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3) 양대 연합체제와 통합노력
  • (1)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1)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터지자, 한국독립운동계는 정세변화에 적응하면서 돌파구를 찾아 나갔다. 양대 정당체제에서 좌우 세력이 각각 연합체를 결성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파의 연합체가 바로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약칭 光復陣線)였다.

1935년에 민족혁명당으로 결집하고, 임시정부 사수파만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그 한국국민당을 이끄는 김구는 민족혁명당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결성 두 달만에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 출신들이 김원봉의 독점에 반발하여 뛰쳐나와 (재건)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이를 다시 자신의 세력권 속에 포함시키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1937년 4월에 이청천마저 민족혁명당을 이탈하여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게 되자, 김구는 이들 두 세력과 함께 우파 3당 통합을 모색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사수하고 있던 김구가 이들 세력을 통합하는 구체적인 수순 밟기에 들어간 시기가 1937년 중반이었다. 미국의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미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참가하는 통합정당 창출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업을 서두르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7월 7일에 터진 일본군의 중국본토 침략, 즉 중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전시체제에 맞추어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논의하자면, 먼저 통합체를 구성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답이 오기도 전에 그 사정을 8월 2일자 편지로 알렸다.532)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白凡金九全集≫4(1999), 758쪽. 이어서 8월 17일 남경에서 앞의 3개 정당과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북미·멕시코;玄楯)·대한인동지회(李承晩)·대한인단합회(全耕武)·한인애국단(韓始大;미주 대한인애국단)·대한부인애국단(일명 대한인부인구제회;朴信愛)·대한인독립단(일명 대한인독립군)의 6개 단체 등 9개 단체의 연명으로 선언을 발표하고 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533)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59쪽.

광복진선은 성립 선언을 통하여 세 가지 노선을 천명하였다. 하나는 강력한 光復戰線을 건립하고 확대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합작하여 중요 당면 공작을 실행한다는 것이며, 끝으로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는 것이다.534)尹炳奭,<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9∼10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본다면, 민족혁명당 창당으로 대부분이 합류한 뒤 극소수의 잔류자들에 의해 임시정부가 다시 우파 3당의 참여로 다시 활기를 찾는 길이었다. 특히 대당결성을 내다보는 김구로서는 한 단계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광복진선의 이념은 그를 주도하고 있던 한국국민당의 당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 집중할 것”이라 하여 좌우 세력의 연합에는 원칙적으로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과 “임시정부를 옹호·진전시킬 것” 등의 사실을 규정하고 있어서 계급혁명적인 의식과 임시정부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던 朝鮮民族戰線聯盟(약칭 민족전선)과의 합작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광복진선은 중일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강력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을 타도하는 공작을 실행할 것과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해 나갈 것을 방략으로 채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중일전쟁을 한국과 중국 양 민족의 최후결전이라고 인식하면서 “양 민족이 연합하여 항일구국전선에 참여해서 왜적을 섬멸할 것”을 실행목표로 정했다.535)尹炳奭,<韓國光復運動團體對中日戰局宣言>(≪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8쪽. 광복진선은 구체적인 활동방안으로 선전활동과 군사작전계획 수립을 채택했다. 광복진선은 선전활동을 위해 1937년 10월에 선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당면 공작의 방향을 간행물의 발간을 통해 일제의 붕괴과정과 정보를 우방과 약소민족의 혁명동지에게 제공하고 국제공론을 환기하며 일제에 대한 한·중 양국의 설욕으로 잃은 국토를 회복하는 데 두었다.536)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3(1973), 468쪽.

광복진선의 성립과 선전위원회 선전활동에 대한 중국의 반향은 상당히 컸다. 1937년 9월 3일자 중국의 신문에 “한국 각 당이 대연합하여 조국의 회복을 도모한다”라는 표제로 크게 보도하고, 끝으로 “국민당은 혁명영수 김구가 영도하는 유일대당으로, 김구는 1·28(상해사변) 당시 虹口공원사건(윤봉길 의거)의 주모자이다”라고 찬양했다.537)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99쪽. 또한 같은 해 11월 1일자 각 신문은 여기에 호응하여 선전위원회의 내용을 게재했고,538)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00쪽. 11월 6일자≪上海大公報≫에도 그러한 사실을 보도했다.539)趙中孚·張存武·胡春惠 主編,≪近代中韓關係史資料彙編≫四(臺北:國史館, 1987), 436쪽. 광복진선은 중일전쟁을 맞아 군사작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정부의 후퇴에 따라 임시정부도 이동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실천은 다소 연기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廣西省 柳州에서 羅月煥을 대장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540)독립운동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6(1979), 164쪽. 하지만 본격적인 군사활동은 1940년 중경에서 결성된 광복군의 성립까지 기다려만 했다. 비록 군사활동이 본격화되지 못한 단계였으나 광복진선은 결사대 파견을 통한 공작, 무정부주의자와의 연결을 통한 대일 투쟁전개, 중국정부기관의 통신검열 및 상해·홍콩 등지를 통한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541)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14쪽.

광복진선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광복진선이 우파세력인 3당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장차 3당의 합당을 거쳐 좌파의 통합세력인 민족전선과의 합작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둘째 광복진선이 중일전쟁에 대응한 전시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셋째 이것이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강력한 기초조직이며 여당의 기능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광복진선이 이러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한계점도 갖고 있었다. 1919년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국독립운동자들은 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했다. 기다리던 기회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중일전쟁의 발발이었는데,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더구나 중국이 과거와 달리 전면전에 돌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좌우파의 연합이 달성되지 못한 점은 광복진선이 가진 큰 한계임이 분명하다. 특히 한국국민당이 실제로 우파세력을 이끌면서도 당의 통합이 아닌 연합 단계에 머문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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