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5. 학생운동
  • 2) 1930년대 학생운동
  • (1) 문화계몽운동

(1) 문화계몽운동

1930년대 파쇼 일본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전개되었던 민족운동은 다양한 전략·전술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이 시기 항일학생운동도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에 맞서 민족의 실력양성과 민족각성을 위한 문화계몽운동, 교내에서의 동맹휴학, 교내외에서의 비밀결사를 통하여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문화계몽을 통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농민·노동야학의 교사로서의 활동과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보급운동을 들 수 있다.

농민·노동야학408)夜學의 명칭은 다양하였으니 ① 설립단체명에 따라 ‘南原靑年夜學會’·‘開城商友會夜學會’·‘龍山敎會夜學’, ② 소재지명에 따라 ‘北一面夜學’·‘三浪津夜學’, ③ 장소에 따라 ‘市場壽學’·‘驛前夜學’·‘農村夜學’, ④ 교과목에 따라 ‘朝鮮文講習夜學會’·‘元山英語夜學’·‘天安商業夜學’, ⑤ 피교육자의 신분·연령·성별에 따라 ‘勞動夜學’·‘農民夜學’·‘無産者夜學’·‘店員夜學’·‘女子夜學’·‘衡平夜學’·‘靑年夜學’·‘兒童夜學’ 등으로 붙였다. 여기에서는 農民·勞動夜學으로 命名하기로 한다(盧榮澤,≪日帝下民衆敎育運動史≫, 探究堂, 1979, 130쪽).은 우리의 주권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침탈되는 과정에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20세기 초부터 전국적으로 설치된 비공식교육기관이었다. 우리 나라 야학의 기원은 1906년 함남 함흥군 주서면 신중리의 普成夜學이 4명의 교사에 남학생 40명, 여학생 20명으로 성립되면서부터이다.409)현재까지 夜學의 始初를 1907년 ‘馬山勞務夜學’을 들고 있으나(姜東鎭,<日帝支配下의 勞動夜學>,≪歷史學報≫46, 1976;盧榮澤,≪日帝下民衆敎育運動史≫, 探究堂, 1979),≪朝鮮農民≫(1927년 12월호) 등의 내용을 참고로 1906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金鍾美,<日帝支配下의 民衆敎育에 관한 一硏究>, 中央大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89).

농민·노동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 농민·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는 러시아혁명과 피압박민족들의 해방투쟁이 전개되던 때였고 근로대중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키 위해서는 사립학교나 서당으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대중적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었다. 또 현실적으로도 일제가 세운 공립보통학교의 수용능력의 제한, 학비의 부담이 과중했으므로 시설이나 규모가 빈약하더라도 근로대중에게 맞는 초등교육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410)李光麟,<民族敎育>(≪한국사≫22, 國史編纂委員會, 1976), 87∼88쪽.

년 도 야학 설립수 년 도 야학 설립수 년 도 야학 설립수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66
210
190
204
134
271
292
1927
1928
1929
1930
1931
1932
1933
277
156
112
120
156
72
74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43
67
22
18
32
17
6

<표 1>일제하 야학설립상황

*東亞日報社,≪東亞日報索引≫에서 발췌.

위의<표 1>에서 볼 때 1931년을 고비로 야학은 그 수가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그것은 파쇼 일본군국주의가 대한통치정책에 따라 야학을 탄압, 폐쇄시켰기 때문이었다.

농민·노동야학의 설립자는 지방유지, 농민·노동·청년단체, 종교기관 등이었고 운영경비는 설립자의 기부금, 유지의 동정금, 학생의 월사금, 노동을 통한 이익금, 동리의 찬조금으로 충당하여 오히려 학생들에게 교과서나 학용품을 무료로 공급하면서 운영하였다. 교원들도 무보수로 봉사하였으며 교원의 대부분은 지방유지청년과 보통학교 이상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411)보통학교 이상 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던 학생들이 교사로 된 경우는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다.
≪東亞日報≫, 1924년 12월 10일·1925년 9월 1일·1926년 1월 27일.
한편 야학에서 가르쳤던 교과목은 문맹퇴치에 역점을 두어 한글 및 실용적 교과인 산술·주산 등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한국 역사·지리 등 그 내용이 다양하였다. 교재로는≪농민독본≫·≪농촌산술≫·≪최근농잠법≫등이 대표적이었다.

1920∼1930년대의 농민·노동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 상설교육기관을 통한 민족운동이라면 학생들의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문자보급운동은 문맹퇴치의 교육·문화운동으로서의 연례행사형태의 대중운동이었다.412)李光麟, 앞의 글, 92쪽.

한글보급을 위한 문맹퇴치운동은 먼저 조선일보사에서 시작했다. 1929년 6월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조선일보사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학생들은 이에 호응하여 첫해에 참가한 학생수가 409명,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문맹을 퇴치한 수는 2,84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숫자는 409명의 학생 중 91명만이 보고한 숫자이므로 실제 한글을 깨우친 수는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413)鄭世鉉,≪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一志社, 1975), 464쪽. 더욱이 신문사에서는 학생들이 활동을 마치고 9월에 상경하면 학생 중 한글보급에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학자금을 보조하는 포상제도를 마련하여 열심히 문자보급운동을 일으켰으니, 1934년 일제의 금지조치로 중단하기까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문자보급운동에는 참가학교 125개교, 참가학생수 4,917명, 특별반 161명, 합계 총 참가학생수 5,078명이었다. 6년에 걸쳐 실시된 조선일보사 주최 문자보급운동에 대하여 총독부 당국자가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이던 와타나베(渡邊)는 “사업취지는 찬성하나 학생통제는 학교에서 할 일”이라 하여 간섭을 표명하였고 경기도지사 마스모토(松本)는 “개인교수는 무방하나 강습회는 불허한다”고 관내 각 경찰서와 중등학교에 통첩을 보내서 방해공작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서 활동하던 학생문자보급반은 제약을 받았으니 그 예로 전북 부안에서는 집회허가를 해주지 않아 중지되었고, 원산 명성학원의 반원들은 매를 맞아가면서 집집마다 교재인≪한글원본≫을 나누어주었으며, 인천 송현리 반원들은 부녀자들이 글을 깨우치기 위하여 보급반을 찾아왔지만 허가지연으로 학생이 감소되었다고 중앙에 보고하였던 것이다.414)朴晟義,<日帝下의 言語·文字政策>(≪日帝의 文化侵奪史≫, 民衆書館, 1970), 291∼293쪽.

동아일보사에서도 1931년 7월 ‘학생 하기 브나로드(V. Narod)운동’을 주최,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농촌을 상대로 문화계몽사업을 벌였다. 이 신문사에서는 1928년 4월 1일 창간 8주년 기념일을 기해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으나 총독부의 제지로 햇볕을 보지 못하였다.415)東亞日報社,≪東亞日報社史≫1(1987), 292∼295쪽. 그러나 조선일보사가 학생을 내세워 문자보급운동을 활발하게 추진시켜 나가자 이 신문사에서도 학생 중심의 브나로드운동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브나로드(B Hapoд)’란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의 뜻이다.416)東亞日報社, 위의 책, 336쪽. 이 브나로드운동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층이 농민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상대로 벌인 계몽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신문사의 브나로드운동은 러시아에서 전개된 운동과는 관련 없이 순전히 그 어의만 차용하였다. 즉 2,000만 한민족의 8할에 가까운 1,600만의 문맹자를 대상으로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을 중심으로 농민위생지식을 알려주는데 그 목적을 둔 민중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1회 ‘학생 하기 브나로드운동’은 3대로 나누어 학생계몽대·학생연설대·학생기자대로 구성하고 경비는 원칙적으로 대원 각자가 부담하였다.417)≪東亞日報≫, 1931년 7월 16일. 제1대인 학생계몽대는 중학교 4·5학년생에 한하여 참가시켰다. 그 활동내용은 ① 조선문 강습, ② 수학 강습을 1주일 이상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 사용된 교재는 李允宰 편,≪한글공부≫와 백남규 편,≪일용계산법≫으로 신문사에서 배부하였다. 대상지는 각자의 향리나 인접지로 한정하여 1개 처에 2인 이상 협력하여 교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활동한 내용을 성적으로 고사하여 시상도 할 예정이었다. 제2대인 학생연설대는 전문학교생에 한정하여 ① 위생강연, ② 학술강연으로 구분하고 위생강연회에는 幻燈과 활동사진 상영, 학술강연회에는 음악이나 무용을 상연해도 무방하도록 규정하였다. 강연장소는 각자의 향리나 인접지로 하고 한 곳에 2인 이상의 협동을 종용하였으며 신문사의 지·분국에서 후원하도록 하였다. 제3대인 학생기자대는 전문·중학상급생에 한정하여 ① 기행일기, ② 척서풍경, ③ 고향통신, ④ 생활체험의 수기를 제출토록 하여 우수작은 지상에 발표하고 시상하기로 하였다. 한편 학교교원·서당선생·동리유지·일반 지식청년 등 지방사회유지 중에서 이 운동 참가희망자를 위하여 별동대를 두기도 하였다.418)東亞日報社, 앞의 책, 336∼338쪽.

4번에 걸쳐 실시한 학생 브나로드운동을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종 목\회 수 제1회 제2회 제3회 제4회
대 원 수 423 2,734 1,506 1,094
강 습 지 142 592 315 271
금 지 11 69 67 33
중 지 10 17 26
강습생 수 9,492 41,153 27,352 20,601
5,426 22,324 14,354 12,323
4,066 18,829 12,998 8,278
강습생 평균 수 67 69 86 76
강습일자 연 2,289 8,182 6,304 3,962
평 균 18 14 20 15

<표 2>학생 브나로드운동 상황

*≪東亞日報≫, 1934년 9월 19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동아일보사 주최 ‘학생 브나로드운동’은 약 10만 명의 문맹자를 퇴치시켰던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 전체 문맹자의 수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지만 짧은 기간에 그것도 학생들의 노력에 의하여 문맹을 깨우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민족운동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일제 당국은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는 의구심 속에서 갖은 방법으로 금지·중지를 자행하다가 1935년 5회부터는 전면금지라는 조처를 내려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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