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1930년대 후반 이후 여성운동과 여성지식인
  • (2) 1930년대 후반기 이후 국내 여성농민조직운동과 조국광복회운동

(2) 1930년대 후반기 이후 국내 여성농민조직운동과 조국광복회운동

1930년대 후반 국내외 정세변화와 더불어 운동경험의 축적과 코민테른의 방침이 맞물려가면서 반일인민전선론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곧 여성농민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런데 아래에서 언급할 조국광복회는 정리된 선언과 강령 등이 있어 조국광복회가 영향을 미친 지역의 운동내용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으나, 정평·흥원·영흥·문천·왜관 등 국내 각 지역에서는 개별분산적으로 인민전선이론을 수용하였고 공개적·대중적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제측 단편적인 자료를 통하여 당시 활동을 살펴 볼 수 있을 뿐이다.

흥원에서는 1939년 3월 홍원농민조합재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채택한 행동강령 및 운동방침에서는 반전투쟁,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무장폭동을 대비한 전투조직화, 합법·반합법의 민활한 활동, 반동단체 즉 농촌진흥회·반공단·국민정신총동원연맹·애국부인회·국방부인회 등에 침투하여 분쇄 혹은 좌경화에 노력하여 이용, 반제조직의 결성, 구원사업 강화 등을 내걸고 있었다. 당시 세계전쟁 발발 위기하에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파시즘체제가 강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포괄적인 운동방향은 국내외가 유사하였다.

그러나 운동의 구체적 내용에서 국내조직들은 1930년대 전반기의 운동경향에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토지강령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흥원에서의 토지강령은 “① 일본제국주의와 토착지주·공공단체·사원 등이 소유하는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노력농민에게 평균 분배하라, ② 고리대적 성질을 띤 일체의 부채를 무효로 하라, ③ 다각적 세제를 철폐하여 단일누진과세를 실시하라, ④ 반동적 성질을 띤 상업자본을 철폐하고 농민에게 이익을 줄 사업을 경영하라, ⑤ 수리조합을 소비에트 소유로 하고 그 관리를 노력농민에게 달라, ⑥ 부등가 교환을 철폐하여 등가교환을 실시하라, ⑦ 삼림령을 폐지하라”367)≪사상휘보≫제23호(1940년 6월), 57쪽.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①의 ‘토착지주 토지의 무상몰수’라는 부분인데 이것은 1930년대 전반기 농민운동의 일반적 방침이고, 인민전선 전술방침을 따른 조국광복회에서 제시한 ‘친일분자의 토지몰수’와는 통일전선의 범위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흥원에서는 우량한 부농까지 동맹의 범위 내에 들어오지만 조국광복회는 반일지주까지 연대의 범위 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시기 여성에 관한 방침은 어떠했는가. 정평에서는 1936년 경부터 1939년 4월 경까지 정평농조 재건 지도기관의 활동이 있었는데 이때 활동방침은 “일반농촌은 봉건적 관념이 강해 농촌 독자의 운동은 선전성이 결핍하므로 금후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농민의 제휴에 의해 운동을 전개할 것. 필요에 따라 부녀자 동지도 도시로 파견 훈련할 것. 정평농조 책임 韓秉珣은 남녀청년을 획득하여 그들을 청진 嚴允植 아래로 보내 엄윤식은 그들을 훈련할 것” 등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여성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등장하고 실제로 여성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데 그 이전보다 훨씬 관심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직접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혹은 농민운동을 위한 훈련과정으로 청진에 파견된 사람들 중에 실제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노농운동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비단 정평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34년 진해·부산에서도 도시주변의 농촌처녀들을 교육하여 여공으로 들어가 공장에서 활동하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 구속된 동지희생자 및 그 가족에 대하여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다른 활동경비를 절약해가며 복역중인 동지들을 격려하고 남은 가족들에 대해 위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직접적으로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또한 일제의 끈질긴 회유공작에도 넘어가지 않고 운동선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여 여성들의 협력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국내 민족해방운동은 1928년 조선공산당 궤멸, 당해산 이후 중앙당 결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통일적 지침이 없었던 상태였다. 이에 반해 만주에서는 조선인을 다수 포괄한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면서 더욱 많은 반일세력을 규합하였고 상시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정치노선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1936년 6월 조직되면서 직접 조선의 광복을 목적으로 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368)≪사상휘보≫제14호(1938년 3월), 53∼77쪽.

조국광복회는 선언에서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 하여 전반적 기조를 반일세력의 총집중, 대중성 확보에 두었다. 그리고 10대 강령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제7항 “양반·상민 기타의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민족·종교 등 차별없는 인류적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의 대우를 제의하며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이라고 하여 일제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남녀의 완전한 평등이란 과제가 명시되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하면 조국광복회의 부녀조직과 활동방침은 “조국광복회 영도하에 부녀부를 결성하며 이에 항일의식을 주입하여 무장대 출동시 정신적 위안과 물질적 원조를 하게 할 것”에 두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 속에 국내조직을 위해 만주에서 파견된 정치공작대 13명 중 박록금·황금옥 등 6명이 여성이었다.369)<혜산사건에 관한 함경남도 경찰부의 전말서>, 20∼25쪽

그런데 실제 여성농민들 속에서 조직을 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여성 스스로가 봉건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게다가 주위의 분위기도 역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막는 장애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특히 외부 파견원이 직접 조직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이미 연결을 갖고 있던 다양한 끈을 통해 조직사업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도 우선 조직의 책임자나 회원의 어머니·아내·누이들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마을의 여성들을 운동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야학을 조직하여 여성들을 계몽각성시키고 여러 방식으로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여기에 조선인민혁명군 원호사업 등 실천사업을 통해 단련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운동핵심들을 키워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유격대 활동에 참가하여 군사활동과 함께 대중에 대한 선전사업·재봉·간호·취사 등의 일을 하였다. 유격대에 참가하지 않은 여성들은 일상적인 활동과 더불어 물자조달을 위해 행상을 하거나 필요품을 만들어 지원하고, 삼엄한 경비와 통제 속에서 적의 정세를 파악·보고하고 길 안내, 부상자 치료 등 구원활동과 조선혁명군의 신변보호·숙식보장 등 군사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벌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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