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4. 1930년대의 언론
  • 2) 잡지 발행 경쟁과 일본제품 광고

2) 잡지 발행 경쟁과 일본제품 광고

 다른 경쟁지에 비해서 경영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동아일보≫의 사세도 1930년대에는 더욱 신장되었다. 30년대 초반부터는 신문사들이 모두 잡지 발행에 열을 올렸는데 처음으로 잡지 발행을 시작한 신문은≪동아일보≫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에 동아일보사에서는≪신동아≫를 창간하여 일제치하의 대표적 월간 종합지로서 이른바 ‘신문잡지’의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어서 여성지≪신가정≫(1933. 1)을 창간하여 성공을 거두면서 일간 신문사들의 잡지 발간을 자극하여 잡지계의 새로운 판도를 형성토록 만들었다. 이때부터 일간 신문들은 다투어 잡지를 발행하였다. 여운형은 1933년 2월≪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한 다음에 이 해 11월 월간 잡지≪중앙≫을, 1935년 1월에는≪소년중앙≫을 창간했다.≪중앙≫은 모체인≪조선중앙일보≫가≪동아일보≫와 함께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하여 정간당했던 1936년 8월까지 35호를 발간하다가 폐간했다.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도 1934년 2월≪월간매신≫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일반에 인기를 끌지 못하였기 때문에 1년 동안 발행된 뒤 1935년 2월≪매일신보≫본지를 조석간 10면으로 증면하면서 발행을 중단하였다.

 ≪조선일보≫는 잡지 발행이 약간 늦어서 1935년 11월에 종합 잡지≪조광≫을 창간했다.≪조광≫은 판형이≪신동아≫에 비해 좀 작은 A5판이기는 했지만 창간호부터 4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으로 발행되어 B5판(4×6배판) 230여 페이지였던≪신동아≫를 위협하려는 기세를 보였고, 이어서 1936년 4월에는≪여성≫을 창간하여≪동아일보≫의≪신동아≫·≪신가정≫과 경쟁을 벌이는 한편≪소년≫(1937. 4)·≪유년≫(1937. 9) 등의 어린이 잡지까지 발행하였다.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들이 나타나면서 잡지의 내용이 질적으로 향상되고 경영면에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전까지는 소규모의 독립된 잡지에서 흔히 있었던 缺刊 또는 합병호가 없어지고 정기적으로 날짜를 맞추어 발행된 것도 달라진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된 잡지사가 발행하는 잡지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이전까지는 소자본으로 운영되던 개인 경영의 잡지 또는 단체가 발행하던 잡지들과는 달리 신문사가 발행하는 잡지들은 풍부한 인력과 취재망, 그리고 광고 선전력을 활용하여 잡지계의 판도를 신문사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민간지들이 20년대와 비교해서 경영면에서 수지를 맞추게 되면서 사세가 신장되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현상만은 아니었다.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식민치하의 조선에는 큰 광고주가 없었기 때문에 민족지를 자처하던 신문들도 1930년대에는 광고수입의 60% 이상을 일본의 광고에 의존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에 일본과 열강세력은 조선에서 여러 가지 이권을 탈취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생산품을 가져다 팔기 위해 조선의 소비시장을 공략하였다. 그들은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충동하는 영업전략과 강력한 무기인 광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영세한 자본에 수공업 수준의 산업체계, 그리고 전근대적인 유통구조였던 조선의 시장은 무방비 상태로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신문들은 일본상품의 시장 침투를 위한 광고매체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민간신문들이 지면을 통해서는 물산장려운동을 펴면서도 일본상품의 판매를 조장하는 광고를 게재하여 민족자본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광고는 신문사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민간지와≪매일신보≫가 다 같이 전체 수입의 30% 이상 또는 40%선까지를 광고료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094)정진석,<광고 사회사>Ⅱ-일제하의 광고(≪광고연구≫, 1991년 가을호), 331∼382쪽. 신문의 경영을 위해서는 광고가 필요하였고, 조선에서는 큰 광고주가 없었기 때문에 신문광고의 일본 대기업 의존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경영주들은 일본 대기업의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과 오사카(大阪)의 광고주들을 접대하고 이들을 조선으로 초청하여 금강산 구경을 시키는 등 적극적인 판촉 활동을 벌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신문이 “地主와 商工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하였다”는 비난까지 듣게 되었다.095)이갑기,<신문기업론>(≪비판≫, 1932년 9월호),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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