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4) 1930년대 후반 이후 여성운동과 여성지식인
  • (3) 여성운동가들의 결단과 여성지식인들의 일제체제로의 굴복

(3) 여성운동가들의 결단과 여성지식인들의 일제체제로의 굴복

이 시기 국내운동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지하로 잠입해 들어가고 활동의 범위가 축소되어 갔다. 그러자 1930년대 초중반 무렵부터 허정숙·金命時·박차정·朴鎭洪 등의 활동가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일제와 무장투쟁을 하였다.

근우회 활동을 하던 박차정은 1930년 1월 서울의 여학생시위사건과 관련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중국 망명길에 올라 혁명교관학교 여자부 교관, 婦女服務團 단장 등을 맡아 민족해방운동, 항일전에 참가하다가 1944년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허정숙은 1920년대 여성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다가 서울 여학생시위의 주모자로서 검거되어 출옥한 후 1930년대 중반 중국으로 가서 한국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등에서 활동하였다.370)서형실,<허정숙-근우회에서 독립동맹투쟁으로>(≪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2년 겨울호), 278∼287쪽. 국내외에서 활동하였던 김명시는 1932년 국내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7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해방 직전 조선의용군 제1선 적구부대 ‘여자부대’를 지휘하고 조선독립동맹 천진분맹 책임자로 있었다.371)남화숙,<‘여장군’ 김명시의 생애>(여성사연구회 편,≪여성≫2, 창작사, 1988), 337∼355쪽 박진홍은 1931년 6월 동덕여고보 동맹휴학사건의 주모자였다. 그는 각종 혁명 노조활동 등으로 수차례의 투옥, 10여 년의 감옥살이를 겪고 온갖 탄압과 감시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1944년 중국 연안으로 떠났다.372)오미일,<박진홍-비밀지하투쟁의 세포로 활약>(≪역사비평≫, 1992년 겨울호), 288∼295쪽. 이들은 민족해방운동조직에서 활동하면서 대일본전선에서 무장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는 항일운동가들의 어머니·아내·딸로서 시작하여 여성조직을 이끌고 민족해방운동을 펼친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내에 남아서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고 타협한 지도급 여성들도 있었다. 1937년 이후 이들은 각종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시국강연·가두선전·글·방송·위문공연 등 온갖 방법으로 일제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동원에 순응하고 나아가 일제 정책의 선전자가 될 것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여성에게는 정신대동원·노력동원·가정내 절약과 저축에 적극 협조할 것을 강조하는 등 일제 정책의 선전대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교육계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학교교육의 양면적 문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육 자체가 이미 절대적인 가치중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학교란 기관이 존속하기 위해 원래 교육목적조차 위배되는 교육을 함에도 불구하고 유형의 학교의 존재에 발목잡혔다. 또한 이미 사유화되기 시작한 교육기관의 존속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각종 민족말살정책을 편 일제 정책 침투의 통로로서 교육기관이 활용되고 교육계 여성 개인들은 일제의 꼭두각시 혹은 선전대가 되어 과거 그들이 구호로 내세우던 여성교육·민족교육의 진정한 과제는 하나씩 버려갔다.

이러한 지식인 여성들의 친일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대부분이 1920년대 사회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노골적인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조선을 확실한 침략전쟁의 기지로 만들기 위해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였고 이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각종 악법을 발표하고 운동경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비구금,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철저한 보도통제 등을 자행하였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의 노골적인 친일화, 좌익측 일부의 전향으로 전과 같은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은 전개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민중들의 반일투쟁은 계속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만주·중국본토·일본 등지와 연계를 가지면서 운동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농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농산물 강제공출, 강제동원, 각종 전시부담을 반대하며 소작권이동과 소작료 문제를 둘러싸고 투쟁이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징용·징병·보국대·여자정신대 동원에 반대하여 일제 관헌과 충돌하거나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확물을 은닉하고 공출이나 농사일을 기피하거나 태업하는 경우가 일상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낙서·유언비어·유사종교가 난무하였다. 이런 것들의 내용은 터무니없는 경우도 많지만 일제의 멸망, 조선독립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당시 민중들의 염원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운동가들은 민중의 이러한 염원을 민족해방운동의 구체적인 힘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姜貞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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