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4. 1930년대의 언론
  • 1) 논조의 위축과 사세의 신장

1) 논조의 위축과 사세의 신장

 1930년대의 언론은 논조가 위축되다가 점차 친일적인 지면으로 바뀌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일본 군부의 파쇼통치로 일본 국내에서조차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소멸되게 만들었다. 언론이 국가적인 통제하에 놓인 상황에서 한국의 민간신문이 항일 논조를 지속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시기였다. 언론이 일본 군부 파쇼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주된 외적인 이유였지만, 국내에서도 일제의 오랜 식민지 통치의 결과로 민족 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를 보이고 있었던 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항일논조가 둔화되는 대신, 신문이 상업화를 추구하면서 20년대까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지해 보려고 애썼던 민족주의적인 태도가 퇴색하였다. 그러나 경영상태는 2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전되었다. 민간 3대 신문이 상업지적인 경쟁을 벌이면서 수익증대를 위한 광고수주에 열을 올리고 월간 잡지를 새로 창간하는 등으로 사세를 확장한 결과였다.

 ≪조선일보≫는 창간이래 1920년대에는 경영진이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30년대 초 방응모가 신문을 인수한 뒤에는 경영이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 6월 15일 曺晩植이 사장에 취임했는데 이때 方應謨·趙炳玉·朱耀翰 등이 입사하여 경영난 타개를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1933년 1월에 방응모가 주식회사 조선일보사의 창립을 발기하고 3월 22일자로 경영권을 인수하여 이해 9월까지 50만 원의 주식회사 법인등기를 마침으로써 창간 이래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소하고 안정된 재정적 기반 위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방응모는 1935년 1월 ‘살무손’ 비행기를 최초로 도입하여 취재와 신문공수에 활용하고, 6월에는 태평로 사옥을 신축했다. 또한 호외를 자주 발행하자 다른 신문들도 이에 대응하여 민간지간의 속보경쟁이 치열해졌다.

 ≪중외일보≫가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폐간된 다음에 그 시설과 사원을 인수하여 1932년 11월 27일자로 창간된 신문이≪중앙일보≫였다.≪중앙일보≫는≪중외일보≫의 지령을 계승하고 盧正一을 사장으로 “대중의 신문, 여론의 지침, 신속보도, 엄정중립”의 사시를 내걸고 출발했으나 역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한 채 불과 5개월 만인 이듬해 5월 5일 자진하여 휴간에 들어갔다가 10월 31일에 속간했다. 3개월 후인 1933년 2월 16일에는 呂運亨이 사장에 취임하여 3월 7일부터 제호를≪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독립운동가로 사회적 명망이 높았던 여운형은 신문 경영의 수완을 발휘하여 신문의 사세를 키워나갔다. 6월 27일에는 자본금 30만 원의 주식회사로 만들고, 7월 1일부터 지면을 늘려 종래 4면이던 신문을 6면으로 발행하다가 7월 15일부터는 조석간 4면씩 하루 8면으로 늘렸다. 여운형이 경영을 맡은 이후로 차츰 재정적 기초가 확립되어 갔지만 아직껏 수지를 맞출 형편은 되지 못했고, 재정난이 심화되자 전무 겸 편집국장이었던 윤희중이 私財 2만여 원을 들여와서 국면을 미봉하면서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에 윤희중과 인척관계에 있던 東一銀行 전무 成樂憲을 끌어들여 1936년 2월 23일에는 자본금 20만 원을 증자하여 기존의 자본금 30만 원에 보태어 자본금의 총액이 50만 원으로 늘었다. 당시≪조선일보≫는 방응모가 인수하면서 자본금 50만 원을 전액 불입하였고,≪동아일보≫는 75만 원의 자본금이라 하였으나 실지 불입금은 45만 원이었으므로≪조선중앙≫도 자본금이≪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같은 규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증자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장기휴간인 때여서 신문 속간에 오히려 장애요인이 되었다. 자본의 구성이≪동아일보≫와≪조선일보≫처럼 단순하지를 못하고 양대 세력이 주식을 배분한 형세였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따져 社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증자가 이루어진 다음에 취체역 사장 여운형, 전무 취체역 윤희중, 고문 權東鎭·尹致昊, 편집국장 李寬求, 경리국장 金世鎬, 공무국장 洪悳裕, 정치부장 裵成龍, 사회부장 朴八陽, 지방부장 林元根, 학예부장 金復鎭으로 새로운 진용을 구성하였다. 7월 1일부터는 조간 4면, 석간 8면으로 하루 지면이 12면에 달하게 되었고 구독료도 월 1원으로 인상했다. 이와 함께 사옥을 증축하고, 윤전기를 늘리는 한편 비행기를 구입하는 등으로 사세 확장을 꾀했다. 구독자도 증가하여 1936년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되기 직전의 발행부수는 3만 2,782부까지 올라가≪동아일보≫의 3만 1,666부보다 앞서게 되었다.093)朝鮮總督府 警務局圖書課,≪朝鮮出版警察槪要≫(1936년판), 27쪽.
정진석,≪한국언론사 연구≫(일조각, 1983), 137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