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3. 문화정치기의 언론
  • 3) 3대 민간신문의 창간
  • (1)≪조선일보≫

(1)≪조선일보≫

 1920년 3월 5일 ‘신문명 진보의 주의’를 선언하면서 서울 관철동 249번지에서 창간되었다.≪조선일보≫의 발기인은 금융인·자선사업가·변호사·의사·교육가·일반실업인 등 39명으로 자본금 20만 원 규모의 ‘조선일보설립 발기인조합’을 조직하여 창간준비가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11명이 친일 경제단체 大正實業親睦會 소속이었다. 사장 趙鎭泰(천일은행 두취), 발행인 겸 부사장 芮宗錫, 편집국장 崔 岡이 대정실업친목회 회원이었으나 자본금 20만 원 가운데 실제로 불입한 금액은 5만 원에 지나지 않았고, 경영은 순탄치 못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인쇄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3월 5일에 창간호를 내놓은 뒤 5월 9일까지 겨우 제5호를 발간한 다음에야 정상적으로 발행할 수가 있었다. 6월 12일에는 사장 조진태와 부사장 예종석이 물러나고 편집국장 최 강이 발행인을 겸하였다가 창간 5개월만인 8월 12일부터는 대정실업친목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주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082)≪조선일보 80년사≫(조선일보사, 2000), 102쪽. 이리하여 8월 15일자로 劉文煥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2월 2일에 또다시 발행인이 바뀌어 權丙夏가 뒤를 이었다. 1921년 4월 8일에는 宋秉畯에게 판권이 넘어가면서 사장은 南宮薰, 편집국장은 鮮于日이 맡았다.

 1924년 9월에는 申錫雨가 송병준으로부터 8만 5천 원을 주고 경영권을 인수하여≪조선일보≫의 판권은 이때부터 완전히 민족진영으로 넘어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신석우는 발행인 겸 부사장이 되고 민중의 지도자로 명망이 높던 月南 李商在를 사장에 추대하였다. 이사진으로는 安在鴻·백계현·白寬洙·李相協·최익선·金東成·愼九範 등이 취임하고 편집진도 크게 보강 정비하는 동시에 ‘조선민중의 신문’이라는 새로운 표어 아래 경영·제작 양면에서 혁신을 단행하여 일신된 모습을 보였다.

 이때의 혁신은≪동아일보≫의 창간 실무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李相協이 同社의 내분으로≪동아일보≫를 떠나면서 여러 명의 기자들을 이끌고≪조선일보≫로 와서 지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혁신≪조선일보≫의 제작진으로는 편집국장 閔泰瑗을 필두로, 논설위원 안재홍·金俊淵·辛日鎔, 편집부에 이송은·이상길·손영주, 사회부에 金炯元·김달진·朴憲永·林元根·金丹冶·鄭寅翼, 지방부에 洪悳裕·洪南杓, 공장장 최익선 등이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자들도 끼어 있었다.

 이상재가 사장에 취임한 후에≪조선일보≫는 다양한 사업을 새로 선보였다. 11월 23일부터는 민간신문 최초로 조석간을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민간지로는 첫 여기자 崔恩喜를 채용했고, 12월에는≪조선일보≫본사와 관철동의 우미관 사이를 연결하는 라디오 공개방송을 실시하였다. 국내에서 정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처음으로 공개 시험방송을 실시한 것이다. 일본에서 도입한 윤전기를 이용하여 컬러 인쇄를 선보인 것은 이듬해 2월 12일이었다. 1925년 2월 21일에는 김준연을 러시아에 특파하여<勞農 러시아의 觀相>을 40여 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총망라한 항일민족 단일전선 新幹會가 결성되었는데, 1932년에 이 단체가 해산될 때까지≪조선일보≫는 신간회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맡아 이를 바탕으로 6개 악법철폐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의 회장에는 사장 이상재가 추대되었고 부사장 신석우, 주필 안재홍 등이 신간회를 주도한 사람들이었다. 전국 1백 38개 신간회 지사도 대부분≪조선일보≫지국이 겸했으며 사원 가운데도 회원이 많았다. 1927년 3월 29일 이상재가 사망한 후에는 신석우가 사장에 취임하여 1931년 5월까지 재임한 뒤에 퇴임하자 부사장 안재홍이 후임 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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