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3. 문화정치기의 언론
  • 2) 상해의≪독립신문≫

2) 상해의≪독립신문≫

 ≪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20일 전인 8월 21일에 李光洙를 사장으로 창간되었다. 국내에는 아직 민간신문 발행이 허가되기 전이었는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을 고취하면서 상해를 비롯하여 국내와 중국·만주·러시아·미주지역에 걸쳐서 널리 배포되었다.

 ≪독립신문≫을 국내에 배포하거나 열람하다가 일경에 체포 투옥된 사람도 많았지만, 신문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활동을 벌인 사람도 있었다. 어려운 망명생활 가운데서도 여러 사람들이 내 놓는 성금으로 신문은 몇 번이나 끊어질 듯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6년에 걸쳐 발행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정책을 선전하고 도우며 독립군의 단결에 힘쓰고 밖으로는 세계에 우리 사업을 선전하여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079)≪독립신문≫, 1922년 6월 3일,<獨立新聞과 獨立運動>.

 이 신문은 1919년 8월부터 1925년 11월 종간될 때까지의 기간을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장 이광수와 영업부장 李英烈이 주도했던 시기로 창간으로부터 1921년 6월까지이다. 두 번째는 金希山(본명 金承學)이 운영했던 시기로 1921년 10월부터 1924년 12월까지이며, 마지막으로는 1925년 1월 무렵부터 이해 11월까지 朴殷植이 사장이었던 시기이다.

 창간 당시의 사장은 이광수였으나 창간 과정에서부터 이 신문의 실질적인 구심점은 安昌浩였다. 안창호는 창간을 발의하고 미국에서 자금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안창호는 통합된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이라는 지위였으나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중심인물이었다. 사장 이광수와 출판부장 朱耀翰은 안창호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이면서 흥사단 단원이었다.080)정진석, 앞의 책(2001b), 278∼333쪽. 이 시기는 논조에 있어서도 안창호의 영향이 컸다. 독립운동의 방략과 임시정부의 통합운동 등에 관해서 안창호의 노선을 대변했다. 이광수가 썼다는<국민개업>(1921. 4. 2)이나 1920년 6월에 게재된 연재논설<赤手空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 방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081)주요한,≪島山 安昌浩傳≫(三中堂, 1975), 132쪽 이하 참조.≪독립신문≫은 일반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알려져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기관지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관지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임정과 여러 면에서 밀접한 연관성은 있지만 독자적인 언론기관으로 운영된 측면도 크기 때문이다.

 이광수에 이어≪독립신문≫의 경영을 맡았던 김승학은 원래 만주지방의 독립군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만주지방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 조직 또는 개인적인 후원자가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 사장 박은식이 취임했을 때에는 경영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곧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악화된 신문의 경영을 회복시키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상황이 침체기에 들어섰고 국제 및 국내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신문을 유지해 나가기도 어려워졌다.

 이 신문 발간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헌신했지만, 이국 땅에서 탄압 받는 가운데 재정적 궁핍을 참으면서 6년 이상이나 신문을 이끌어 왔던 원동력이 된 것은 해외와 국내에 있는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따라서 이 신문을 단순히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보는 것은 정확한 성격 규정이라 할 수 없으며, 어느 개인이나 어느 독립운동 계보의 기관지는 더구나 아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