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2.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 2) 중국관내 무장세력의 광복군 편입
  • (2) 조선의용대의 편입

(2) 조선의용대의 편입

전지공작대에 이어 朝鮮義勇隊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한 무장조직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익진영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한 후,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이 연합을 이룬 좌익진영의 연합체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임시정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연맹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던 金元鳳을 비롯하여 그 구성원들은 대부분 義烈團과 黃埔軍官學校를 통해, 가까이는 朝鮮革命幹部學校와 星子軍官學校를 통해 양성된 군사간부들이었다. 민족전선연맹은 이를 기반으로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군사조직으로, 창립 당시 100여 명의 규모였고, 2개 區隊로 편제되었다.936)金榮範,<朝鮮義勇隊 硏究>(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483쪽.

창설 직후부터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제1구대가 중국군 제9전구사령부로 배속된 이래, 제1전구·제5전구 등을 비롯하여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중국 각 戰區에 배속되었다. 중국전선에 배속된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수행하였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대원들은 陣地宣傳과 遊擊宣傳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고, 鄂北會戰을 비롯하여 일본군과 벌어진 각종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조선의용대의 병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중국에 나와 있던 한인청년들이 참가해오기도 하였고, 중국군에 포로된 한적사병들을 인수받아 이들을 훈련시켜 대원으로 편입시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로써 창설 당시 100여 명의 대원이었던 조선의용대는 1940년 2월에 이르러 대원수가 약 330여 명에 달하게 되었고, 조직도 대본부와 2개 구대에서 대본부를 비롯하여 3개 지대로 편성되었다.937)金榮範, 위의 글, 484쪽. 결성 이후 1년여 만에 대원수가 3배 이상 늘어난 무장세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중국군에 배속되어 활동하는 과정에서, 대원들 사이에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전의 승리가 조선민족의 독립과 직결된다는 논리하에 중국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938)金榮範, 위의 글, 477쪽. 그렇지만 독자적인 활동영역이 확보된 것은 아니었고, 중국군에 대한 지원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논의에는 일제가 점령한 지역에 한인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환경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일제가 점령지역에 한인들을 이주시키면서 화북지역 일대에만도 약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939)韓志成,<目前環境與朝鮮義勇隊今後工作方向>(≪朝鮮義勇隊≫제34기, 1940), 2∼4쪽. 이러한 정보에 의해 조선동포가 다수 거주하는 곳으로 진출하여 활동근거지를 마련하고, 거대한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여 활동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대원들 사이의 논의는 화북진출로 모아졌다. 중경에 있던 대본부 인원을 제외한 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이에 동조하였고, 각 전구에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은 화북으로 이동하기 위해 낙양으로 집결하였다. 낙양에 집결한 대원들은 4개 그룹으로 나뉘어 1941년 3월과 5월에 걸쳐 황하를 건넜다. 이들의 화북진출은 극히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중경에 있던 김원봉을 비롯한 대본부 인원과 일선공작원을 제외한 대원 약 80%가 이에 참여하였다.940)李庭植,<韓人共産主義者와 延安>(≪史叢≫8, 1963), 138쪽.

이러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화북진출사건은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원들의 화북진출은 중국 당국에서도 사후에 알았을 정도로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조선의용대를 지원하고 있던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해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자신들이 지원하던 무장세력이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 당국은 한국독립운동 무장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을 보고받은 蔣介石은 1941년 10월 30일 중국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인 何應欽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케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영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941)胡春惠 저, 辛勝夏 역,≪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단국대 출판부, 1979), 147쪽. 화북으로 진출하지 않고 남아있는 조선의용대는 물론이고,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도 장악하라는 명령이었다. 곧바로 광복군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가 내려졌다. 11월 15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관할과 행동을 제한하는<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임시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이로써 중국관내 주요 무장조직인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할을 받게 되었다.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할을 받게 되면서, 이들 양대 무장조직 사이에서는 군사통일이 추진되었다. 군사통일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양대 무장조직을 단일화하려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의용대측에서는 양대 무장조직을 합병하여 朝鮮民族革命軍을 편성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임시정부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942년 4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의용대로 하여금 광복군에 편입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에서는 5월 13일 광복군 부사령직을 증설하고,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을 부사령으로 선임하면서,942)≪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제75호, 1942년 8월 20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에 대한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군사통일 문제가 양측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하자, 중국 군사위원회가 개입하였다. 1942년 5월 15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파견한다는 것과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내용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및 광복군의 개편에 관한 명령을 발동한 것이다.943)<朝鮮義勇隊의 光復軍編入>(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3), 112쪽. 이로써 임시정부의 의도대로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편입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의 명령이 있은 지 두 달 후인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내용의<朝鮮義勇隊改編宣言>을 발표하고, 광복군으로의 편입을 선언한 것이다.944)<朝鮮義勇隊改編宣言>(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3), 523∼525쪽.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함으로써 1941년 1월 무정부주의계열의 전지공작대의 편입과 더불어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모두 광복군으로 군사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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