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5. 학생운동
  • 3) 태평양전쟁하의 학생운동
  • (2) 부산2상·동래중학의 군사훈련 반대항쟁

(2) 부산2상·동래중학의 군사훈련 반대항쟁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병탄한 후 궁극적으로는 한국민족을 皇民化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 민족을 지배했다. 교육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4차의<교육령>을 개정하면서 황민화정책을 추진시켰다. 즉 1910년대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기에는 1911년 제1차<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동화교육을 실시하였고, 1920년대 소위 문화정치 시기에는 1922년 제2차<조선교육령>을 공포, 내선일체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1938년 제3차<조선교육령>을 개정했다. 이 시기에는 황민화교육에 박차를 가하여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40년대 태평양전쟁시기에는 제4차<조선교육령>을 1943년에 개정하여 전쟁에 대비한 결전교육을 실시하였다.457)鈴木敬夫,≪朝鮮植民地統治法の硏究≫(北海道大學圖書刊行會, 1989), 250쪽. 더욱이 1940년대 결전교육은 군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군사능력의 배양수단이었고 그 실천의 원천이었다. 鍊成과 학도동원을 근간으로 한 제4차 교육령체제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강화하고 그들을 전쟁에 투입시키는 제도적 장치였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내에 연성과를 설치, 각급학교 졸업자와 학생들을 상대로 연성을 실시하였다. 연성은 ‘鍊磨育成’의 뜻으로 한국민족을 완전한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학교는 군대의 하청기관으로 일본어 교육과 군사교련의 場이었으며, 졸업생에게도 군사예비훈련을 실시키 위하여 연성수업소·청년특별연성소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다.458)朴慶植, 앞의 책, 374∼375쪽.

한편 학도동원체제화에 박차를 가하여 조선총독부는 1941년부터 고등교육기관의 수업연한 단축실시로부터 1943년<학도전시동원체제확립요강>을 통하여 근로동원의 강화를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교육의 장인 학교는 노동력 공급의 장으로 변하였고, 근로동원이라는 명목으로 증등교육기관·고등교육기관의 학생들을 산업시설에 투입하여 육체노동을 시켰다. 한편 1943년 징병제를 실시, 징병적령제출자가 25만 4,753명이었고 1944년 제1회 징병검사를 받은 청년이 20만 6,057명이나 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1943년 소위<朝鮮人學徒陸軍特別志願兵制度>를 공포하여 강제로 한국인 학생을 전선에 투입시켰던 것이다.459)金鎬逸, 앞의 글(1991).

이러한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학생들은 황민화교육 반대, 식민지정책 반대, 근로동원 반대, 학병거부 등 다방면에 걸쳐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동맹휴학이나 집단시위운동보다는 비밀결사를 통하여 폭력으로 일제를 응징하려고 한 실력행사에 그 특징이 있었으며, 또한 1920∼193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사회주의 계통의 운동보다 민족주의 이념을 가진 항일학생운동이 발전되었으며, 그 성과가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항일학생운동은 1940년 부산지역에서 일어난 부산2상과 동래중학생이 전개한 군사훈련반대시위항쟁(일명 노다이사건)과 1942년 비밀결사 흑백당의 활동, 1944년 평양사단 및 대구 24부대의 학병의거라 할 수 있다.

1940년 11월 21·22일 양일간 경남지방의 중등학교를 동·서군으로 나누어 동군은 부산 제2상업학교·부산중학교·부산 제1상업학교이고, 서군은 동래중학교·마산중학교·진주농업학교·진주중학교로 편성하여 배속장교인 일본군 육군대좌 노다이(乃台)의 지휘 아래 김해 방면에서 모의전투훈련을 했다.460)金義煥,<日帝下 釜山의 學生抗日獨立運動>(≪尹炳奭敎授華甲紀念韓國近代史論叢≫, 1990).

이 때 노다이대좌는 민족적 차별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일본인학교 학생들은 평지에서 훈련을 받게 하고 한국인 학생들은 산간지대로 우회시켜 과로로 지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종합평가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좋은 평가를 받게되었다. 이어서 같은달 23일 거행된 국방경기대회에서도 당연히 우승교로 지목되던 동래중학과 부산2상업학교를 탈락시키고 부산중학을 우승케 만들었다. 이에 격분한 부산2상·동래중학생들이 폐회식에 우승의 부당을 지적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양교생 1,000여 명은 구덕산운동장에서 출발하여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당시 금지되었던 우리 가요인 황성옛터·아리랑·양산도·도라지타령 등을 고창하고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461)釜山學生事件正史編輯委員會,≪釜山學生事件正史≫(1967), 8쪽. 양교의 시위대열은 부용동 흑교를 거쳐 부승동 4거리에서 부산제2상업학교생들은 대청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향하고, 동래중학생들은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행진, 중앙동에서 합류한 다음 하급생들은 어두워지자 귀가시키고 양교의 4·5학년 약 400여 명이 하오 8시 30분 경 부산터널 입구 오른편에 있었던 노다이 관사에 도착, 터널입구 공사장의 자갈돌을 들고 “노다이 나오너라”, “노다이 죽인다”라고 외치면서 관사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모두 깨트리고 노다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나 9시 경 모두 해산하였다.462)東萊高等學校19期同期會,≪望月回想錄≫(1990), 197∼217쪽.

그러나 부산 일본헌병대에서는 27일 오후 10시부터 시위에 참가한 학생 검거에 나서서 다음날까지 2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이들 중 주모자급 학생 15명을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부산지방법원 제1심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의 제2심에서 징역 8개월의 언도를 받고 11명이 옥고를 치렀다. 한편 부산2상과 동래중학의 학교 당국은 이 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에 대하여 부산2상은 퇴학 12명, 정학 10명, 견책 10명을, 동래중학도 퇴학 9명, 정학 34명을 징계했다.463)釜山學生事件正史編輯委員會, 앞의 책, 8쪽.

부산2상과 동래중학의 한국인 학생들의 거사는 부정과 불의에 분기하여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항일투쟁사의 또 하나의 의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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