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1930년대 후반 이후 여성운동과 여성지식인
  • (1) 1930년대 후반 이후 노동운동

(1) 1930년대 후반 이후 노동운동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 말기 파쇼체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 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조선에서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이 절실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당면 정세를 파시즘이 급진적으로 대두하는 정세로 규정하고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전술방침도 변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거 자신의 대중활동이 노동자층에만 국한되어 있어 반파쇼·반제투쟁에 동원할 수 있고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광범한 반일대중에 대한 활동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자기비판하였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종래 견지해오던 ‘계급 대 계급’ 전술의 재검토 필요성을 전면화하였고 반제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1935년 코민테른(Comintern)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반파쇼인민전선·반제민족통일전선은 1930년대 중엽 이후 국내외 대중운동의 실천과정 속에서 일정한 불철저성을 내재하면서도 점차적으로 수용되어갔다.

반제민족통일전선 전술이 수용되면서 여성들에 대한 조직노선은 바뀌었다. 1930년대 전반기 여성운동이 계급운동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여성들은 혁명적 노동조합 여성부, 혁명적 농민조합 여성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방식으로는 광범한 반일적인 여성대중을 포괄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 이 전술을 수용한 측은 반일민족통일전선과 이해를 같이하는 모든 반일여성들을 포섭하는 반일부인회 등을 조직하였다.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사업은 경성콩그룹활동에 잘 나타나 있다. 1939년 이관술·金丹冶 등이 결성한 경성콩그룹은 인텔리·학생·노동자들을 상당히 광범하게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직부와 기관지부를 설치하여 조직활동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각계각층의 대중을 획득하기 위하여 인민전선부를 비롯한 노동조합부·가두부·학생부·일본유학생부 등 계급계층별 조직부서를 편성하였다. 지방으로는 함남·함북·경상도 등지의 주요 산업중심지에 지방조직책임자를 배치하였다.

여성노동자 조직활동은 특히 태창직물회사와 경성방직에서 있었다. 1939년 10월까지 태창직물회사 등을 중심으로 조복례·민인숙·박옥련 등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해 소규모의 강좌반을 편성하여 약 1년간 노동자 팜플렛과 기관지 등으로 교육사업과 구원사업을 실시했다. 이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해당공장의 적노반을 조직했다.

또한 각 산업별로 우수한 노동자 활동가들을 타지역의 산업별 주요 공장으로 파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9년 5월 경 강경자는 함흥으로 파견되어 질소회사에 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노복례는 영등포 방면의 공장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또한 부산 등지로 여성노동자 운동가들을 파견하여 조직·교육활동 등에 종사시켰다. 경성콩그룹은 1940년 12월, 1941년 10∼12월 두 차례에 걸친 대탄압을 당하면서 완전히 지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시기 노동자의 파업투쟁은 1936년 138건, 1937년 99건, 1938년 90건, 참가자수는 8,248명, 9,146명, 6,292명으로 1930년대 전반기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기 노동자 투쟁에는 태업·집단도주 등의 새로운 투쟁전술이 출현한 것을 고려할 때 전시체제라는 조건 속에서 파업투쟁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형태를 달리하면서 꾸준히 지속되었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들이 일으킨 중요한 파업투쟁만 들어 보아도 1936년 8월 대전 군시제사공장 여성노동자 500여 명의 파업, 인천 방직공장 1,500여 명의 파업, 1937년 1월 28일 부산 방직공장의 태업투쟁, 3월 부산고무공장 파업, 11월에는 부산 복전양말공장, 1938년 1월 해주 고전정미소의 파업, 충북 군시제사공장 청주공장의 파업, 3월 원산경성공업합자회사, 7월 평양 제사공장, 12월 대구직물공장 등의 파업투쟁이 있었다.

그중 1938년 7월에 일어난 평양 제사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은 집단탈주라는 새로운 투쟁형태를 보였다. 평양 제사공장 노동자들은 임금을 제때에 지불할 것, 합숙조건을 개선할 것,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식사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 일본인 악질감독을 축출하고 조선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희롱을 엄금할 것, 일요일에는 휴식을 보장할 것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태업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자본가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을 강제로 취업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에 격분한 여성노동자들은 짐보따리를 싸들고 평양역을 향하여 집단적인 탈주를 개시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인 기업주도 할 수 없이 요구조건의 일부를 승인하였다.

이 시기 노동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하에서 자체의 준비정도와 실정에 따라 다양한 투쟁방법을 선택하여 일제와 자본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노동자들은 투쟁형태에서 직접적인 파업 외에 태업·집단탈주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노동력 동원 등 전시노동력 수탈을 위한 파쇼적 노동정책에 대항하여 집단적 탈주·이산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8년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군수물자 결핍을 느끼기 시작하여 군수생산과 군수시설 확장에 급급하여 국민총동원의 표방하에 집단적 노력동원을 강요했다. 이리하여 군수시설 건설장·공장·기업소에서 전시강제동원에 반대하여 집단적으로 탈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의 집단도주현상은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도주와 이산은 파쇼체제하 노동자 투쟁의 한 형태로서 개별 자본가에 대한 파업투쟁과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 전반에 대한 투쟁이라는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동운동에는 반일·반전 투쟁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노동자는 임금인상·대우개선 외 8시간 노동제의 실시를 요구하였고 전시 강제 노동력동원에 반대했다. 이러한 투쟁은 일제의 군수물자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침략전쟁의 수행에도 늘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반일반전투쟁에 화재·폭발·기계파괴 등의 투쟁형태가 많이 적용되었다. 함흥 평창좌익노동조합 분회 기관지≪우리동무≫에서 가혹한 노동조건·기아임금·국방헌금 등 일제의 수탈정책을 폭로함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절대반대, 반소전쟁 절대반대, 중국혁명 적극지지 등 혁명적인 구호를 제기하고 노동자들의 진출을 고무하였다.366)한국여성연구회 여성사분과편, 앞의 책, 256∼261쪽. 이러한 일단의 조직적 운동은 노동자들의 직간접으로 결합되어 강인하게 전개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