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
  • 2) 정부 조직의 확대와 개편

2) 정부 조직의 확대와 개편

1930년대 중반 이래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에 의해 유지,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김구가 주도하여 결성한 정당이었다. 김구는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하였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의 주도하에 유지, 운영되고 있었다.902)韓詩俊,<후기 임시정부의 위상 강화와 金九>(≪도산사상연구≫4, 도산사상연구회, 1997), 173∼174쪽. 임시정부는 기강에 도착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우익진영 3당의 통합을 추진함과 동시에 정부의 조직과 진용을 확대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정부의 조직과 진용을 확대하는 작업은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 세력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그 동안 임시정부는 한국국민당 주도하에 운영되어 왔다. 1937년 8월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이 임시정부의 옹호, 유지를 전제로 한국국민당과 함께 광복진선으로 연합을 이루었지만,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3당 통합을 추진하면서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의 인사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 인사들의 임시정부 참여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1939년 10월 3일 기강에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12월 5일까지 계속된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대한 보결선거를 실시하고 임기만료된 국무위원을 새로이 선출하였는데,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의 인사들이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에 선출된 것이다.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소집되기 직전까지 임시의정원은 주로 한국국민당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재적의원수는 17명이었다. 헌법에 규정된 의정원 의원수가 57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903)헌법에 규정된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함경도·평안도·중령·아령에서 각각 6인씩, 그리고 강원도·황해도·미주에서 각각 3인씩 선거하도록 되어 있다(韓詩俊 편,≪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 국가보훈처, 1999, 56쪽). 당시 의정원 의원은 3분의 1도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31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모두 18명의 의원을 새로이 선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의 인사들이 의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당시의 재적의원과 補選의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적의원:조완구·조소앙·이시영·조성환·엄항섭·민병길·안공근·안경근·왕중랑·차이석·김붕준·박창세·양 묵·문일민·송병조·이동녕·김 구 보선의원:조시원·홍 진·황학수·안 훈·신 환·이상만·손일민·유동열·최동오·신공제·이복원·방순희·공진원·이흥관·이청천·박찬익·이준식·김학규

재적의원 17명 가운데 조소앙만 한국독립당(재건) 당원이었고, 나머지 의원은 모두 한국국민당 당원이었다. 여기에 조시원·홍진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당원과 최동오·이청천 등 조선혁명당 당원들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이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참여로 임시의정원은 크게 확대되었다. 18명의 의원이 선출됨으로써, 의정원 의원수가 종래 두 배가 넘는 35명이 된 것이다.

국무위원과 정부의 조직에도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 인사들을 선출하였다. 의정원 회의에서는 10월 23일 임기만료된 국무위원을 선임하면서, 국무위원의 수를<임시약헌>에 규정된 최대수 11명으로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의 이동녕·김구·이시영·조성환·송병조·차이석·조완구와 더불어, 한국독립당(재건)의 홍진·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유동열을 각각 국무위원으로 선출한 것이다.904)국회도서관,≪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1974), 249쪽. 이로써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은 3당이 7:2:2의 비율을 이루었다.

국무위원을 선출한 후 정부의 조직도 정비하였다. 선출된 국무위원이 참여한 가운데 10월 25일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새로이 구성한 것이다. 정부의 부서는 내무·외무·군무·참모·법무·재무의 6부를 두기로 하고, 각 부서의 책임자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905)≪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제65호, 1940년 2월 1일(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 3, 1997, 167쪽).

主 席:李東寧 內務長:洪 震, 外務長:趙素昻, 軍務長:李靑天 參謀長:柳東說, 法務長:李始榮, 財務長:金 九, 秘書長:車利錫

주석을 비롯한 6개 부서로 정부조직을 정비한 것이다. 그리고 주석과 각 부서의 책임자는 3당의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주석 이동녕을 비롯하여 이시영·김구·차이석은 한국국민당, 홍진과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재건), 이청천과 유동열은 조선혁명당 소속이었다. 한국국민당 주도하에 운영되던 임시정부가 ‘3당 연립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기강에서 정부조직을 확대 정비한 임시정부는 중경에 정착하면서, 헌법을 개정하였다. 임시정부가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긴 것은 1940년 9월이었다. 중경은 중국 국민당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하고 있던 곳으로, 중일전쟁의 戰區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었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조직을 개편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면서 헌법을 개정하고자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행정부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던 당시에는 중일전쟁이 중국대륙 각지로 확산되어 있었고,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뒤에서 언급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조직체제는 국무위원제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1927년 개정된 헌법에서는 國務委員制를 채택하고 있었다. 국무위원제는 행정수반이 없었다. 국무회의에서 선출하는 主席이 있었으나, 이는 국무위원들이 교대하여 맡는 회의 주관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국무위원회는 의정원에서 결정되는 사항을 집행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의정원에 비해 행정부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일종의 관리정부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906)趙東杰,<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과 이념>(≪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675쪽.

임시정부는 정부의 조직을 행정부가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체제로 개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행정부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내용의<大韓民國臨時約憲改正案>을 마련하여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고, 이 안은 1940년 10월 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되었다.907)≪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1940년 10월 9일, 號外(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趙素昻篇 3, 174쪽).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대한민국임시헌장>이 제정된 이래 5차헌법이었고, 전시체제에 부응하기 위하여 개정된 헌법이었다.

개정된<임시약헌>의 핵심은 종전의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종래 국무위원회에서 선출하여 국무위원이 교대하여 맡았던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거하도록 하였고,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며 국군의 統帥權을 행사하는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하였다.908)韓詩俊 편,≪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국가보훈처, 1999), 65쪽. 주석은 곧 국가 원수와 같은 존재로서, 주석이 정부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김구를 주석으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새로운 중경시대를 열게 되었다. 중경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세력이 통일을 이룬 한국독립당을 기초세력으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정부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헌법개정을 통해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어, 행정부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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