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3. 문화정치기의 언론
  • 5) 일제의 언론탄압
  • (1) 행정처분

(1) 행정처분

 일제통치 기간 중에≪조선일보≫와≪동아일보≫는 각각 4회씩,≪중외일보≫도 1회의 발행정지(정간) 처분을 받았는데 1925년 이전까지는 행정처분에만 그쳤으나, 그 이후부터는 행정처분과 사법처분을 병행하는 2중의 탄압을 받았다.

 총독부는≪조선일보≫와≪동아일보≫가 창간된 직후부터 압수와 정간의 탄압을 자행하였다. 언론탄압은 신문 또는 잡지를 발행하기 전 단계부터 실시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문이 발행되기 전에 통제를 가하는 ‘사전탄압’은 ①간담, ②주의, ③경고, ④금지의 4단계가 있는데, 그 가운데 앞의 3단계는 법규에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마지막 단계인 금지는<신문지법>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광무<신문지법>은 제11조에서 15조까지 보도의 금지사항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거나 국제 교의를 저해하는 사항, 관청의 기밀 문서 등은 보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내용은 ‘금지’를 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규에 없는 간담·주의·경고도 실질적으로는 법에 의한 규제와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작된 신문에 대한 행정처분인 ‘사후탄압’은 4단계가 있었다. 가장 가벼운 ①삭제로부터, ②발매금지, ③압수, 그리고 ④발행정지(정간), ⑤발행금지(폐간)의 단계로 탄압의 강도가 높아진다.090)정진석 편,≪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Ⅰ·Ⅱ(LG상남언론재단, 1998), 6∼20쪽.
―――,<일제의 민족지 압수기사 연구>(≪한국 근대언론과 민족운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58∼209쪽.
총독부는 신문 검열을 위한 업무내규로 ‘검열표준’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 내규는 다시 ‘일반 검열’과 ‘특수 검열’로 대별하여, 일반 검열은 ‘안녕 질서 방해사항’과 ‘풍속 괴란의 사항’으로 나누어 모두 44개 항으로 세분되어 있었다.091)朝鮮總督府 警務局圖書課,≪朝鮮出版警察槪要≫(1936년판), 76∼80쪽.
朝鮮總督府 警務局圖書課,≪朝鮮出版警察槪要≫(1937년판), 80∼84쪽.
朝鮮總督府 警務局圖書課,≪朝鮮出版警察槪要≫(1939년판), 69∼74쪽.
총독부가 검열에서 압수한 기사를 분류한<조선문 간행물 행정처분 例>라는 자료를 보면 행정처분을 내린 이유를 19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092)朝鮮總督府 警務局圖書課,≪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1930년판), 85∼131쪽.
정진석 편, 앞의 책(1998), 33∼75쪽.

 언론 검열의 법적인 근거는 악명 높은 광무<신문지법>이었다. 이 법 제10조는 “신문지는 매회 발행에 豫先 내부 및 그 관할관청에 각 2부를 납부함이 가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문을 발행하기 전에 미리 관할관청에서 검열을 실시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다. 이와 함께 “신문지가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 하는 자로 認하는 시는 그 발매 반포를 금지하야 此를 압수하며 또는 발행을 정지 혹 금지함을 득함(제21조)”이라 하여 신문과 잡지의 발매 금지·압수·정간에서 폐간에 이르는 탄압을 자행할 수 있는 포괄적인 조항이 들어 있었다. 설사 이같은 조항이 없었다하더라도 일제의 언론탄압에 민간지가 저항할 힘은 없었다.

 신문·잡지·출판물의 허가와 통제를 담당한 부서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였다. 도서과에는 검열 업무를 담당하는 상설 기구인 檢閱係가 있었다. 경무국 도서과에서 4단계에 걸친 사전 통제를 가한 이유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①치안 방해, ②수사상의 필요, ③풍속 괴란, ④군사 관계, ⑤기타 등이다.

 ≪조선일보≫는 창간 후 겨우 제4호를 발행했던 4월 28일자에 영친왕과 일본 왕족 方子의 강압적인 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가 압수당한 것을 시초로 그 후로도 빈번한 압수와 삭제를 당하다가 마침내 1920년 8월 27일자 사설<自然의 化>가 문제되어 민간신문발행 이후 최초로 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했다. 문제가 된 논설은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 일행이 우리 나라를 방문한 기회를 타서 평양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민심이 격앙하여 경찰과 충돌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을 문제삼아 발매금지 및 압수처분과 함께<신문지법>21조를 적용하여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1주일간 ‘유기한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그러나≪조선일보≫는 1차 정간이 끝난 후 곧바로 2차 정간으로 이어지는 탄압을 당하였다. 1주일간의 정간이 해제된 지 3일째인 9월 5일, 지령 제116호에 실린<우열한 총독부 당국자는 何故로 우리 일보를 정간식혔나뇨, 천하의 동정이 吾社에 폭주함>이라는 사설이 또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사설은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있는 총독부가≪조선일보≫에 탄압을 가함으로써 정책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통렬히 비난한 내용이었다. 총독부는 이에 대해 이 날짜로 즉시 ‘무기한 발행정지’(무기정간) 처분의 탄압을 가했다. 총독부는 정간 62일 만인 11월 5일에 발행정지 처분을 해제했으나, 잇따른 탄압과 창간 초부터 닥쳤던 경영난으로 즉시 속간을 못하고 정간 111일 만인 12월 24일에야 속간호를 내놓았다.

 ≪동아일보≫는 창간 2주일만인 4월 15일자에 실린<평양에서의 만세소요>가 압수당한 것을 시초로 빈번한 압수 또는 삭제를 당하다가,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祭祀문제를 再論하노라>가 문제가 되어 제1차 정간처분을 당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인들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구슬-칼의 이른바 3종의 神器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8월 30일부터 9월 25일까지 연재했던<大英과 印度>라는 기사도 영국의 인도에 대한 악정을 논하면서 이를 조선과 대조하려 하였으며 그밖에 여러 기사가 총독정치를 불신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정간처분의 이유였다.

 이 정간은 해를 넘겨 1921년 1월 10일에 해제가 되었으나 즉시 속간하지 못하고 40일 후인 2월 21일이 되어서야 다시 발행하기 시작했다. 정간 중에는 張德俊 기자가 일본군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무렵 간도 일대에서는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6월에 있었던 홍범도 부대의 봉오동전투, 9월 김좌진 부대의 청산리전투 등에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자,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10월부터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들을 무차별로 학살하여 많은 피살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 장덕준 기자는 신문이 정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훈춘으로 달려가 현지에서 제1신을 보낸 후 일본군에게 붙들려 간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는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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