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 (2) 의열단

(2) 의열단

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1925년 상반기까지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에 힘을 쏟았다.481)金榮範,≪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창작과비평사, 1997), 141쪽.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金元鳳은 여러 단체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482)김희곤,≪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지식산업사, 1995), 250쪽.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그해 겨울에 광주에서 의열단의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를 개최하였다. 吳成倫·金山·柳子明 등이 함께 참석한 이 회의에서 의열단은 장차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483)水野直樹,<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解放運動>(≪朝鮮民族運動史硏究≫6, 1989), 63쪽. 이 결정을 바탕으로 의열단은 1927년 초에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것은 광동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상해와 武昌 및 南昌에 지방집행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다.484)水野直樹, 위의 글, 59쪽에서 재인용.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의열단은 다음해인 1927년 5월에<獨立黨促成運動에 대한 宣言>을 발표하였다.485)朴泰遠,≪若山과 義烈團≫(백양당, 1947), 206쪽. 이것은 이미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이어 1927년 4월에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조직된 직후였다. 이로써 의열단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혁명정당’ 결성이라는 두 가지 활동방향을 정립했다. 그들은 우선 주요 활동지역에서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 무렵부터 김원봉과 김성숙 등이 활동하고 있던 광동에서 김성숙이 주도하여 1927년 5월 8일에 광동촉성회를 조직했다. 또한 당시 무한에도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전개한 ‘反革命淸黨運動’(상해쿠데타)을 피해 모여든 의열단원들이 많았는데, 박건웅을 중심으로 무한촉성회가 조직되었다.486)梶村樹秀,<1940年代 中國の抗日鬪爭>(≪三千里≫31, 1982), 102쪽.

1927년 5월 이후 무한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말에 상해로 돌아온 김원봉은 1928년 늦여름 이래 安光泉을 상해에서 만나 앞서 선언했던 두 가지 활동 방향 가운데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고,487)韓相禱,≪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문학과지성사, 1994), 223쪽. 이와 함께 1928년 말에 들어 의열단을 정당조직체로 그 성격을 전환시켜 나가기에 이르렀다. 의열단이 1926년에 ‘혁명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이래 내용면에 있어 구체적인 변화를 보인 사실은 1928년 10월 4일에 발표한<朝鮮義烈團 제3차 全國代表大會宣言>488)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340∼341쪽. 가운데에서 ‘정당체적 조직’으로의 전환을 암시한 20개항의 정강·정책이었다.489)강만길,≪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和平社, 1991), 37쪽.
의열단의 이념과 정강을 보면, 사회주의 정책을 중점적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928년 10월에 조선의열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통해 발표된 정강의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① 봉건제도 및 일체 반혁명 세력을 삭제하고, 진정한 민주국을 건설함, ② 소수인이 다수인을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조선인 각개의 생활상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립함, ③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함, ④ 농민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가난하여 고생하는 농민에게 토지·가옥·기구 등을 공급함, ⑤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철도·광산·기선·전력·수리·은행 등)은 국가에서 경영함 등이었다.
이는 결국 의열단이 1926년 겨울에 결의한 ‘혁명정당 전환’ 방침을 사실화하면서, 이와 함께 1927년에 표명한 ‘통일적 총지휘기관’의 확립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 달인 11월에 의열단은<창립 9주년을 기념하면서>라는 발표문을 통해 협동전선의 실천적 형태로 ‘통일적 정당’을 제안하였다.490)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02∼104쪽.

상해를 거쳐 북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ML파 간부인 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491)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704쪽. 그러다가 1930년에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무렵,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1929년 봄 이래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492)坪江汕二,≪鮮民族運動秘史≫(東京:日刊勞動通信社, 1959), 65쪽. 그러다가 1931년 9월에 일제의 만주침공을 접하면서 의열단의 중심세력은 남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의열단 활동은 김원봉이 남경에서 군사간부를 양성한 일과 한일래와 박건웅이 중심이 되어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한 일로 나타났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맺어진 인연을 최대한 살려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에<中韓合作에 관한 建議>,<韓國革命의 現狀과 本團의 策略>,<朝鮮義烈團의 政治決意案> 등을 제출하고, 그 결과 장개석의 결재를 얻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었다.493)군사간부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韓相禱, 앞의 책, 255∼296쪽.
金榮範, 앞의 책, 299∼316쪽.
이 학교의 설립목적은 청년간부들에게 항일투쟁정신을 계승시키고 근대적 군사교육을 시켜 한국의 절대독립을 달성하고 중국의 목표인 만주국 탈환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열단은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기까지 3기에 걸쳐 모두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했다.

의열단이 전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되다가 일단 실패한 민족협동전선체 구성에 관한 노력이었다. 1932년 10월 이래로 구체화된 이 활동은 의열단을 비롯하여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신한독립당 등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하고, 뒤이어 11월 10일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494)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473∼474쪽. 이로써 1926년 이후 상해 등 중국본토지역에서 추진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한 단계 나아가 장차 ‘대동단결체’를 조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의열단의 위치에서 볼 때, 이러한 결실은 1926년 겨울에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를 위한 전체회의와 1927년 5월에 발표한<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한 선언>등으로 시작하여 1935년 7월 5일에 성립되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연결되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문제와는 관계없이 다른 독립운동정당과 동일한 자격과 위치에서 제 역할을 발휘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