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2. 국문학
  • 1) 국학파의 연구

1) 국학파의 연구

 1920·30년대에 활동한 민족주의적 관점의 국문학 연구자, 이른바 국학파로 논의되는 인물은 안 확·정인보·이병기·문일평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의 대개는 전문적인 국문학 연구자라기보다는 국학자로 이름 매겨진다. 실제 이들은 국사학 또는 국어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신채호 같은 이도 국문학에 있어 국학파로 이해된다. 따라서 국학파의 국문학 연구는 실학적인 전통의 영향으로 고증이 무시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에 관련된 근대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이들은 문학연구에 있어 순수학문적인 경향보다도 계몽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1920년대의 국문학 연구는 안 확이 대표하였다.135)안 확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고된다.
崔元識,<安自山의 國學>(≪民族文學의 論理≫, 창작과비평사, 1982).
李泰鎭,<安廓의 生涯와 國學世界>(≪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5).
李基文,<安自山의 國語硏究>(≪周時經學報≫2, 1988).
柳浚弼,<自山 安廓의 國學思想과 文學史觀>(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91).
또한 안 확의 저술과 그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는≪自山安廓國學論著集≫1∼6(驪江出版社, 1994)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된다.
그는 이미 1915년 7월 일본 유학생 잡지인≪學之光≫제6호에<朝鮮의 文學>을 발표하였으며, 1921년에는≪我聲≫에 두 차례에 걸쳐<朝鮮文學史>를 싣고, 1922년에 이르러≪朝鮮文學史≫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따라서 안 확은 최초로 통사적인 체계를 갖추어 근대적인 국문학 연구의 출발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자신도 서문에서 전통시기에는 명문을 모으거나 평한 정도의 저술이 있을 뿐 문학사가 완전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자긍심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조선문학사≫에서 안 확은 한국문학의 출발에 앞서 단군시대의 사상으로 ‘倧’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그가 大倧敎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한국문학을 이해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조선문학사≫의 附編으로<朝鮮人의 民族性>과<朝鮮語原論>을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도 그 관점과 방향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더욱이 그는≪조선문학사≫의 저술동기를 그의 다른 저서≪自覺論≫의 서문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136)安 廓,≪朝鮮文學史≫(韓一書店, 1922), 134∼135쪽. 바꾸어 말하면 안 확에게 있어 문학은 그 자체에 관심이 있던 것만은 아니었고, 민족의 자각운동을 위한 전제였다고 하겠다. 또 그는 한국문학을 上古(소분립시대)·中古(대분립시대)·近古(귀족시대)·近世(독재정치시대)·最近으로 시대구분을 하였는데, 이는 그가 한국정치사를 서술한≪朝鮮文明史≫(滙東書館, 1923)의 시대구분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사의 문학과 정치를 동일한 관점에서 시대구분하였다는 사실은 문학사를 일반사의 종속개념으로 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37)송희복,≪韓國文學史論硏究≫(文藝出版社, 1995), 49쪽. 물론 그 자신은 “문학은 敏活靈妙하게 심적 현상의 전부를 표명함으로 其國民의 진정한 발달 변천을 알게” 하고, “문학사는 일반 역사 더욱 人文史의 중요되는 일부로 볼뿐 아니라 翻하야 諸種의 역사를 다 해명한 것”으로 언급하였다.138)安 廓, 앞의 책, 2쪽. 문학의 연구가 국민의 심적 현상 곧 국민사상을 이해하는 첩경이라는 관점이었다.

 안 확은≪조선문학사≫에서 국문으로 쓰여진 문학과 한문학을 함께 포괄하고 구비문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문학의 기원에서 당대의 문학까지 취급하고 있었다. 또 사실의 열거에 머무르지 않고, 상고시대에 형성된 민족정신이 어떻게 발전되고 변모되어 외래사상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139)조동일,≪한국문학통사≫5(지식산업사, 1993), 252쪽. 즉 그는 문학을 논의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종교·사상과 같은 정신적인 측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곧 倧·불교·유교 등 사상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그러한 종교와 사상이 어떻게 당시 사회에 수용되고 적응되어 토착화하였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한자와 불교의 수입을 논의하면서 그것을 고유사상과 외래사상의 접합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중고의 문학을 개괄하야 말하면 창조시대라 후세의 문학은 此 시대에서 本하니라. 한자를 수입함은 심미적 사상이 발달하야 기술적 정신이 進하매 그 문학을 요구하는 운동이 필경 한자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또한 中原의 제도·문물과 유교사상을 수입하게 된 것은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발달하야 사회와 인생을 적극적으로 교화케 함에서 出한 것이오 결코 정책상이나 卑屈的 사상으로 出한 것은 안이니라. 그런데 조선 고유한 정신이 중원의 사상을 수입함에 대하야 하등 逆論이 업시 순조로써 영접하게 된 것은 彼의 사상(天子가 天의 命을 作하야 국가를 治한다는 것)이 고유사상 즉 祭天의 정신과 祖先崇拜의 관념에 대하야 彼此 모순이 되지 안함에서 境緣된 것이니라(安 廓,≪朝鮮文學史≫, 41쪽).

 사실 그는 1915년에 발표한<조선의 문학>에서 한문학의 폐해를 강조하고, 고유문학과 신성한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140)安 廓,<朝鮮의 文學>(≪學之光≫6, 1915), 72쪽. 한문학이 중국문학을 따르지 않고 순전한 조선적 한문을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141)安 廓, 위의 글, 69쪽. 따라서 국문학의 범위에 한문학을 원칙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 한문학을 제외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국학파나 실증학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학파 학자들은 국문학에 있어 文弱의 전통에 대하여 크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미 한말에 朴殷植은<文弱之幣는 必喪其國>이라고 하여, “自國의 권리를 全失하여 타인의 노예가 된 것은 由來虛文을 徒尙하고 武事를 천시하여 虛弱之國을 馴致한 결과”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142)朴殷植,<文弱之幣는 必喪其國>(≪西友≫10, 1907), 6쪽. 안 확도 “兩班士弟는 依例保宥의 문자로 병역을 면제하고 兼하야 虛文褥禮로 인민을 속박하니 오천년 來의 文弱의 風은 慘不忍言이라”고 하며, 그 자신이 “儒敎征伐에 선봉을 擧하노니 一齊奮起하야 漢文桎梏을 타파하고 고유의 문학과 신성의 정신을 발휘하자”고 강조하였다.143)安 廊, 앞의 글, 72쪽. 문일평이 ‘戰爭文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144)文一平,<戰爭文學>(≪湖岩全集≫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 안 확은≪조선문학사≫에서 당시의 문학에 대해서도 청년계의 자각이나 내실이 없는 허영으로 파악하고 文弱하다고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이것은 국학파의 문학관이 순수학문적인 관점과는 달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일반 청년계에는 소설 及 詩의 관념이 큰 유행이 되니 이것이 文弱의 風이라. 百段事爲의 준비가 완성치 안코 오직 文藝熱만 팽창하면 건전한 문학이 生치 안코 浮薄墮落의 情態가 生할 이니 文學亡國論은 실상 今日社會에 對照할가 하노라( 安 廓,≪朝鮮文學史≫, 132쪽).

 안 확은 국문학의 전개과정을 고유사상과 외래사상의 접합을 통한 사상적인 측면에서 논의하였다. 즉 상고문학은 倧의 관념을 제시하고, 중고문학은 외래의 불교사상과 중국사상이 새롭게 風流를 형성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근고문학과 근세문학, 즉 고려와 조선은 불교와 유교가 큰 영향을 미쳤으나, 형식주의의 풍조에 치우치면서 고유정신은 殘命의 위기를 맞았고, 최근문학은 서양문물과 접합하였으나 신구문학의 대립을 거쳐 문화운동이 혼란하여졌다고 지적하였다.145)송희복, 앞의 책, 47쪽. 주목할 것은 역시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안 확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국가적 관념과 문학적 관념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국민적 종교심과 평등적 일치심을 각성함에 도달하게 한 것”으로 평가하였다.146)安 廓, 앞의 책, 78∼81쪽. 그러나 유교가 발전하면서, ‘絶代珍寶’인 언문 대신에 한자를 전용하여 자국의 고유정신은 소멸하고 중국 모방에만 급급하였음을 비판하였다.147)安 廓, 위의 책, 113쪽. 안 확의 이러한 관점은 문학을 문학으로보다, 사상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안 확의≪조선문학사≫는 최초의 국문학사이고 그 다루는 대상의 범위도 넓었으나, 상고문학의 자료나 원문의 인용, 사실의 미확인 등 실증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부분이 없지 않다. 그만큼 안 확의 문학사는 박식한 반면에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된다.148)송희복, 앞의 책, 49쪽.

 국학파로 분류되는 정인보는<朝鮮文學源流草本>(≪延禧專門學校文科論文集≫1, 1930)에서 국문학의 범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또 前人의 述作이 吏讀나 正音을 쓴 이외에 대개 漢土의 문자로서 그대로 구사한 것이므로 순수한 조선문의 영역이 말못되게 협소한 듯하나 조선의 芬香이 없이 오직 한토의 氣臭를 함유한 작품은 애초에 말할 것이 아니요, 어떠한 馬을 탔던지 동서남북에 내 맘대로 馳騁하였다 할 것 같으면 구태여 과거의 驪黃을 물어 무엇하리오(鄭寅普,<朝鮮文學源流草本>,≪薝園鄭寅普全集≫1, 延世大 出版部, 1983, 261쪽).

 즉 그는 한국적인 분위기를 보인 한문학은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吏讀를 제외하고는 한문으로 되었던 삼국시대의 문학작품을 소개하며 평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각기 碑記를 포함시켜 廣開土王陵碑나 眞興王巡狩碑를 소개하고 내용을 살피고 있다는 점이다. 광개토왕릉비는 ‘辛卯年’조를 설명하면서 사실의 모순과 문리의 乖戾를 지적하였다.149)鄭寅普,<朝鮮文學源流草本>(≪薝園鄭寅普全集≫1, 延世大 出版部, 1983), 272∼279쪽. 또 진흥왕순수비를 평하며, “외래문화를 承用할지언정 그에 揜沒되지 아니함을 料度할 수 있으며 저에게 슬리이지 아니하였을진대 그만한 自支와 內守ㅣ 그 本이 있음을 미루어 想得할 수 있다”고 하여 외래문화의 슬기로운 수용을 찬양하고 있었다.150)鄭寅普, 위의 글, 296∼297쪽. 그 또한 넓은 의미에서 한문학을 국문학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인보는 화랑도를 ‘신라사상의 순수한 凝聚’라고 지적하며, 별도의 ‘花郞道와 文學’이라는 소제목에서 논의하였다. 화랑도를 중시한 것은 결국 문학에 있어서 민족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로 알려진 문일평 역시 국문학에 관련된 글을 남기고 있다. 1930년대≪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湖岩全集≫제2권에 수록된<藝術과 로-맨쓰>·<史上에 나타난 藝術家의 群像>(<史上에 나타난 藝術의 聖職>)·<戰爭文學>이 그것들이다. 앞의 두 연재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음악·서예 등의 예술가를 포함한 것이었고,<戰爭文學>은 ‘阿旦戰과 小說’에서 언급한<溫達傳>(≪三國史記≫)을 제외하면 모두 전쟁과 관련된 시를 소개하고 간단한 평을 달고 있었다. 전쟁과 관련된 시란 결국 문학에 있어 애국적인 감정을 강조한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문일평은 “조선말의 생명을 담은 조선글의 발명으로 해서 진정한 조선문학의 수립을 가능하다”고 이해하였다.151)文一平,<史眼으로 본 朝鮮>(≪湖岩全集≫2), 16쪽. 그렇지만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한자로 표기된 작품들에 대해서도 그는 그 의의를 충분히 살리고 있었다.<史上에 나타난 藝術家의 群像>은 반 이상이 문학에 관한 것으로 국문시가를 먼저 살폈지만, 대개가 한문으로 된 작품이 소재였다. 다만 그 첫 부분에 ‘女流藝術家麗玉’을 내세우고 黃眞(伊)와 許蘭雪軒을 논의한 것은 그의 여류문학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문일평의 문학에 관련된 글은 학문적인 연구라기보다 섬세하고 박학한 전통적인 詩話風의 문학사적 감상의 수준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국학파의 특징이 博覽强記라는 점을 든다면, 문일평 또한 전문적인 문학론을 펼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배경에서 계몽성이 짙은 문학의 소개였다고 할 것이다.

 신채호는≪동아일보≫1924년 1월 1일자에<朝鮮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吏讀에 관하여 설명하며 處容歌와 鄭瓜亭曲을 훈민정음 이전의 뚜렷한 문학작품으로 소개하고, 이에 대하여 “吏讀文으로 지은 處容本歌의 의의를 발견하며 史冊에 누락된 鄭瓜亭의 國詩를 按出함은 저자의 此篇부터 始라 할지니 혹 日後 조선문학사 編撰者의 채택이 될가 하노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아울러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국문학을 다음과 같이 개관하면서,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에도 한문학이 성행하여 국문학이 발전되지 못하였다고 한탄하며, 鄭澈과 尹善道의 시조 몇 편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世宗大王의 正音字母는 吏讀에 比하면 그 音의 形이 完美할 더러 그 학습이 더욱 편리하야 우리 문학의 발흥할 利器를 주엇스나 다만 漢文學의 정복을 바더 각종 글월을 모다 한문으로 記하고 한문만 문자로 알아 국문학 발달의 前路를 막엇섯스며 元昊·鄭澈·尹善道 諸公이 간혹 時調의 명작이 잇스나 그러나 그 才力을 모다 漢詩의 저작에 팔아먹고 時調는 餘事로 作하얏슴으로 모다 작가로 稱하기 부족하며 소설은 諺文으로 著한 자가 만흐나 그러나 문학명사들은 此等의 언문소설을 著하지 안할  아니라 한 讀하지도 안함으로 다만 無賴의 閑人이 이를 지며 冊肆의 상인이 이를 박아 閭巷의 農人에게나 閨中의 부인에게 팔아 幾分의 薄利를 어덧슬 이라 그럼으로 발달이라 칭할 것이 업도다 일을터면 오백년래의 언문소설중 좀 나흔 作物을 춘향전·놀보전·토기전 등을 數하나 그러나 춘향전은 고구려의 韓珠를 演述한 것이오 놀보전은 신라의 房色을 演述한 것이오 토기전은 고구려의 龜兎談을 演述한 것이니 다 창작아님이 명백하며 만일 명문 걸작을 차즈면 한문작가에는 或 幾篇이 잇다 하련이와 언문에는 絶無하니 世宗大王의 제작한 恩德을 辜負함이 한 심하도다 아흐(申采浩,<朝鮮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東亞日報≫, 1924년 1월 1일).

 물론 신채호의 설명과 평가가 고증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국문으로 된 문학에 대한 애정과 절실한 요망은 ‘自家文學의 독립국’의 건설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최근에 와서 일반 조선문법의 학자들이 우리 글의 발달을 절규하나 그러나 각국 문학의 진보는 매양 다수한 작가가 나서 全 사회를 고무할만한 詩나 小說이나 劇本이나 기타 각종 문예작품이 만하 이로써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어 飢者의 糧이 되며 病者의 藥이 되야 自家文學의 독립국을 건설할만한 然後의 일이니 근일에 작가로 칠 작자가 멧치이냐? 아흐(申采浩,<朝鮮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東亞日報≫, 1924년 1월 1일).

 즉 신채호는 많은 작가가 국문으로 작품을 써서 민중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국문학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 확·정인보·문일평·신채호 등 국학파의 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전문 학술적인 연구라기보다는 계몽적인 요소가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뚜렷하였다. 국학파가 고증에 철저하지 못하고 박람강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증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근대적인 문학 연구방법론의 수용이 부족하였고, 전문적인 문학연구자로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니는 한계였다. 오히려 국학파의 국문학 연구는 식민지 현실을 국학, 특히 국문학의 발전으로 극복하고자 한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병기 등이 주도한 ‘時調 부흥운동’과 같은 움직임이 그러한 한 예로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다.152)시조부흥운동에 관해서는 金容稷,≪韓國近代詩史≫下(學硏社, 1986) 및 조동일, 앞의 책을 참조할 것.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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