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5. 학생운동
  • 3) 태평양전쟁하의 학생운동
  • (3) 학병거부항쟁

(3) 학병거부항쟁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소위 大東亞共榮이라는 미명 아래 자국인뿐만 아니라 식민지 한국인, 괴뢰 만주국의 만주인·몽고인·중국인까지 이 전쟁에 동원시키고 군수물자를 강탈했다. 특히 한반도를 그들의 대륙침략기지로 만들어 북한지방은 중공업지대로, 남한지역은 경공업 및 식량생산기지화하여 전쟁수행에 이바지하게 했다.464)森田芳夫, 앞의 책, 19쪽.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인적 동원을 징병과 징용을 통해 실시하였다. 즉 1943년 5월 징병제실시를 결정하고 1944년부터 징집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미 1938년 이후 지원병이라는 명목하에 청년들을 군에 입대시켜 1941년까지 1만여 명을 전선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한편 1943년 10월 일제는 소위<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공포하고 한국인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몰려고 하였다. 이 학도지원병은 표면적으로는 자의에 의한 지원이라고 했으나 일제 당국은 학교에 대하여 지원특례를 주는 수법으로 강요하였다.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를 통하여 국내 지도자들의<학병권유문>을 게재하고 심지어 최남선 등을 파견,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들에게도 학병지원 권유 강연행각을 자행했다.465)兪鎭午,<片片夜話>47(≪東亞日報≫, 1974년 4월 29일). 이러한 일제의 학병지원제에 대하여 한국 학생들은 학병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으나 군경을 동원한 강력한 제동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3년 11월 20일까지 조선인 학도지원병의 지원마감에 따라 학병적격자 7,200명의 명단이 작성되고, 이중에서 1944년 1월 20일 4,385명이 학업을 포기하고 일본 천황을 위한 전쟁을 위하여 입대하게 되었던 것이다.466)입대한 4,385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내 재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 1,529명), 일본 잔류학생 719명(적격자 1,400명), 9월 단축졸업생 941명(적격자 1,574명), 취직 중 졸업생 335명(적격자 700명)이었다(20同志會中央本部,≪靑春輓章≫1, 1972, 289∼302쪽).

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 출신의 학병들도 1943년 창설된 평양사단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 사단에서 훈련받는 가운데 학병의거를 단행한 주체는 42보병부대의 학병들이었다. 의거 당시에는 50명 가량이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일군에게 끌려가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는 결심 속에 집단의거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2부대의 한국인 학병인 金完龍·朴性和·崔正守·全相燁 등은 틈만 있으면 의거 모의를 숙의하였고, 1944년 8월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우선 동지 포섭과 조직강화에 착수하여 행동강령과 부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467)20同志會中央本部,<朴性和의 手記>(위의 책), 53∼77쪽.

 <행동강령>

① 우리는 생명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② 우리는 일체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단결한다.

③ 우리는 우리의 조직 명령에 복종한다.

④ 우리는 지성과 관용으로 동지애를 굳힌다.

 부 서

총책:김완룡(중앙대학 법학부)    참모장:박성화(조도전대학 이공학부)

참모(작전):전상엽(대동공전 채광과) 참모(보급):崔泓熙(중앙대학 법학과)

참모(정보):李度洙(궁기고농축산과)  제42대 조직책:최정수(동양대학 철학과)

이어서 제47포병부대에서 7명, 43·48·50부대에서 18명을 가입시켜 조직을 확대하고 거사작전도 수립하였으니 평양사단을 폭파하고 부대를 탈출,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계획하에 장비는 개인에게 지급된 3·8식 소총 1정, 대검 1개, 사격훈련 때 감추어둔 실탄·의약품·미숫가루 등과 작전에 필요한 지도·야전용 칼·전지·야광 나침반을 준비했고, 각자가 민간복과 자금을 마련토록 했다. 아울러 거사일을 10월 1일로 정하였다가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468)朴性和,<日軍平壤師團의 學生義擧>(≪新東亞≫, 1969년 4월호).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거사일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한인보조헌병 임○호의 밀고에 의하여 김완룡 등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갖은 고문을 받고<치안유지법>제3조 국체변경을 목적으로 한 국가반란죄로 평양사단 군법회의에 회부, 주모자급 26명은 징역 13년에서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고 복역 중 1945년 8·15 해방으로 영어의 몸에서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평양사단의 학병의거와 함께 대구 24부대에서도 학병의거가 일어났다. 1944년 1월 20일 경상남북도 출신 학병 600여 명이 강제 입영되어 훈련을 받던 중 27명만 남고 모두 중국전선으로 출정했다. 남은 27명 중 權赫朝(중앙대학생)·文漢雨(연희전문생)·金而鉉(명륙학원) 등이 중심이 되어 의거계획을 세웠으니 그것은 일본군을 살해하고 집단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469)20同志會中央本部,<金而鉉의 手記>(앞의 책), 30∼52쪽.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같은해 8월 8일 김이현·문한우·권혁조·權泰鏞·權重赫·金福顯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문한우·권혁조·권태용·권중혁 등은 체포되어 문한우·권혁조는 징역 5년, 권태용·권중혁은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복역 중 해방을 맞이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470)20同志會中央本部,<金而鉉의 手記>(위의 책), 30∼52쪽.

<金鎬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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