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4) 1930년대 만주지역 독립군 무장투쟁의 의의

4) 1930년대 만주지역 독립군 무장투쟁의 의의

1930∼1940년대 초반 재만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다른 시기나 다른 지역의 민족해방운동(독립운동)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과 의의가 있다. 그 이유는 운동당사자들이 올바른 정세인식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전망, 장기적 안목과 체계있는 조직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치열하게 일제 및 만주국 관헌 등과 직접 싸웠기 때문이다. 특히 무장투쟁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강대한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매우 실현이 어려운 투쟁방법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 효과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장투쟁은 일제에 대해 무력투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광범한 대중의 참여유도와 지지기반의 구축, 이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정치행위와 정치운동이라는 다양한 성격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총체적 민중운동의 성격과 특징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며, 여러 형태의 민족해방운동방법론 가운데서도 비교적 세련된 형태의 민족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30∼1940년대 초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시기 무장투쟁은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침략이 격화되면서 본격화되었고, 각지에서 봉기한 중국측 무장투쟁 세력과 연대하거나 또는 중국인이 주도하는 조직(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한인들이 참가하여 투쟁하는 특징을 보였다. 즉 한·중 양 민족의 연대에 의한 공동투쟁이 일정하게 실현된 것이다. 이 경우 시행착오도 있었고 갈등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지만, 재만한인들은 중국국민당이나 공산당·코민테른 등과 같은 국제지원 세력과 연대투쟁을 취함으로써 장기간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고 큰 효과를 거두었다.

둘째 한국독립당이나 한국독립군 주도세력은 공산주의계열 투쟁세력과 융화되지 못하고 1930년대 초 중국관내로 이동하고 말았으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세력은 1930년대 중반부터 이념을 달리하는 중국공산당 만주조직과도 일정한 연대를 이룸으로써 항일투쟁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또 중국공산당계열의 동북항일연군(특히 한인의 비중이 큰 1·2군)도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독립’의 원조와 자치구 건설, 국내 유격전쟁수행 등의 임무가 부과되면서 ‘독립군’으로서의 성격과 역할이 강화되었으며, 조선혁명군 등 다른 투쟁세력과 제휴하였다. 즉 이 시기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의 좌·우파는 당시에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효과적 대응을 모색하기 위해 연대와 합작을 실현했다. 따라서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내 한인 세력은 초기의 대립을 극복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체화함으로써 광범위한 투쟁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셋째 이 시기 만주 독립운동 세력은 효과적인 대일투쟁과 재만한인들의 생존도모를 위해 당·정·군의 세 조직체계를 갖추고 역할을 나눔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조선혁명군, 한국독립당과 한족총(자치)연합회·한국독립군, 중국공산당 만주조직과 유격근거지(소비에트·인민정부)·유격대(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등으로 성립한 조직체들은 서로 밀접한 혼연일체를 유지하며 비교적 오랜 기간 민족해방투쟁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직의 분화와 기능분담은 민족운동 세력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가능케 했으며, 또한 광범한 대중의 지원과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을 튼튼히 뒷받침했다.

이 때 성립한 정당조직들은 구체적 강령과 정책을 수립하고 해방 후 독립국가 건설을 구상하는 등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단체들보다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이 조직들은 나름대로 자치권을 행사하는 준통치단체를 통해 상당기간 한인들을 대일항쟁에 결집·동원시키고 이념을 선도했다. 또 자체의 자위무장을 구비한 뒤 일정한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끈질기게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싸울 수 있었다.

넷째 이 시기 만주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중국 관내와 일정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긴밀한 협동전선을 구축하는 한편, 대규모 국내진입작전 및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일제 중추부를 타격하고 국내에 거점을 갖추려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물론 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좌·우파를 막론하고 국내진격을 통한 독립전쟁의 실현, 즉 1910년대 이래 해외 망명지사들이 줄곧 가져온 이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적극 실천한 사실을 의미한다.

조선혁명군의 수십 차례 국내진입전투와 조선혁명군정부의 ‘조선내공작위원회’ 운영,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동흥진입전투와 항일연군 제2군의 ‘조국광복회’ 결성, 보천보전투 등은 바로 그러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1930·1940년대 초 만주 무장투쟁 세력들이 무력항쟁만을 고집하지 않고 국내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항일조직을 결성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일제를 타도하려는 다양한 전술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끝으로 이 시기 만주지역 무장투쟁세력의 투쟁형태를 고찰해 보면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소규모 부대로 각지를 이동하며 적을 타격하는 유격전(비정규전) 방식을 주로 채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재만한인 사회나 중국측 항일의용군 세력이 대규모 병력을 유지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원인이 컸고, 또한 자체 운동역량이 미흡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히 대중을 바탕으로 한 투쟁방식을 고수하여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적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특징을 보이면서 주로 1930년대에 만주지역에서 투쟁한 독립군 등의 무장투쟁은 어떤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을까.

첫째 이 시기 무장투쟁은 1910년대와 20년대 각종 민족해방운동의 역량이 축적·계승·발전되고 그 성과가 바탕이 되어 많은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에, 만주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총결산이라는 의미가 크다. 수많은 독립(민족)운동 조직들이 세 계열의 운동조직으로 정비되면서 진일보한 이념과 다양한 방법론을 갖추고 많은 대중들을 포용하였으며, 중국측 반제·반봉건 투쟁세력 및 조직과 연대함으로써 비교적 장기간의 생존과 항쟁이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경우처럼 10여 년의 오랜 기간을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며 싸웠던 무장투쟁 세력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별로 없다고 판단된다. 물론 재만한인들의 이러한 고난에 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 초를 고비로 만주지역 무장투쟁은 쇠퇴하고 말았지만, 일제와 그 추종세력에 주었던 충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 재만한인들의 투쟁역량은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일·만군과 관헌 등을 살상하고 일제의 만주(중국동북) 통치를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강대한 일본 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을 부분적으로 만주지역에 묶어둠으로써 일제의 중국관내 침략을 일정하게 견제하는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만주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우리 나라 근대사(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중국근현대사의 한 범주로 인정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이 시기 재만한인들의 중국인과의 연대투쟁을 확대 해석하면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동아시아 피압박민족 반제연합투쟁의 한 사례이며,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전후 격화되던 세계 피압박민족 반파시즘투쟁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은 우리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시야에서 볼 때도 상당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넷째 한국독립당·군이나 조선혁명당·군에서 활동하던 일부 인사들이 중국관내로 이동하여 크게 활동했기 때문에 관내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공헌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이청천·조경한·김학규·유동열·최동오 등 상당수 인사들은 관내로 진출하여 통일전선조직을 표방하며 형성된 ‘민족혁명당’에 참가했고, 이들이 후일 임시정부나 광복군에 합류하여 만주 독립군의 이념과 인맥, 무장투쟁론 등이 일부 계승되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투쟁하던 일부 한인들도 조국독립이란 사명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향’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0년대 전반기 연해주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는데, 이들이 해방 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북한으로 진주한 뒤 북한정권의 핵심부를 이루었다. 따라서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은 한국현대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1930년대 이후 재만한인들의 투쟁은 중국 동북의 상당수 중국인 대중을 각성시켜 항일투쟁을 고양시켰으며, 국내진입작전 역시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시달리던 대중들을 자극하여 한반도 북부의 민족해방운동을 격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이 시기 재만한인들의 투쟁은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물리치고 그곳을 장악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인 대중의 중국공산당 등 관련단체 참가, 항일유격대 및 근거지, 準자치조직의 경험과 치열한 무장투쟁의 경험 등이 중국공산당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던 것이다. 또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은 해방 후 연변지역에 수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 탄생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곧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제기한 ‘민족자치’의 원칙과 그 실현이 한인들의 ‘혁명전통(항일투쟁과 중국공산당 참여)’과 결합되면서 일정한 자치조직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1930∼1940년대 초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1910∼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을 심화·발전시킨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精華 및 최고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일부 독립군 참가자들과 동북항일연군 잔여세력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1940년대 초반까지 완강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대중조직과도 연대함으로써 주목되는 업적을 남겼다. 만주지역의 한인 독립군들의 최후 항쟁과 대중조직의 결성은 자유와 민주·정의·평등과 같은 인류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일련의 투쟁이었다. 때문에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민족 나름의 특수성을 갖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민족에게 은연중 퍼져있는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적 인식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는 우리의 자존심과 정체성의 상징이며, 동시에 우리민족이 8·15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하는 유력한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張世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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