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4. 청년운동
  • 1)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과 와해

1)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과 와해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항일열이 고조되어 가고 각 분야에 걸쳐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 때 민족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의 단체가 결성되고 활동함으로써 전민족적 항일운동이 국내에서 크게 발흥되었다.

청년·여성·소년 등 각계 각층의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농민·노동·물산장려운동 등 경제투쟁을 통하여 민족경제자립을 달성하려는 민족경제운동이 국내 각 지역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 때 청년들은 지덕체 함양과 생활개선·구습타파·근검저축·금주·단연을 통한 소비절약을 목적으로 각지에 청년중심의 단체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 청년운동이 분산적으로 일어남으로써 효율적인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張德秀·鄭魯湜·金喆壽 등이 전국에 분산되어 조직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체계화·일선화 시키고 전국적인 조직을 통하여 청년단체를 통합, 독립운동에서 하나의 또다른 큰 세력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2월 116개 단체 대표 120명이 참가하여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朝鮮靑年聯合會를 창립하였다. 이후 청년운동이 크게 발흥되고 전국 각지에 청년단체가 많이 조직되어 1924년 전국에 488개의 청년단체가 결성되어 청년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373)朝鮮總督府 警務局 編,≪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狀況≫(昭和 8년), 30쪽.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사상이 우리 민족운동계에 파급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서울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이 연합회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함으로써 청년운동계는 민족·사회주의 양 계열로 분열되어 상호대립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서울청년회는 연합회의 활동 강령을 “역사적 진화의 필연인 신사회건설을 목표로 하여 돌진한다. 또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써 무산대중 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고 개정하여 청년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노선에 부합시켰다.374)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주의운동사≫2(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114쪽. 그리고 그 이듬해 全朝鮮 靑年黨大會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자기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가 일제 당국에 의하여 금지됨으로써 좌절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청년운동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은 북풍회계·화요계·토요계 등으로 분열되어 상호대립과 갈등을 나타냄으로써 청년운동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 버렸고 이에 청년운동의 통일과 단합을 요청하는 사회적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1924년 북풍회계가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에 가맹한 단체가 224개 단체가 되었다. 이 조선청년총동맹은 “대중본위의 신사회의 건설,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선구가 될 것임을 기약”한다는 강령을 내걸고 청년운동의 중심기관으로 자리잡았다.375)朝鮮總督府 警務局 編,≪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狀況≫(昭和 8년). 그러나 이 총동맹은 일제 당국이 창립대회에 이어 개최하려던 임시총회를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동맹의 일체의 집회를 금지함으로써 총동맹의 역할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공산당사건으로 두 차례에 걸쳐 총동맹의 간부 다수가 일경에 체포, 구속됨으로써 총동맹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1926년 正友會 선언과 1927년 민족유일당으로서 新幹會가 발족되자 조선청년총동맹도 이와 같은 시대조류의 변화에 적응하여 행동강령과 조직을 전환하였다. 즉 종래의 무산계급의 청년운동을 전민족적 청년운동으로 강령을 바꾸고 조직도 크게 개편하였다.376)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9(1991), 227∼230쪽.

지방의 청년단체를 단일화시켜 府와 郡에 단일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각 면에는 지부를 두고, 각 리에는 반을 두어 체계적 조직을 갖추었으며, 道에는 도 연맹을 결성하여 전북·전남·경남·황해·평북·평남·강원·함북에 도 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울청년회와 신흥청년동맹을 해체하고 각 청년단체 중에 총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단체는 해체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총동맹의 처사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오히려 총동맹의 해소를 주장하기도 하였다.377)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9, 231쪽.

1931년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한 단체가 147개였는데 지방청년동맹은 135단체로서 지방청년동맹으로 개편되지 않은 단체는 12개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378)朝鮮總督府 警務局 編,≪最近における朝鮮治安狀狀況≫.
국사편찬위원회편,≪한국독립운동사≫5, 226쪽.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된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더욱 가중되었고 1931년 민족유일당인 신간회가 해소를 결의함에 따라 총동맹의 역할도 쇠락하여 해소론이 나오는 등 청년운동을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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