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3) 1930년대 전반기 여성운동
  • (3) 잠녀(해녀)투쟁

(3) 잠녀(해녀)투쟁

1930년대 여성운동 중에 주목해 볼 것 하나가 1932년 1월 제주도 잠녀투쟁이다. 이것은 일제시기에 일어났던 최대의 여성투쟁이었다. 생산자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수천 명의 잠녀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1920년대 제주도의 사회운동은 대부분 북부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남부해안은 모슬포를 제외하고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공동체적 기반이 강하다는 특수요인으로 1920년대는 무정부주의운동이 꽤 활발하였으나 점차 약화되었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제주도도 일부지역이 아니라 제주도 전역에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잠녀들의 투쟁은 공동판매 때 해산물 가격사정, 등급검사, 기타 해녀조합의 부정으로 인한 문제로 이미 1920년대부터 계속되었다. 1920년 잠녀보호 등을 이유로 만들어진 잠녀조합이 관제조합으로 되고 잠녀의 이익 대신 해산물을 싸게 사려는 일본인 무역상이나 해조회사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판부정이나 자금횡령 등이 횡행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1930년 9월투쟁, 1930년 11월 제주도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 살포 등의 움직임을 비롯하여 점점 더 구체적이고 대규모 투쟁으로 나아갔다. 1932년 1월의 잠녀투쟁은 그 중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투쟁이었다.

1930년 9월의 잠녀투쟁은 정의면 성산포산 석화채를 조합서기가 경쟁입찰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잠녀에게서 매수하려던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천여 명의 잠녀들은 해산물 수매가인상 및 수매시 부정행위에 대해 반대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당시 제주도의 사회운동가들을 자극하였다. 그들은 1930년 11월에는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을 뿌리는 등 잠녀운동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해녀조합은 해산물 수매가격을 인하하고 등급을 부당하게 산정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1931년 구좌면 하도리에서는 생복과 감탯재 판매에서 생복은 지정매수인이 매수를 거절하고 조합에서 처치를 해주지 않아 다 썩고, 감탯재는 지정등급변경, 지정가격 인하로 판매가 중지되어 손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잠녀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였고 1931년 말부터 하도리의 잠녀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구좌면은 정의면과 더불어 제주도 잠녀가 집중(1932년 3,381명으로 전 도의 약 42%)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전부터 해녀어업조합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잠녀들은 이 때문에 격노하여 일차로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조합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잠녀들은 해녀조합의 정체를 폭로하고 요구조건을 관철하자는 입장에서 구좌면 세화장날을 기해 드디어 대중적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월 7일 정오부터 300여 명의 잠녀가 그들의 생산도구인 호미와 비창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보자기를 메고 하도리에서부터 세화시장까지 시위행렬을 하였다.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부근 리에서 모여든 잠녀들은 이 행렬에 합세하여 장을 보러 온 수천 군중들에게 해녀조합의 문제를 폭로하고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을 다짐하였다. 부근의 마을민들도 이들에 합세하여 해녀조합본부를 습격하려고 행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세화주재소는 중재를 자청하였고 잠녀들은 주재소에 쇄도하여 현장에서 대표를 뽑고 그들과 협상에 임하여 잠녀들의 요구에 대한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시위대는 다시 행렬을 지어 평대리 해녀조합 지부사무소에 가 면장 겸 조합지부장의 책임으로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12일에 1932년도의 해산물 중 포패류에 대한 지정판매를 한다는 광고문을 널리 붙였다. 이에 자극받은 잠녀들은 이번을 기해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로 반대하자는 의견이 드높아져 각 리 연합투쟁을 벌이기로 비밀리에 계획하였다. 각 리에서 잠녀회의가 열려 잠녀가 가장 많았던 구좌면·정의면을 중심으로 제주도 동부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지정판매일인 12일은 세화장날이었고 마침 제주도사 겸 제주해녀조합장이 구좌면을 통과할 예정임을 알아내고 잠녀들은 구좌면의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의 6개 리에서 해녀조합에 대한 일대시위를 하고 도사와 직접 담판을 계획하였다.

1월 12일이 되어 종달리·오조리 잠녀 약 300명, 하도리 300여 명, 세화리 40여 명, 시흥리와 연평리 300여 명이 동남북으로 모여들어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며 만세로 서로 호응하면서 세화장을 점령하였다. 잠녀들은 대표를 뽑아 각 리 공동 7개 요구조건과 하도리측의 11개 요구조건을 들고 곧 해결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주위의 잠녀들은 연방 “속히 해결하라”고 노호하였다. 그리하여 도사로부터 5일내 요구대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잠녀들은 그 자리에서 5일 이내 완전한 해결이 없으면 더한층 맹렬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때 잠녀들이 요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반대.

② 일체의 계약 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③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 조합비 면제.

④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 못한 자에게 조합비 면제.

⑤ 출가증 무료급여.

⑥ 총대는 리별로 공선.

⑦ 조합재정공개.

⑧ 계약 무시하고 상인 옹호한 마쓰다 서기 즉시 면직.

⑨ 위선적 우량조합원 표창 철폐.

⑩ 악덕상인에게 금후상권을 절대불허.

⑪ 가격등급은 지정한 대로 할 것.

(≪조선일보≫, 1932년 1월 14∼24일).

이상과 같이 요구조건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해녀조합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잠녀들의 정당하고도 절실한 요구에 대한 제주도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잠녀시위 이후 일제가 답한 것은 주동인물에 대한 일대 검거였다. 해녀조합이 잠녀들의 요구에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1월 24일 아침 주모자로 파악된 잠녀 20여 명과 그 외 청년들 수십 명이 검속되었다. 이에 분노한 잠녀들과 동민들은 검거자 탈환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26일에도 800여 명의 잠녀들이 무장경관대와 충돌하는 등 투쟁이 계속되었으나 다수의 검거자를 내고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사건으로 다수 검속되었으나 곧 많은 이들이 풀려나고 최종적으로 검거된 사람들은 잠녀 3명이었고, 그 외는 모두 제주도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일명 제주도 야체이카) 관계자들이었다. 일제는 이 조직이 잠녀시위운동을 배후 지도했다고 여기고 이들 비밀조직에 대해서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나 잠녀들의 요구는 부분적이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어 지정판매제는 폐지하고 경쟁입찰에 의한 공동판매를 부활했으며, 부정한 조합서기 및 지정상인을 10년간 조합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50세 이상의 잠녀와 미성년자에게는 출가시 조합에 내는 수수료를 면제하였다.

1932년 잠녀투쟁은 일제 시기에 일어났던 어민투쟁 중 최대의 것이었으며 최대의 여성투쟁이었다. 이렇게 잠녀들이 치열하게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차적으로 잠녀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나 봉건적 남성들에 의하여 잠녀들을 남성종속하에 두고자 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과 가정경제를 같이 꾸려나가고 있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노동하여 얻은 수입이 분명하였고 경제적 기여도가 컸던 만큼 가장권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만큼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독립된 인간으로 활동하였다는 것과 통한다.

그리고 잠녀들은 노동을 통해, 또 노동의 결과물인 해산물의 처리과정에서 해녀조합·상인들의 농간을 직접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투쟁에 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잠녀들은 야학이나 조직활동을 통해 일제 강점하 조선문제에 관한 과학적 인식을 습득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34년 검거된 겸홍옥 같은 이는 원래 제주도 잠녀였고 “해녀들의 적화에 전심”하였다는 기사365)≪부산일보≫, 1934년 4월 21일.처럼 여성운동가들의 의도적 노력도 꽤 다각적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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