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2) 일본지역 민족운동
  • (3) 1930년대 전반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가. 재일조선인 당재건운동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1929년 이후 변화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변화기의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일본 사회운동 속에서 이중적 임무를 띤 형태와 일본 사회운동과 조직적으로 분리되어 민족주의적 경향을 노정하며 진행된 경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히 일본 사회운동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전개된 경우에서는 국내의 당재건운동과 보조를 함께 하기도 했다.

재일조선인 당재건운동은 노동계급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노동계급사876)자세한 내용은 김인덕,≪식민지시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국학자료원, 1996).는 재일조선인 당재건 조직이다. 조직이 결성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면, 1931년 10월 초 김치정·김두정은 검거선풍을 피해 황학노·함용석과 조선의 노농대중에 대한 계몽적 출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출판사를 결성하기로 하고 같은 달 10월 김치정·김두정·문용하·최두한·함용석·김봉철 등과 창립준비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① 무산자사를 해체하고 새롭게 ‘노동계급사’라는 출판사를 결성하고≪노동계급≫을 발행한다. ② 노동계급사가 결성될 때까지 준비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임시기관으로 임시 상임위원회를 두고 그 책임자를 김치정, 위원을 나머지 출석자로 하며 각자 동지의 획득을 위해 노력한다. ③ 임시 서기국을 설치하여 책임자에 김치정, 국원에 김두정·한봉석으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중순에는 무산자사의 후신인 ‘노동예술사준비회’를 결성했다. 책임자 함용석 중심의 이 조직은 3월 중순 김두정·윤기청·박경호·김치정·문용하 등이 참가하여 ‘노동예술사준비회’는 위원회를 열어 ‘노동예술사’를 ‘노동계급사’로 개칭했다. 무산자사와 마찬가지로 표면상 출판사로 위장한 노동계급사는 별도로 편집부를 두었다.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의 표면조직으로 활동한 노동계급사는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 일본출판부’의 플랙션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 노동계급사의 투쟁목표는 제국의 패권에서 벗어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무산계급의 독재를 경과하여 공산제사회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직은 동경에서 일시적으로 출판활동을 수행했다.

노동계급사는 각 기관이 1주 1회의 모임을 갖고 동지의 획득과 출판 준비, 재정 획득에 노력했다. 특히 취지대로 노동계급사는 출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첫째 김두정이 작성한<창립선언서>를≪노동계급≫창간준비호에 발표했다. 둘째≪노동계급≫창간준비호를 1,000부 인쇄, 납본한 즉시 발매 금지당하지만 계획적으로 조선·일본지역의 배포망을 통해 발송·배포했다. 셋째 일문 선언서와≪노동계급≫임시호 200부를 인쇄하여 일본과 조선 각지에 배송했다. 이와 함께 노동계급사는 유봉섭이 입수한<朝鮮社會運動略史코스>50부를 인쇄하고 일문 선언서를 발행했다.

그런가 하면 1932년 9월 29일 김치정 등 20여 명은 회합에서 당재건 준비의 일부가 완료되었다면서 표면적으로 노동계급사를 해산한 것처럼 위장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의 오르그로 귀국하여 활동하기로 협의했고, 해체를 결의했다.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이 전환되어 가는 시기에 노동계급사의 존재에 대해 김두용·박석정 등은 반대했다. 이들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해체논의 때 해체를 주도하던 사람들로 일본 사회운동단체에 존재의 올바름과 출판사임을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제동맹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단체는 노동계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공산당은 오히려 노동계급사의 해체를 종용했고, 조직 내 간부 사이에서는 해체가 결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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