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 (2) 1930년대 북미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가. 국민회의 침체와 한인공동회의 설립

북미 한인사회 최대 단체인 국민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3월 하와이 국민회가 임시정부의<교민단령>에 의거 대한인교민단으로 재편되어 중앙총회에서 떨어져나가자 국민회는 북미지역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재편 후 국민회는 이승만과 같은 뚜렷한 지도인물이 없는 데다 1929년 10월부터 시작한 경제대공황으로 재정수입이 급격히 감소하는 등 크게 위축되어 자체 유지도 어려울 정도였다.

국민회가 침체에 빠지고 대공황으로 경제상 어려운 상태에 빠졌지만 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재미한인들에게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단체설립에 영향을 준 것은 국내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 소식이었다. 이 소식이 미주에 퍼지자 국내학생운동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1930년 1월 27일 뉴욕(New York)의 한인공동회를 비롯하여 시카고(Chicago)한인공동회(1930. 2. 3), 나성(Los Angeles)한인공동회(1930. 2. 9), 디트로이트(Detroit)한인공동회(1930. 2), 중가주한인공동회(1930. 3. 8)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이들 한인공동회는 모두 독자적인 활동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국내 혁명운동에 대한 후원과 선전활동을 위해 동일한 보조를 취하자는 뉴욕 한인공동회의 제의를 받아들여 1930년 3월 연합을 꾀하였다. 그 결과 각지의 한인공동회는 뉴욕에 한인공동회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 허정, 서기 오천석을 선임하였다.814)≪新韓民報≫, 1931년 2월 5일,<공동회 중앙위원회 사업에 관하여 해외동포 제위에게 고함>.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지난 1년간의 사업성적을 보면 ① 영문책자≪Korea Must Be Free≫10,000여 권을 발간하여 미국의 각지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보낸 일, ② 학생회를 도와 학생영문보의 출판과 미국 각지에 배포한 일, ③ 미국의 언론과 접촉하여 국내 학생들의 항일운동사건을 선전한 일, ④ 자체적으로 통신부를 설치하여 학생운동 및 국내 사정을 설명케 한 일 등이었다. 그러나 1932년 중앙위원회에서 인물난과 비용문제로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공포한 것으로 보아 이후 한인공동회의 연합활동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것 같다. 한인공동회의 조직과 운영이 모두 독자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재미한인사회는 더욱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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