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3. 민족교육운동의 전개
  • 3) 민중계몽 교육운동
  • (1) 민중교육기관 설립의 배경

(1) 민중교육기관 설립의 배경

 민족운동과정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그리고 민족의 주체로 인식된 것은 3·1운동 이후의 일이였다. 특히 申采浩는 3·1운동을 겪으면서 민족운동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민중을 발견하였다. 신채호는 1923년<조선혁명선언>에서 민족독립의 방법으로서 민중직접혁명을 선언하고 민중에 의한 혁명이 아니고서는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 신채호는 민중을 민족사의 실체적 주체로 인식하면서 민중은 농민·어민·노동자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특히 농민이 민중의 중심임을 강조했다. 일제시대 농민이 전 인구의 9할을 점하였던 점과 3·1운동 이후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대개 개량주의에 매몰된 점을 생각할 때 민중이 민족운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하에서 민중의 실태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소작제도와 경제수탈정책에 의해 생활이 파멸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적 측면에서는 극히 무지몽매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빈곤과 무지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민족운동을 추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중계몽교육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민중의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지적향상을 위해 전개된 운동이었다.

 민중계몽교육운동을 담당한 기관은 서당과 야학이었다. 특히 개량서당과 야간 강습소인 야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더욱이 주간에는 가사와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문맹 성인과 아동들을 위해서는 야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민중교육기관은 비정규의 교육기관이었으나 일제하의 민중에게는 비중이 크고 보편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일제하에서 사립학교들이 가혹한 탄압에 의해 위축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서당교육은 오히려 발전하고 있었다.

 원래 서당은 한문을 배워주고 봉건유교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하는 봉건적인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서당교육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제는 식민지시대 초기에는 서당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는 온존책을 실시하였다가 점차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추진한 주체들은 사립학교의 탄압을 피하면서 일제의 서당 온존책을 역이용하여 서당을 민족교육기관으로 설립·경영하게 되었다. 더욱이 학교 설립 경비와 운영비 등 경제적 측면에서도 서당이 유리하였고 농촌 마을마다 용이하게 설립할 수 있어 교육보급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당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11년부터 1916년에 이르는 6년 사이에 서당의 수는 1만 6,540개로부터 2만 5,486개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에 학생수는 14만 1,504명으로부터 25만 9,531명으로 늘어났다.024)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統計年報≫(1918년). 이것은 같은 기간에 서당수는 1.5배 이상, 학생수는 1.8배 이상 각각 늘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서당의 급격한 성장은 단순히 숫자적인 증가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서당의 반일애국적인 성격의 변화과정을 동반하였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서당들은 대부분이 애국적 지식인들과 민중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비록 서당이라는 명칭이었지만 본질상 정규 사립학교와 다름이 없는 반일민족교육기관의 성격을 갖춘 것들이었다. 이처럼 성격이 개량된 서당을 개량서당이라고 칭하였는데,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변신한 개량서당은 종래의 재래 서당과는 달리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여 근대적인 교육기관과 같이 학년·학기·학급을 구성하고 한문이나 동몽선습 뿐 아니라 일제에 의하여 금지당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 과목을 비롯하여 조선어와 산술 등 청소년들 속에서 반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근대적 지식을 주는 과목들을 교육했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개량서당들은 근대적인 민족교육기관의 한 형태로서 당시 우리 나라의 반일민족교육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025)노영택,<일제하의 서당연구>(≪역사교육≫16), 1974.

 개량서당과 함께 민중교육운동의 핵심이 된 것은 야학이었다.

 이미 한말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야학은 새로운 발전 추세를 보이면서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일제시기 야학은 노동야학을 비롯하여 농민야학·여성야학 등 다양하였다.

 1910년대에 우리 나라에는 전주 제1노동야학, 울산 신화리 노동야학 등 많은 노동야학들이 새로 설립되었으며 이미 한말부터 설립·운영되어 오던 마산 노동야학, 합천 적중 노동야학과 같은 야학들이 더욱 확장되었다.

 마산 노동야학은 1914년 10월에 건평 140㎡에 6개의 교실을 가진 큰 규모의 야학으로 확대되었으며 야학생의 수도 수백 명에 달하였다. 당시 노동야학의 야학생 규모는 보통 수십 명으로부터 수백 명 정도였으며, 전주 제2노동야학과 같이 규모가 큰 노동야학은 200명 이상의 야학생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적지 않은 노동야학들은 그 학제도 정규적인 사립학교의 것을 따랐다.026)박득준, 앞의 책, 223쪽.

 이와 같이 일제시대 민족교육운동은 사립학교 뿐 아니라 서당·야학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이곳에서는 청소년학생들에게 반일애국사상을 심어주며 민족자주의식을 배양하는 것을 교육내용의 기본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민중교육기관이 꾸준히 설립된 역사적 배경은, 첫째로 정규교육기관의 부족, 둘째로는 빈곤한 민중의 취학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즉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등학교도 교육비 부담이 컸으며 아동들도 노동현장이나 가사에 종사해야만 했던 생활상태 그리고 이미 취학의 기회를 상실한 문맹성인들을 위해서는 서당이나 야학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셋째로는 3·1운동 이후 민중의 자각과 교육열이 크게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넷째로는 민족운동전개과정에서 주도세력들이 민중계몽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섯째로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열화같이 전개된 청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형평운동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에 의해 농촌계몽운동·문맹퇴치운동 등 민중계몽 교육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신교·천주교·천도교·불교 등 각 종교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민중계몽에 주력했기 때문이었다.027)노영택,≪일제하 민중교육운동사≫(탐구당, 1979), 189∼190쪽.

 일제 경찰당국도 한국인들이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교육열이 급격히 발흥하였고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는 수용력이 태부족하여 야학과 같은 민중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고 하였다.028)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43쪽.

 ≪동아일보≫는 “금일의 상태하에서는 농촌에 있어서 보통학교의 증설도 필요하지만 서당·강습소·야학 등의 시설도 매우 필요하다. 왜냐하면 1면 1교가 되어도 교통관계로 통학이 불능인 경우가 많고, 경제관계나 학령을 초과한 관계, 학교수용력의 부족때문에 이같은 보조교육기관의 필요를 통감하게 된다”029)≪동아일보≫, 1932년 5월 15일, 社說.고 하였다. 즉 교육시설의 부족, 학령을 초과한 성인, 경제적 빈곤 그리고 통학거리가 먼 농촌의 경우에는 민중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민족실력양성운동이 크게 대두되었다. 특히 중산층의 민족운동지도자들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만 민족독립운동이 효율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민중이 민족의 중심이 됨을 인식하여 민중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3·1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등장된 민중은 스스로 실력을 향상시켜야만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와 사회적 지위향상이 가능하다고 자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민족독립도 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 전반적으로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주요과제는 실력향상이었는데, 이 실력향상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경제자립과 지적 무지몽매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지적·교육적 향상 등 두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든 계층의 사회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시급한 선결과제로 삼았던 것이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민중계몽교육이었다. 특히 농민층·노동자층의 자각이 고양되어 민중의 교육열이 고조되었다. 교육열은 고조되었으나 반면에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인하여 교육시설은 부족하고 의무교육이 실시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의 타개책으로 각종 형태의 민중교육기관 설립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야학·농민야학·여성야학·각종 강습회·개량서당 등 비정규의 민중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미취학 아동은 물론 취학의 기회를 상실한 성인들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교육기관의 설립주체는 각 종교단체와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지방유력자나 부락공동인 경우도 있었다.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 농민들이 부락공동으로 개량서당이나 야학을 설립·운영하였고, 뜻을 가진 지방유력자나 열성적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민중계몽교육에 앞장섰던 것이다.030)노영택,<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국사관논총≫51, 국사편찬위원회, 1994).

 조선농민사를 통해 천도교 농민운동을 주도한 李晟煥은 민족운동이나 실력운동 혹은 사회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나 크게 성공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였는바, 결국 농민의 의식화와 각성없이는 아무 것도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농민계몽교육 즉 문맹퇴치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성환은 1927년 교육주간을 맞아 문맹퇴치운동이 고조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대중에 대한 문맹퇴치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였다.031)≪朝鮮思想通信≫, 1927년 12월 22일.

 1927년 함흥지방의 농민교육자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조선농민사의 한장경도 “오랫동안 남에게 속아 살고 눌려 오던 농민대중은 이제야 눈을 뜨고 살길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첫걸음으로 문맹퇴치의 필요를 느끼고 야학을 세우게 되었다”032)≪조선농민≫, 1927년 12월호.고 하였다.

 조선농민사는 1928년 1월호의<社告>에서 “농민의 문맹퇴치에 일층 더 주력하기로 함”이라고 하였다.

 김도현은 “간단하게 말하면 농촌계몽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것이다. 글자 모르는 농민에게 먼저 우리의 피와 살인 알기 쉬운 우리 글을 배워주어서 한사람도 글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033)≪조선농민≫, 1929년 3월호.라고 하였다.

 조선농민사는 “이 시대는 민중의 시대이다. 우리 조선 민중도 이 길에 함께 나서자면 먼저 문자를 알아야 한다. 문자 모르는 사람은 장님과 일반이다”034)≪조선농민≫, 1930년 1월호.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力을 양하자. 오직 력이다. 력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고 또 배우자. 신조선 건설의 기초공사는 노동자와 농민의 문맹을 퇴치함에 있다”035)≪조선농민≫, 1930년 5월호, 농민독본 선전문.고 하였다.

 김병순은 “농민들이 그 생을 보지하며 그 명을 유신케 함에 당하여 지식을 계발치 아니하고 활로는 타개될 수 없는 것이니 문맹지옥의 타파는 얼마나 중대성을 가지고 있는 가”036)≪농민≫, 1933년 11월호.하고 부르짖었다.

 천도교 농민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농민이 무지몽매한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성취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시급한 선결과제는 이들의 문맹을 타파하여야 그들의 의식화와 각성이 가능하고 그때 가서야 농민운동이니 지위향상이니 하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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