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1. 국어학
  • 2) 국어운동의 전개

2) 국어운동의 전개

 일제 강점기의 국학운동은 사실상 민족운동이었고, 국어연구자들과 연구 기관들은 국어·국문의 연구와 보급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어는 민족문화의 핵심이었으므로 국어운동의 영향은 널리 미쳤으며, 동시에 일제에 의한 탄압 또한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120)국어운동의 전반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金允經, 앞의 책, 545∼673쪽.
한글학회, 앞의 책.
李萬烈,<日帝下의 文化運動>(≪韓國現代史의 諸問題≫II, 乙酉文化社, 1987).
이현희,<어문연구와 문자보급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9, 국사편찬위원회, 1991).

 일제 강점하에 있어서 국어운동은 조선어학회가 주도한 한글 맞춤법 제정·표준어 사정·외래어 표기법 제정과 한글날 제정·사전편찬·문자보급 등 여러 형태로 드러났으며, 연구 발표회·강연회·강습회와 함께 신문·잡지와 연계된 농촌계몽운동 등을 통해 문자보급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에서 비롯된 가갸날·한글날의 제정은 본격적인 국어운동의 출발이었다. 즉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주년) 기념식이 국어학자들과 잡지사인 新民社의 공동 주최로 食道園에서 성대히 거행되고, 이 날을 가갸날이라 하여 매년 기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928년부터는 한글날이라 명칭을 바꾸었고, 1932년에는 양력 10월 29일을 기념일로 삼았다가, 1934년부터 양력 10월 28일을 한글날로 기념하였다.121)가갸날이 음력 9월 29일이 된 것은 훈민정음의 반포가 세종 28년(1446년) 9월에 이루어졌으므로, 그 마지막 날로 정한 것이었다. 그것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9일로 하였다가, 다시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것이 10월 28일이었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정해진 것은 1940년≪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어 그 반포가 9월 ‘上澣’이었음이 확인되어 상순의 끝 날인 1446년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결과이다(한글학회, 위의 책, 6∼8쪽).≪동아일보≫와≪조선일보≫등은 이에 적극 동조하였고, 국어에 관한 연구나 질의를 연재하여 일반의 각성을 촉진하였다.

 사전 편찬도 준비되었다.≪조선어사전≫편찬사업은 1911년 崔南善이 경영하던 朝鮮光文會에서 주시경·김두봉·권덕규·이규영 등이 착수하였던 ‘말모이’(辭典)에서 시작되었으나 주시경의 서거와 김두봉의 중국 망명 등으로 마무리짓지 못하였다. 그 후 1927년 박승빈이 주도하던 啓明俱樂部에서 일부 남아 있던 ‘말모이’의 원고를 넘겨받아 다시 林 圭 등이 사전 편찬을 시도하였지만 기초작업의 不備와 재정 관계로 중단되고 말았다. 또 중국에 망명한 김두봉도 사전원고를 작성한 바 있어 이윤재가 그 원고를 국내로 옮겨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국어운동이 본격화되면서, 1929년 한글날(10월 31일) 기념식을 마치고 각계 유지 108명의 발기로≪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편찬회에서는 신명균·이극로·이윤재·李重華·최현배를 집행위원으로 선임하고, 조선어학회 회원과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분담·집필하도록 하였다. 한국인이 만든 한국어 사전이 없음을 한탄한 이들은 서양선교사들이나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사전이 있기는 하나, 그것들은 “언어와 문자에는 아무 합리적 통일이 서지 못한 사전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전 편찬의 취지와 사명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언어 및 문자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을 말미암아 促成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문의 정리와 통일은 제반 문화의 기초를 이루며, 또 인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 금일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捷路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 본디 사전의 직분이 중대하니 만큼, 이의 편찬사업도 그리 용이하지 못하다. 1일이나 1월의 짧은 시일로도 될 수 없는 사업이요, 1인이나 2인의 단독한 능력으로도 도저히 성취할 바가 아니므로, 본회는 인물을 전 민족적으로 망라하고 과거 선배의 업적을 계승하여 혹은 동인의 사업을 인계도 하여 엄정한 과학적 방법으로 언어와 문자를 통일하여서 민족적으로 권위있는 사전을 편성하기로 自期하는 바인즉, 모름지기 江湖의 동지들은 민족적 백년대계에 협력함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金允經,≪朝鮮文字及語學史≫, 548∼550쪽;한글학회,≪한글학회 50년사≫, 263∼265쪽).

 이 취지서는 사전 편찬이 단순한 국어운동이 아니라, 조선 민족 갱생운동의 일환이며 전 민족적 문화역량을 동원하는 일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전 편찬사업은 재정문제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마침 李祐植 등이 소요경비 1만 원을 기부하자, 편찬회는 1936년 3월 19일 그 사업을 조선어학회에 넘기고 해산하였다. 이에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사업을 전담하여 4월 1일부터 편찬 전임집필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정인승·韓 澄·이중화를 선임하고 작업을 추진하였다. 사전편찬은 1939년 연말에 원고가 완성된 전체의 1/3 분량을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출원하여 1940년 3월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42년 봄부터 사전의 조판이 시작되었고, 가을에는 교정지도 200여 쪽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사전편찬 작업은 19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과는 별도로 이보다 일찍, 1938년 7월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원인 文世榮이 朝鮮語辭典刊行會의 명의로≪朝鮮語辭典≫을 간행하였다. 문세영은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발기인이기도 하였는데, 1932년경부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朝鮮語辭典≫을 대본으로 하고 조선어학회의 이윤재·한 징 등의 지도를 받아 사전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 사전은 1,700쪽이 넘는 분량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된 최초의 한국어사전이었다.122)≪朝鮮日報≫, 1938년 7월 12·20일.
한글학회, 위의 책, 262쪽.

 국어운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어보급운동이었다. 특히 신문사 주최의 문자보급운동이 1930년부터 4년간 계속되었다.≪조선일보≫가 1930년에 시작한 이 운동에≪동아일보≫도 그 다음 해에 ‘브·나로드(V. Narod)’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였다.≪동아일보≫의 경우, 가장 규모가 컸던 1932년에는 강습대원 2,724명, 강습지 592개 지역, 수강생 4만 1,153명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매년 7월부터 9월에 걸쳐 개최된 이 강습회는 국내에 그치지 않고, 1934년에는 만주와 일본에서도 있었다. 동아일보사의 경우, 4년간 298일 동안 강습회를 가졌으며, 강습대원이 연 5,751명, 강습지가 1,320개 지역으로 수강생이 총 10만 명에 이르렀다. 교재도 총 210만 부가 배포되었다.123)한글학회, 위의 책, 320∼322쪽.

 이러한 신문사의 문자보급운동에 대하여 조선어학회에서는≪한글공부≫(동아일보사 학생계몽대, 3주간용)나≪한글원본≫(조선일보사 문자보급반, 4주간용)과 같은 교재를 편찬하였고, 또 기독교회의 하기 아동 성경학교용≪초등반 교과서≫(1개월용)도 편찬하였다.

 조선어학회에서도 국어보급을 위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강습회나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매번 30∼40곳에 수천 명이 강습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대중에게 국어의 과학적 가치와 신 철자법 및 문법적 기초지식을 이해시켰던 것이다.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지방순회에 참여한 국어학자로는 이병기·권덕규·이상춘·이윤재·김윤경·신명균·이극로·최현배·김선기·장지영·이희승·李 鉀·李萬珪·金炳濟·李康來 등을 들 수 있다.124)한글학회, 위의 책, 313∼315쪽.

 철자법의 통일에 대해서는 이미 국어학계 전반에서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서도 그 준비에 나선 바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조선어학회에서는 1930년 12월 13일 총회에서 통일된 ‘한글맞춤법’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12인의 제정위원들은 그 이듬해 7월 9일까지 초고 61항목을 다듬었으며, 1932년 12월까지는 91항목의 초안을 작성하여 토의를 계속하였다. 즉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에 발표된≪한글마춤법통일안≫은 만 3년 동안 연인원 1,500명이 참여하여 141차례의 회의를 개최하고 총 428시간을 소요한 뒤에 성안되었던 것이다.125)한글학회, 위의 책, 152∼171쪽.

 ≪한글마춤법통일안≫이 발표되자≪조선일보≫·≪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등 신문은 통일안대로 맞춤법을 채용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출판계에서도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新東亞≫·≪新家庭≫·≪中央≫·≪朝光≫·≪女性≫등 주요 잡지와 단행본들도 새 맞춤법을 따랐다. 인쇄업자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새 철자법의 활자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漢城圖書株式會社·大東印刷株式會社·基督敎 彰文社·朝鮮印刷株式會社 등 널리 알려진 인쇄소들이 새 철자법에 따른 활자를 준비하였고,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는 새 철자법을 다루지 않은 인쇄물은 사절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새 맞춤법 보급을 위해 조선어학회에서는 1935년 10월에 ‘한글마춤법통일안 보급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펴는 한편, 聖書公會와 대한예수회장로교 총회 등 기독교계에 대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개정할 것도 여러 차례 촉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126)朴勝彬이 주도한 조선어학연구회의≪한글마춤법통일안≫의 반대운동에 대해서는 다음 책들이 상세하다.
金允經, 앞의 책, 573∼614쪽 및 한글학회, 위의 책, 179∼189쪽.
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한 일반 문화계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호응하였다.127)金允經, 위의 책, 567∼569쪽.
한글학회, 위의 책, 171∼178쪽.

 맞춤법을 정리한 조선어학회는 국어의 표준어를 사정하고 외래어 표기법도 제정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사전편찬을 위한 전제작업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어학회에서는 1934년 7·8월경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를 구성하여 3년간에 걸쳐 어휘 9,547어 중에서 6,231어의 표준어를 선정하고,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에 발표하였다.128)한글학회, 위의 책, 194∼216쪽.
조선어학회,≪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36.
아울러 조선어학회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연구도 1930년 12월≪한글마춤법통일안≫제정 작업과 같이 시작, 국내외 학술단체와 학자들의 협조를 받아 1938년 가을에 그 원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 원안은 2년간의 시험과 보완을 거쳐 1940년 6월 25일에 확정하였다. 외래어 표기법 제정은 정인섭·이극로·이희승이 책임위원으로 참여하였는데, 조선어학회에서는 1941년 1월 15일에≪外來語表記法統一案≫이란 책자를 간행하고, 그 계몽과 보급에 노력하였다.129)한글학회, 위의 책, 217∼241쪽.
朝鮮語學會,≪外來語表記法統一案≫, 1941.

 그밖에 1934년 10월에 한글날 기념사업으로 이루어진 제1회 조선어학도서전람회가 국어운동과 관련지어 특기할만하다. 이 전람회는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普成專門學校에서 개최되어 1,085명이 관람하였다. 正音類 11점, 諺解類 121점, 譯語類 9점, 字書類 30점을 비롯하여 외국인의 조선어에 관한 저서 27점 등 총 540점이 전시되어, 일반에게 국어학에 관한 큰 자극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130)金允經, 앞의 책, 614∼621쪽.
≪한글≫3-1, 1935.
朝鮮語學會,≪朝鮮語學 圖書展覽會 出品目錄:古書之部≫, 1934.

 일제 강점하에 있어 국어운동은 국어의 학문적 연구와 함께 국어의 계몽 및 보급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국어연구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아래에서 국어를 보존하고 그것을 통일화·세계화하여 국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맹퇴치를 이루는 사회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맞춤법의 통일과 표준어 제정·보급은 언어의 통일과 일체화를 통한 근대사회 형성에도 크게 공헌하였다.131)李萬烈, 앞의 글,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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