’ 등 ‘모성보호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관한 규정’을 명문화했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특수적 요구에 관한 항목에서도 “부인·청년·성인을 불문하고 동일한 노동에 대한 동일한 임금의 지불”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20년대 여성운동의 성과와 이후 운동방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직과정은 대체로 공장반-공장분회-(산업별) 지역적 노동조합-전선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의 건설과정을 밟는 것이었다. 그리고 농민조합과 반제조직 등 다른 부분 운동조직과 결합하여 민족해방운동의 핵으로서의 당을 재건해 갔다. 이것은 일정한 한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가 하향적 조직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노동자·농민을 구체적으로 조직해 나가면서 조직을 강고하게 한다는 인식은 공유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조직사업은 여성부를 설치하여 여성노동자를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묶어 세우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전북의 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비롯하여 朝鮮左翼勞動組合 全國評議會組織準備會 등 대부분의 조직에서 부인부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1931년 3월 24일 결성)는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각 공장에는 청년 및 부인직공이 점차 증가함으로써 그들 노동자를 계급적으로 훈련할 필요상 좌익노조 밑에 청년부 및 부인부를 설치할 것”352)김준엽·김창순 편,≪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Ⅱ(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80), 555쪽.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청년부 및 부인부를 설치하여 청년부는 조직부, 부인부는 쟁의부에 각각 소속시켜 활동하게 했고 부인부장에 정종명, 부인부원에 김상만을 임명했다. 그 외에 赤色勞動組合準備會·新義州工場勞動組合·大邱勞動者協議會準備會 등에서도 여성부를 두고 있었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조직사업은 여성노동자들이 몰려 있는 섬유공업과 고무공업 등의 경공업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직사업은 일반적으로 기관지를 비롯한 출판물을 통해서 조직원을 획득했다. 기관지는 조직을 사상적으로 통일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기관지 발행은 1930년대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활동가들은 기관지 외에 소책자·번역물·팜플렛·격문을 통해 선전선동활동을 수행하거나 일부 산업별 공장단위에서 공장신문을 발간하거나 발간을 계획했다. 독서회를 통해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조직원을 확보했고, 강좌를 개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학습과 토론, 정세파악 등을 통해 사상적·이론적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에는 주로 비합법적 서적과 출판물(기관지·팜플렛)이 중요한 교육수단이었지만 합법적인 신문과 잡지·소설 등도 이용되었다. 학습·교육하는 방식은 책임지도자 1명과 노동자 2∼3명 정도가 1주일에 1∼3회 정도 모여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장기간의 합숙방식도 자주 이용되었다.

활동가들이 훈련방법 중 가장 중시한 것은 파업과 기타 실천과정 등 대중적 투쟁을 통한 의식의 고양과 단련이었다. 그들은 기념일 등을 기해 대중적인 선전선동을 위한 격문을 제작하여 직접 공장·학교·공원·극장 등 대중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배포해 훈련의 기회로 삼았고 파업투쟁을 통해 선진노동자를 단련시켜 나갔다.

위와 같은 방식의 활동은 權榮台 등이 중심이 된 조직활동353)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사상휘보≫제4호(1935년 9월;고려서림 영인본, 1988), 54∼96쪽. 당시 깊게 관여한 이재유는 1936년 12월에 체포되었다(≪사상휘보≫, 제16호, 1938년 9월, 263∼274쪽). 이외 김경일,≪이재유 연구≫(창작과비평사, 1993).에 잘 드러난다. 이 사건은 권영태·李載裕(이 당시는 미체포)·이현상 등이 관여되었다. 여성들은 李順今·許均·李景仙·李元鳳 등 여학생운동과 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권영태는 1932년 12월 경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할 때 노동자와 결합하고 있던 바로 이러한 활동가들과 연결되었다.

당시 이순금354)이순금은 경성학생RS협의회와 반제동맹에 관련되었고 李觀述의 누이동생이다.은 1933년 조선직물회사 인견공장에 취업하였고, 이원봉355)學生前衛同盟사건에 관련되어 1930년 5월 검거당했다가 출옥하였다.은 1934년 1월 경 경성 오리엔탈 고무공장에 취업하면서, 경성고무공장 여공 金福女·全順德과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허균(허마니아)356)허균은 근우회 京東지부원이며 中央靑年同盟 북구지부 집행위원이었다.은 1933년 7월 서울 고무회사공장·대륙고무공장 여공으로 공장내 그룹을 만들었다. 이외 이재유는 조선견직회사공장의 李晶淑·李貞賢 등과 연결하여 卞洪大 등과 함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에서는 고무산업부문에 조직원을 배치하여 고무산업≪공장신문≫을 발간하고 기관지≪프롤레타리아≫를 창간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발간한 기관지·팜플렛 등을 조직원들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메이데이(May Day) 격문 약 1,000부를 인쇄하여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공장지대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서울고무·종연방적 제사공장 파업 등에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 시기 혁명적 노동조합이 관련된 파업투쟁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확인되는 것 몇 개만 들면, 부산 조선방직의 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한 ‘衆樂會’, 대전 군시제사공업파업(1932년 11월)에 관여한 ‘忠南前衛隊’, 1931년 3월의 丸大고무공장 파업에는 慶南赤色勞動者敎育協議會, 1933년 4월 栗田고무공장 파업은 산업별 노동조합 釜山建設協議會 등이 각기 관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계열의 활동가들에 의해 여성노동자를 의식화, 조직화하고 대중투쟁을 지도·선전·선동하였다. 이러한 여성조직의 활동가들은 근우회 등 기존 여성단체의 활동가도 소수 있었지만 학생운동을 통해서 단련된 여학생 출신이나 여성노동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성지식인층 활동가들은 1920년대 운동가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학내에서 독서회활동을 통해 의식화되고 동맹휴업 등의 투쟁경험을 통해 단련된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대중 속으로 투신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화, 지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활동을 한 결과 혁명적 노동조합의 최하부 조직인 반과 여성노동자그룹이 결성되었다. 노동자 출신의 활동가들은 투쟁이나 여러 활동 속에서 커 온 193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의 핵이었다.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노동자운동을 더욱 강인하게 이끌었고 또 다른 활동가들을 키워낼 수 있었다. 이것은 당재건운동이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자주 탄압으로 와해되었지만 같은 공장, 같은 지역의 계속적인 파업투쟁 등의 노동자운동이 지속된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의 영향력이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과거운동의 오류와 한계, 즉 파벌성의 문제와 대중과의 결합문제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대중 속에서 파벌문제를 극복하고 상향식 조직 건설과정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중과의 결합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면서 많은 부분이 전적으로 극복되었고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의 선진부대가 공고하게 자리잡아 나갔다.

그러나 1930년대 활동가들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만을 기본방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노동자만의 조직되어 운동기반이 축소되거나 혹은 여전히 상층 조직체를 구성하고 하부단위조직으로 나아가서 노동자나 농민대중과의 결합이 약한 경우도 있었다. 1920년대와 달리 합법적 공간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혁명적 노동조합은 전국적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각각 고립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 아래 쉽게 파괴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여성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 방직·제사·고무공장에서 일어난 파업은 1,058건, 참가인원 77,578명으로 파업 건수나, 참가인원에서 1920년대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비록 1930년대 전반기 중화학공업이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함에 따라 노동운동의 중심은 점차 중공업 남성노동자로 옮겨지고 있었지만 여성노동자의 파업투쟁은 여전히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1930년 부산 조선방직·평양고무공장 총파업을 통해 폭발적인 힘을 분출시키면서 그들의 특수 요구를 명확히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노동자의 요구가 잘 드러난 것이 1930년 8월에 일어난 평양지역 고무공장 총파업이었다.

1930년 8월에는 평양의 10개 고무공장의 1,8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경제불황을 구실로 평양의 고무공장 자본가들이 담합하여 임금 1할 인하를 결의하자 “임금인하 반대, 해고 반대” 등 19개 조건을 내걸고 평양고무직공조합은 파업을 결정했다. 이것은 평양지역 전 고무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파업의 확대는 고무공업에 국한되지 않았고 다른 업종에서도 지원을 받아 평양의 山十製絲공장·연초공장·전매국 등에서 지원투쟁 등 연대투쟁을 벌였다. 서울·부산 등지에서도 동정금·격문이 답지하였다.

사태가 커지자 신간회 평양지회에서는 崔允鈺, 平壤勞動連盟에서는 金裕昌을 전권위원으로 선정해서 조정에 나섰고 평양고무직공대회에서는 전권위원 12인을 선출해서 쟁의해결을 위임했다. 한편 파업노동자들의 투쟁기세가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일제 경찰은 스스로 조정에 나서 공장주측의 타협안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승인을 강요했다. 결국 파업지도부는 일제 경찰의 조정안을 통과시켰고 8월 20일 개최된 대회에서 기만적 ‘협정’에 대한 파업노동자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노동자들은 조정안의 파기를 요구하고 12명의 전권위원을 불신임하고 노동자 출신의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선출했다.

개량주의적·기회주의적 조합지도부를 구축하고 경찰조정안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임석 경관이 이러한 움직임의 지도자 姜德三을 검거하고 대회를 탄압하자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투쟁은 일제 경찰과의 직접적인 충돌로 넘어갔고 이것은 정치적인 투쟁으로 발전했다. 더욱이 8월 23일 이후 일부 공장주들이 노동자의 요구조건을 전부 승인하고 조업을 개시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일제 경찰은 “노동자가 승리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공장주에게 승리를 보장해줄 것을 약속하고 강압적 수단으로 노동자의 파업을 탄압했다. 일제의 탄압강화, 기계공 정급직공의 복업, 고무공장의 조업개시를 계기로 투쟁지도부는 8월 23일 이후 공장습격, 폭동투쟁으로 전환하였다.

8월 29일까지 공장습격 횟수는 16회, 습격참가자는 5,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8월 26일까지 검속 당한 인원은 63명이었다. 공장습격과 폭동투쟁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8월 23일 300여 명의 노동자가 정창 고무공장을 습격하여 무장경찰대와 충돌을 일으켜 여성노동자 7명이 검거되었다. 8월 25일에는 남녀별로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여성노동자 50여 명은 밤 11시에 세창공장을 습격하였고 같은 시간에 남녀노동자 30여 명은 동양고무공장을 습격했다. 8월 26일에는 여성노동자 300여 명이 대대를 편성하여 평양·동양·평안 등의 공장을 습격하여 여성노동자 27명이 구속되었고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에 구타당했다.

노동자들이 점차 복직하고 신직공 모집이 늘어나 파업단의 조직적 행동이 어렵게 되자 평양고무직공조합은 9월 4일 파업단의 해체식을 거행하고자 했으나 금지당하고 자유취업선언과 함께 200여 명의 해고자를 내고 23일 만에 파업은 종결되었다.

평양고무공장총파업은 자본가들의 단결과 노동자의 자체분열로 실패했지만 직업별 노동조합의 한계에 대한 인식,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배격, 새로운 조직형태의 모색이라는 당시 노동운동의 일반적 과제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평양고무공장 총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중 3분의 2 정도가 여성노동자였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노동자, 특히 기혼 여성노동자의 투쟁력은 매우 높았다. 고무공업은 본래 여성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를 조직하는 문제는 운동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고, 따라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여자유급상무 채용건을 발의하고 있었다. 게다가 1931년 5월 평양노동연맹에서는 부인·청년부 확립의 건을 제기하고 부인부장으로 강덕삼 등을 배치하고 있는 것에서도 여성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문제를 노동운동의 관건을 이루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다시 평양의 平元고무에서 5월 17일 “임금인하 반대, 검사원 축출” 등을 조건으로 여성노동자 47명이 파업을 단행했다.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 가입하지 않은 평원공장에서 임금인하를 시도하자 다른 자본가들은 이에 동조하며 은밀히 지원하는 한편, 이에 맞선 노동자들은 직종조합을 통한 대응책을 강구함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전선이 뚜렷이 형성되었다. 고무직종조합에서 5월 22·23일 소집한 직공대회에는 여성노동자 100여 명이 모였고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김취선이 의장으로 등단했다.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을 점령하고 단식동맹을 조직하는가 하면 그 중 1명인 姜周龍은 을밀대 옥상에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고용주측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했다가 9시간만에 끌려 내려와 검속되기도 했다.

여성노동자의 완강한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인근공장에서 동정파업이 일어나고 조선노동평양연맹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노동단체가 적극 원조를 결의하자 공장측은 여성노동자 49명 전부를 해고하고 노동자 18명을 새로 모집하였다. 이에 파업노동자들은 작업개시를 막기 위해 새로 모집한 노동자들이 전차를 타고 가려고 하자 일제히 전찻길 위에 엎드려 전차를 정지시켰고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려고 하자 신작로 위에 드러누웠고 심지어 오물을 끼얹는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파업노동자들은 또한 모집노동자들에게 파업단의 비참한 상황을 호소하고 그들을 파업단 본부까지 동행해서 “우리는 2,300동무 대중을 위해 단식까지 하며 싸우는데 너희는 어째서 굴욕적 조건으로 일하는가”라고 하여 같은 노동자로서 연대를 호소했다. 검속된 강주룡은 80여 시간 단식투쟁을 하다가 6월 1일 석방되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교리 파업단본부로 동료들에게 업혀가 단식을 계속하면서 해고 여성노동자들을 지휘했다.

고무직공조합 집행위원회는 이 평원공장 파업을 평양지역의 고무공장 노동자 모두에 관련된 중대문제라고 인식하고 6월 7일 백선행기념관에서 고무공업노동자 2,300여 명을 소집하여 ‘공동단식투쟁준비단체대회’를 개최하고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측의 완강한 투쟁이 진행되는 한편, 자본가측과 협상도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신직공에게 종전 임금을 지불하라고 하여 임금인하를 취소시킨 후 2단계로 희생자를 1명도 내지 않도록 회사측에 요구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임금인하 철회와 파업노동자와 모집노동자의 비례채용을 제안했지만 파업노동자들은 이 타협안을 거부했고 경찰은 파업단의 대표들을 구속했다. 파업단 대표가 구속되고 여성노동자들이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는 한편, 당시 평양지역에 살포된 격문으로 인하여 검거선풍이 일어나자 파업단의 기세는 급격히 약화되고 파업은 마침내 종결되고 말았다.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파업을 배후조종한 鄭達憲357)정달헌은 1930년 9월에 조선에 들어와 李舟河와 1931년 4월 하순에 평양노동연맹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근우회 평양지부 서기였던 조영옥과 함께 평원고무공장과 정창고무공장에서 반조직에 착수하고 각 고무공장 여성노동자의 파업을 선도했다. 대표적인 여성노동자 투쟁가인 강주룡도 이러한 외부 조직선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당시 꽤 많은 노동자 대중투쟁이 직간접으로 당재건운동 및 노동조합조직운동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신경쇠약으로 보석 출옥 중 1932년 6월 13일 사망했다.

파업은 2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끝났으나 그 후 노동자 본위의 생산조합 설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31년 12월 평양고무공장에서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본위의 주를 모아 자본금 2만원을 조달하여 생산조합 평화고무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생산기관의 사회화, 노동생활의 합리화, 이윤분배의 균등화를 목표로 전국 각지의 소비조합·협동조합을 주주로 모집하는 등 판로 확보에 노력했다. 그러나 공장이 세워진 지 일년쯤 되는 1932년 12월에 이르러 자금난과 함께 조합원과 조합장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 공장은 다른 고무공장에 매도되었다.358)한국여성연구회 여성사분과(유해정),≪한국여성사≫근대편(풀빛, 1992), 250∼255쪽.

평양고무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의 투쟁력은 다른 어느 곳보다 양적·질적인 면에서도 고양되어 있었다. 이들은 파업운동자대회에서 능동적으로 발언을 했고 공장습격에서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평양고무공장파업은 이와 같은 여성노동자의 투쟁력의 고양을 기반으로 해서 임금인하 반대라고 하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일어났다. 특히 이들의 요구 중 주목되는 것은 ‘산전산후 3주간 휴양 및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등 모성보호에 대한 요구를 했다는 점이다. 모성보호는 기혼 여성노동자의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구였고, 고무공업은 기혼여성이 많다는 점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와 함께 파업의 주요한 요구사항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1931년 5월 28일 17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파업한 경성방직주식회사 남녀노동자 350명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수유 자유와 남녀소년노동자에게 동일한 노동에 동일한 임금지불’을 요구했다. 1931년 6월 5일 임금인하에 반대하고 파업한 인천 역무정미소에서는 ‘여직공 임금차별 반대, 여직공 수유시간 제정’ 등을, 6월 10일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파업한 인천 직야정미소에서는 ‘여성직공 임금을 남자와 같이 줄 것’을 요구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도 모성보호만큼이나 여성노동자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이처럼 투쟁력의 고양을 기반으로 해서 여성노동자의 특수 요구, 즉 모성보호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요구는 파업투쟁에서 명확히 제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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