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1. 일제의 언론정책
  • 2) 사전탄압과 사후탄압

2) 사전탄압과 사후탄압

 신문에 대한 탄압과 통제는 크게 2단계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문을 제작하기 전 단계의 ‘사전탄압’과 제작된 신문에 대한 ‘사후탄압’이 그것이다. 사후탄압은 다시 ‘行政處分’과 ‘司法處分’이 있었다.

 ‘행정처분’이란 기사를 삭제하거나 또는 신문의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신문을 압수하는 처벌이다. 이에 비해 ‘사법처분’은 문제가 되는 기사의 집필자와 제작 책임자에게 벌금 또는 체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안인 경우는 행정처분과 함께 언론인을 처벌하는 사법처분을 병합하는 것이 통례였다.

 신문과 언론인에 대한 처벌인 사법처분과 신문기사의 압수 등 행정처분의 처벌을 가한 법적 근거로는 光武<신문지법>(1907. 7)을 비롯하여<출판법>(1909. 2),<보안법>(1907. 7),<치안유지법>(1925. 4),<제령 제7호>(1919. 4)와 형법의<명예훼손>(제320조) 등 여러 가지 법률을 적용하였다. 사법처분과 함께 매일 발행되는 신문을 검열하여 제작된 신문의 기사를 삭제하고 신문을 압수하거나 정간(발행정지), 폐간(발행금지)과 같은 행정처분을 자행하는 일상적인 탄압도 빈번하였다.053)정진석 편,≪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Ⅰ·Ⅱ(LG상남언론재단, 1998).
―――,<일제의 민족지 압수기사연구>(≪한국근대언론과 민족운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58∼209쪽.
언론탄압의 형태를 도식화해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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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언론 탄압
일제의 언론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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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언론탄압은 한국인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일본 안에서도 “발매 반포금지를 주로 한 형식의 검열제도는 외국에서도 전혀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054)奧平康弘,<檢閱制度>(≪講座 近代 日本法 發達史≫11, 1967), 6쪽. 그러나 식민지 한국에서의 언론 탄압은 일본에 비해서 훨씬 더 嚴酷하였고 한국 안에서도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에 비해서 가혹한 차별적 법률을 적용하는 정책으로 억압하였다.

 일제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에게 각기 다른 두 가지 종류의 법률을 적용하는 차별정책을 썼다.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계속출판물)에 대해서는 광무<신문지법>을 적용하고 단행본(보통출판물)에 대해서는<출판법>을 적용하였으나 일인들에게는<신문지규칙>과<출판규칙>을 적용하였다.

 <신문지법>은 1907년 7월 24일에 李完用 내각이 법률 제1호로 제정 공포한 것인데 신문·잡지 등 정기간행물에 적용되었던 법률로서 흔히 광무<신문지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법은 처음 공포될 당시에는 전문이 38조였으나 이듬해인 1908년 4월 20일에 개정하여 전문 41조와 부칙으로 되었는데, 갖가지 금지사항을 나열한 외에도 이 법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삭제·압수·발행정지(정간)·발행금지(폐간) 등의 행정처분과 병행하여 언론인에 대한 사법처분을 가할 수 있도록 된 악법이었다. 한국인들은 신문을 발행하려면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하는 ‘許可制’를 채택하여 발행허가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발행이 허가된 신문이라도 ‘保證金’을 납부하도록 하여 재정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등으로 신문발행을 어렵게 만들어 두었다.<신문지법>은 신문만이 아니라 잡지를 포함한 정기간행물을 규제하기 위한 법률이었으므로 한국인들은 신문과 잡지를 통틀어 원칙상으로는<신문지법>에 의한 허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신문지법>에 의한 정기간행물은<출판법>에 의한 간행물에 비하면 다소 편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는 이를 허가해 주지 않기 위해서<출판법>에 의해 잡지 발행을 허용하는 변칙적인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정기간행물이 아닌 일반 출판물(단행본)은<출판법>의 적용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1909년 2월 23일에 공포된 이 법은 전문 18조로, 조판하기 전에 원고를 사전에 검열한 다음에 인쇄한 출판물을 배포하기 전에 다시 ‘納本檢閱’을 받도록 의무규정으로 두고 있어서 2중의 통제장치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적용했던<신문지규칙>(통감부령 제12호, 1908년 4월 30일 공포)과<출판규칙>(통감부령 제20호, 1910년 5월 20일 공포)은 한국인에 비해서 규제가 훨씬 완화된 법률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적용한<신문지법>은 정기간행물의 발행을 ‘허가제’로 묶어둔 반면에 일본인들에게 적용한<신문지규칙>은 ‘屆出’만 하면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 안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적용했던 것이다.

 일제는 근본적으로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허가’ 자체를 극도로 제한하여 한일합방 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은 한국인에게 단 한 건의 신문 발행도 허가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신문지법>에 의해 발행된 한국어 일간지는 합방 전에 발행허가를 받은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와 경남 진주에서 발행되던≪경남일보≫가 1914년경까지 발행되었다. 그밖에 종교 월간잡지≪天道敎會月報≫와 의약 전문지인≪中外醫藥申報≫(월간)가<신문지법>에 의한 정기간행물이었다. 이와 같이 무단정치 기간에 한국어로 발행되는 정기간행물은 몇 종의 잡지와 미국인 선교사들의 명의로 발행하는 주간 종교신문≪基督申報≫(1915년 12월 8일 창간)만이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1919년 이전까지 서울과 지방을 합쳐서 26개의 신문 또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鄭晉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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