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5. 학생운동
  • 1) 군국파쇼 일제의 통치정책과 민족운동의 변화
  • (2) 민족운동의 변화

(2) 민족운동의 변화

193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운동 중 두드러진 항일운동은 1936년의 日章旗抹消抗爭, 1937년 修養同友會의 항쟁, 1935년 이후 신사참배거부항쟁 등을 꼽을 수 있다.

1936년 8월 독일의 수도 베를린(Berlin)에서 개최된 제11회 올림픽대회에 일본 마라톤선수로 참가한 養正高普의 孫基禎과 南昇龍이 각각 1위와 3위로 입상하여 한국인의 기개를 전세계에 떨친 쾌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우승소식을 전하는 과정에서≪동아일보≫가 8월 25일 석간에 손기정의 유니폼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하였다. 총독부는 이를 문제삼아 화가 李象範을 비롯하여 사진부기자 白雲善, 운동부기자 李吉用, 편집부기자 林炳哲, 사장 宋鎭禹, 주필 金俊淵, 편집국장 薛義植, 사회부장 玄鎭健, 사진과장 申樂均,≪신동아≫책임자 崔承萬 등 11명을 검거하고 8월 27일부로≪동아일보≫를 정간 처분하였다.399)東亞日報社,≪東亞日報社史≫1(1987), 136쪽.
趙芝薰,<韓國民族運動史>(≪韓國文化史大系≫Ⅰ民族·國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4), 814쪽.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5(資料篇), 14쪽.

일제 당국은 앞에서 서술한 11명을 포함한 50여 명을 40여 일간 문초를 한 후 주모자 이길용·현진건·최승만·신낙균·서영호 등 5명에게서 다시는 언론기관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모두 석방시켰다.≪동아일보≫자체 내에서도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이 사임하고 부사장 張德秀도 도미 중 귀국하여 사임하였다.

일장기말소항쟁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었던 일제에 대한 민족적 감정의 폭발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 의식의 행동화였던 것이다.

1937년 6월 6일 종로서 형사대가 수양동우회 이사장 朱耀翰을 비롯한 동회간부들의 가택을 급습하여 李光洙·金允經·朴賢煥·金鍾悳·趙炳玉·李允宰·申允局(一名 申鉉謨)·李大偉·韓昇實·許龍成 등 11명을 체포·검거하였다. 이를 계기로 비밀에 부쳐졌던 수양동우회의 조직과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수양동우회는 1914년 5월 도미중이던 安昌浩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조직한 興士團의 한국지부였다.400)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5(資料篇), 320쪽. 즉 1922년 서울에서 박현환·이광수 등 11명이 수양동맹회를 결성하였고,401)朝鮮總督府 警務局,≪第七十三回帝國會議說明資料≫, 113쪽. 같은 해 평양에서 金東元 등이 同友俱樂部를 조직하여 양 단체가 1926년 수양동우회로 통합하였다. 그 뒤 미국의 흥사단본부, 상해흥사단원동위원부 및 수양동우회간에 규약개정에 성공, 1929년 흥사단과 수양동우회를 통일하여 회명을 同友會로 결정하고 회원증원에 노력, 82명의 중견회원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동우회는 1931년 2월 중앙위원회를 열고 회세확대강화를 위한 4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1933년 안창호가 일경에게 체포됨에 따라 실행이 어렵게 되었다. 일제는 1937년 6월 동회간부들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1937년 6월 12일∼13일 양일간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에서 금주운동실행을 계획하고 같은해 5월 11일 전국 35개 지부에 ‘멸망에 함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한 인쇄물을 발송하였다. 이것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동회조선연합회서기 李良燮이 구속되고 그를 취조한 결과, 그 배후에 李容卨·鄭仁果·이대위·주요한·柳瀅基 등이 관계되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동우회에 대한 탄압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동우회 회원들의 항쟁은 日帝의 간악한 탄압과 술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서 민족의 의지를 과시한 민족운동의 한 형태였다.

1930년대 일제와 대항하여 싸운 민족운동의 한 형태는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위한 방편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20년대까지는 신사와 종교를 구분하여 신사참배는 강제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5년 평남도청회의실에서 개최된 중등학교장회의에서 도지사가 평양신사참배를 강력히 지시하자 崇實專門學校교장 맥쿤(George S. McCune)과 崇義女學校교장 스눅(Miss V. L. Snook)이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에 도지사는 60일간의 시한을 두고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교육자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였다.402)郭安全,≪韓國敎會史≫(大韓基督敎書會, 1961), 177쪽.
朝鮮總督府 警務局,≪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1938), 389쪽.
≪東亞日報≫, 1935년 11월 24일.
그러나 맥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평양의 선교부실행위원회와 선교사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는 한편 평양시내 27명의 한국인 목사를 소집, 사태를 논의하여 신사참배거부를 결의하였다.

60일이 지나자 맥쿤은 도지사에게 신사참배거부서신을 보냈고 도지사는 맥쿤과 스눅 두 교장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1938년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장로교 계통의 사립학교 18개교가 폐교당하였으며,403)吳天錫,≪韓國新敎育史≫(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322쪽. 1939년 황국신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신사참배거부로 구속, 처형된 기독교도수만도 324명에 이르렀다.404)坪紅汕二,≪韓國民族獨立運動秘史≫ 增補改訂(高麗書林, 1986), 58쪽.

1940년 일제는 소위 ‘基督敎反戰工作事件’을 조작하여 신사참배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비국민으로 단정하고 기독교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15명의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 다수가 검거되었으니, 이 때 검거된 인사로는 朱基徹·崔鳳奭·崔尙林 목사·朴寬俊 장로·朴義欽 전도사 등이 포함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옥사당하였다.405)趙芝薰, 앞의 글, 819∼820쪽.

1940년대 들어오면서 일제와 맞선 대표적 항일투쟁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의 항쟁을 들 수 있다.

조선어학회는 1921년 조선어연구를 목적하고 조직된 조선어연구회의 후신이었다. 이 회에서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를 만들고 사전편찬에 착수하였다.406)李熙昇,<國語를 지킨 罪로 ∼朝鮮語學會事件>(≪韓國現代史≫5, 新丘文化社, 1969), 335∼412쪽. 그리하여 1933년<한글맞춤법통일안>, 1940년에는<외래어표기법>등을 통일하여 발표하는 등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황민화정책과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위배되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수수방관할 리 없었으니 드디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사건의 발단은 1942년 8월 조선어학회에서≪조선어사전≫을 편찬중이던 丁泰鎭이 함흥 영생여학교사건으로 함흥경찰서에 증인으로 갔다가 구속되면서부터이다. 그 뒤 같은해 10월 조선어학회 회원인 李允宰·崔鉉倍·鄭寅承·李熙昇·張志映·金允經·李克魯·韓澄·李重華·李錫麟·權承昊 등 11명이 체포되고 이어서 金法麟·李秉岐 등이 구속되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자가 29명, 증인으로 심문받은 이가 50명에 이르렀다.407)趙芝薰, 앞의 글, 817쪽.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악랄하고 가혹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고≪조선어사전≫편찬 등 우리말연구를 통한 민족혼을 끝까지 수호했던 민족문화단체이며 애국독립단체였다. 또한 이 회의 회원들은 민족독립운동가로서의 사명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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