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2. 국문학
  • 2) 실증주의적 국문학 연구와 그 분화

2) 실증주의적 국문학 연구와 그 분화

 1920·30년대 안 확이나 문일평·정인보 등의 국학파의 문학사 인식은 博覽强記한 대신 정밀한 고증이 부족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 경성제국대학 朝鮮語及文學科 졸업생들이 배출되면서 전문적인 국문학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趙潤濟·金在喆·李在郁 등이 주도한 朝鮮語文學會가 1930년 조직되고, 이어≪朝鮮語文學會報≫가 발간되었다. 또 이들의 일부는 조선어문학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국학연구단체로 1934년 창립된 震檀學會에 참여하여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金台俊·김재철·조윤제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업적을 냈는데, 각기 소설·연극·詩歌라는 3대 분야에서 전문화된 문학사를 서술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국문학 연구는 방법론상으로 크게 진보하였으며, 특히 실증주의적인 부분에서 국학파에 비하여 훈련되어 있었다. 경성제대 졸업생들은 국학파가 빠져들지 모를 맹목적이고 국수적인 문화우월의 태도를 극복하면서 국문학 연구를 순수과학의 정립에 충실하고자 했으나, 당시 현실과제에 대한 대응력의 약화, 소극성을 띠는 한계를 노출하였다.153)송희복, 앞의 책, 56쪽. 물론 그들이 그들 나름으로 그러한 현실과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민한 것은 요절한 김재철 이외에 김태준이 공산주의운동에 직접 참여한 것이나, 조윤제가 신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경성제대 조선어급문학과의 유일한 제1회 졸업생인 조윤제는 초기에 소설사에 관심을 가졌으나, 곧 시가로 그 관심을 바꾸었다. 1937년 자비출판한≪朝鮮詩歌史綱≫은 한국의 시가문학을 학술적인 체계를 세워 논의한 최초의 저술이었다.154)조윤제에 전반적인 이해에는 金允植,≪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1(일지사, 1984)와 柳浚弼,<形成期 國文學硏究의 展開樣相과 特性>(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8)에 크게 의지하였다.

 ≪조선시가사강≫에서 조윤제는 조선시가의 발생시대(원시∼불교 수입 이전)-향가시대(불교 수입 이전∼고려 초년)-시가의 漢譯時代(고려 초기∼말기)-舊樂 청산시대(조선 태조∼연산조)-가사 誦詠時代(중종∼임란 이전)-시조문학 발휘시대(임란 이후∼숙종)-시가 撰集時代(경종∼정조)-唱曲 왕성시대(순조∼순종)로 시가문학을 시대구분하였는데,155)趙潤濟,≪朝鮮詩歌史綱≫(東光堂書店, 1937), 3∼4쪽. 향가·시조·景幾體歌 등을 중심으로 왕조사와 무관하게 시가의 변천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시가의 형식문제에 관심을 가져, 형식이 곧 이념이라고 보았다.156)金允植, 앞의 책, 34쪽. 조윤제가 시조의 형식을 해명하기 위하여 字數에 관하여 통계적인 노력을 보였던 것도,157)趙潤濟,<時調字數攷>(≪新興≫4, 1931) 참조. 그만큼 형식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조윤제의 실증주의적인 측면을 알려주기도 한다. 1940년대에 민족사관을 내세우게 되는 그가, 1930년대에는 사관보다 실증에서 머물러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국문학에 한문학을 어떻게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국문학 연구자들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조윤제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 “진정한 의미의 조선문학은 이 시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지만,158)趙潤濟, 앞의 책, 160쪽. 한문학 가운데에서도 내용과 형식을 담은 것은 포함시키고자 하였다.159)趙潤濟,<朝鮮文學과 漢文과의 關係>(≪東亞日報≫, 1929년 2월 19일)에서, “나는 결코 적극론파와 같이 ‘此身死了死了’ 그대로를 조선문학이라고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한문으로 표현한 중에 沈在하여 있는 조선문학을 내어오자는 것이다. … 내가 여기서 말하는 沈在한 조선문학이라 하는 것은 한문으로 표현한 작품의 내용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보다도 日光을 보지 못한 연약한 형식이나마 형식을 구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조선시가사강≫에서 고대와 고려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이후에도, “한문의 그림자에 들어 있는 문학의 알맹이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160)趙潤濟, 앞의 책, 88∼89쪽.

 조윤제가 시가의 형식의 탐구를 통하여 시가사의 체계화 작업에 힘쓰며 주목한 것은 확인 가능한 수량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시가의 내적 특성이었다.161)柳浚弼, 앞의 글, 220∼221쪽. 그것은 실증적인 순수학문으로의 과정이었고, 그 결과는 향가-경기체가(고려 장가)-시조-가사의 계통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시가형식론은 비역사적 성격을 주요한 특성으로 하고 있어 시가사의 서술은 역사적 변화과정을 담아내기 어려웠다.162)柳浚弼, 위의 글, 265쪽. 조윤제가 실증주의에서 민족사관으로 옮겨간 것은 그러한 문제의 극복을 위한 것이었다. 시가를 생활과 연결시켰던 그가 시가 연구의 과정에서 “시가와 국민성은 실로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가 그토록 형식을 강조한 時調를 “조선민족의 정신을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던 점은,163)趙潤濟, 앞의 책, 2·115∼116쪽. 뒤에 형식을 벗어나 생활의 변화와 같은 역사성이 반영되는 민족사관으로 옮겨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아무튼 일제 강점기 조윤제의 국문학연구는 식민지 현실에서의 순수학문 연구자의 한계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설사에 괄목할 업적을 남긴 김태준은 경성제대 支那(중국)어문학과 출신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직전인 1930년 10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조선일보≫에<朝鮮小說史>를 연재하였으며, 1931년에≪朝鮮漢文學史≫를, 1933년에≪朝鮮小說史≫를 간행한 바 있다.≪조선소설사≫는 1939년≪增補 朝鮮小說史≫로 다시 간행되었다. 물론 그는 소설사에 국한된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니라, 시가 등 다른 분야 및 한국사와 중국문학에 관해서도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164)김태준의 문학 전반에 관해서는 박희병,<天台山人의 국문학 연구>상·하(≪민족문학사연구≫3·4, 1993) 및 柳浚弼, 앞의 글을 참조할 것. 특히 그는 실증주의의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점차 유물사관에 경도되어 사회경제사학자로 분류된다. 그리고 1940년에는 경성콤그룹에 참여하여 1941년에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1944년 말에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延安으로 탈출하는 행동가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65)임영태,<혁명적 지식인 김태준>(≪사회와 사상≫창간호, 1988).

 김태준은≪조선한문학사≫를 통하여 전통한문학을 청산하고자 하였다. 그 스스로가 “나의 한문학사는 조선 한문학의 결산보고서가 된다”고 하였고,166)金台俊,≪朝鮮漢文學史≫(朝鮮語文學會, 1931), 6쪽. 그 결론에서 “재래의 한문학은 경향에 약간 殘喘을 보존하고 있지만 자연도태로써 신선하게 刷掃되는 것을 우리는 본다. 날근 것을 정리하고 새로 새 것을 배워서 신문화의 건설에 힘쓰자! 이것이 조선 한문학사의 웨치는 표어”라고 하였던 것이다.167)金台俊, 위의 책, 191쪽. 즉 김태준은 한국의 한문학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표기문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그 나라 고유한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면 국민문학이 아니라는 관점에 서 있었고,168)金台俊,≪朝鮮小說史≫(淸進書館, 1933), 13쪽. 조선문학은 “순전히 조선 문자인 ‘한글’로서 향토 고유의 사상감정을 기록한 것”이라고 밝혔던 것이다.169)金台俊, 앞의 책(1931), 4쪽. 물론 그렇지만 실제 문학사의 서술에 있어 김태준이 그 같은 원칙론을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동시에 봉건귀족의 문학인 한문학의 청산을 통하여 신문학의 출발을 기대한 것이기도 하다. 비록≪조선한문학사≫가 나열식이고 방법론이 부재하였다고 그 스스로 술회하였고,170)金台俊,<朝鮮漢文學史方法論>(≪學燈≫6, 1934). 실제 고증이 잘못된 곳도 있지만, 실증주의가 두드러지는 저술이었다. 그리고 한학에서 문학을 분리시키고, 시문 중심의 한문학에서 수필·야담·소설을 적극적으로 다루며, 여성문학·중인문학·서얼층의 문학에 주목한 점 등은 이 저술이 갖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171)박희병, 앞의 글(상), 262∼263쪽. 여류문학의 경우에는 국문학·한문학의 구별과 무관하게 1932년 말부터≪조선일보≫에 별도로 연재하였다.172)박희병, 위의 글(하), 193∼197쪽.

 ≪조선소설사≫는 소설만을 다룬 최초의 문학사이다. 설화시대로부터 당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소설사를 5기로 나누어 체계화를 시도한 이 저술은 널리 자료를 섭렵하여 실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다만 소설사의 맥락이나 작품론에 소홀하였다는 지적과, 영조·정조대에 근대소설이 나타났다는 주장을 치밀한 논리 없이 분위기 전달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있다.173)조동일, 앞의 책, 254쪽. 아무튼 그는 朴趾源의 작품과≪춘향전≫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지원의 한문소설을 소설사에서 크게 강조한 점으로도 그가 국문문학만을 국문학이라고 한 원칙론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예사회학으로 경도된 김태준의 연구는 특히 1933년에 발간된≪조선소설사≫를 증보하여 1939년 출간한≪증보 조선소설사≫에서도 확인된다.≪조선소설사≫를 간행한 이후의 소설 연구들이 증보판에 포함되었는데,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계급사관이 강조된 부분들이 수정되었던 것이다.174)柳浚弼,<金台俊의≪朝鮮小說史≫와≪增補 朝鮮小說史≫대비>(≪韓國學報≫78, 1995). 예컨대<九雲夢>이나<兩班傳>을 계급사회와 관련시켰다던가,<興夫傳>을 경제와,<春香傳>을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과 서민계급의 승리·평등사상 고취 등으로 인식한 점에서 그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175)박희병, 앞의 글(상), 255∼256쪽. 사실 김태준이≪동아일보≫1935년 1월에 연재한<春香傳의 現代的 解釋>은 문예사회학적인 대표적인 연구로, 시대성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작품과 문학·사회·역사의 접맥을 이루어내고 있었다.176)<春香傳의 現代的 解釋>은 김태준의 校注로 1938년 學藝社에서 발간한≪原本春香傳≫의 해설로 재수록되었고,≪增補 朝鮮小說史≫에도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이 글에 관해서는 박희병, 위의 글(상), 268∼275쪽에 상세한 논의가 있다.

 소설과 더불어 김태준은 가요를 중시하였는데, 1933·34년≪조선일보≫에 연재한<朝鮮歌謠槪說>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의 관심은 가요의 ‘민족적 고유성’과 ‘민중성’이었다. 그는 특히 시조가 민중과 隔絶된 상층가요였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중화한다고 파악하였고, 민요는 계급·사회·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177)김태준의 가요연구에 관해서는 박희병, 위의 글(하), 166∼193쪽. 김태준의 초기 저술에서부터 유물사관·계급사관의 분위기가 적지 않지만,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에 적용시키는 것은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1933년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김태준은 실증주의와 함께 유물사관을 연구방법론으로 수용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주관을 배제하고 자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는 역사발전법칙과 계급을 강조하는 유물사관과는 대립되는 관점이지만, 실증주의의 학문적 배경에서 유물사관의 방법론을 구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본인은 실증주의를 배격하고자 하였지만, 근대적 연구방법론으로 익숙하게 된 실증주의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김태준은 과학성과 민중성을 강조하였는데, 그러한 면에서 국학파의 연구는 문학이나 역사학이나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학운동에 대한 비판 역시 관념적인 조선학이 아니라, 현실에 사는 일반의 행복을 위한 조선학 연구를 수립해야 하였기 때문이다.178)金台俊,<朝鮮學의 國學的 硏究와 社會學的 硏究>(≪朝鮮日報≫, 1933년 5월 2일).

 연극사에 관한 관심이 이 시기에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특히 전통시기의 가면극과 인형극, 그리고 판소리가 그 주된 대상이 되었는데, 민중의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연극사에 관련된 저술로는 金在喆의≪朝鮮演劇史≫(1933)와 鄭魯湜의≪朝鮮唱劇史≫(1940)가 간행되었다.

 김재철의≪조선연극사≫는 그의 대학 졸업논문을 확대하여 1931년≪동아일보≫에 연재한 바 있던 것을 수정한 것으로, 김재철이 요절하자 조선어문학회에서 발행하였다. 한국 최초로 연극사를 정리한 이 저술은 제1편 가면극·제2편 인형극·제3편 舊劇과 新劇·제4편 결론으로 구성되었고, 부록으로 ‘꼭두각시극’의 각본이 수록되어 있다. 가면극과 인형극에 관한 부분은 상세한 문헌자료를 들어 내용과 성격, 계통을 고찰하였다. 제3편은 廣大에 관한 어원고증을 비롯하여 그 내력과 기능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특히 전통연극의 발달과정 및 성격과 형식까지 실증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연극사의 시대구분은 왕조사에 머물렀으며, 연극이 고대의 제의-신라의 演戱-고려의 山臺雜劇-조선의 山臺都監劇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舊劇으로 판소리·창극을, 신극은 圓覺社 이후의 활동을 다룬 것이었다.179)金在喆의≪朝鮮演劇史≫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송희복, 앞의 책, 64∼69쪽.
李東英,≪韓國文學硏究史≫(釜山大 出版部, 1999), 279∼301쪽.
유영대,<金在喆의 演劇理論考>(≪現代文學≫1984년 10월호).

 ≪조선연극사≫에서 김재철은 가면극이나 인형극의 내용을 통하여 평민들이 양반에 대하여 비판하고 풍자하였음을 지적하였으며,180)金在喆,≪朝鮮演劇史≫(朝鮮語文學會, 1933), 54∼55·107∼109쪽. 창립되지도 않은 프로劇이나 좌익극단에 대하여 언급한 점 등으로 미루어 사회주의적 관점이 어느 정도 투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신극 수립에 상당한 업적을 보인 劇藝術硏究會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181)徐恒錫,<蘆汀金在喆著 朝鮮演劇史>(≪東亞日報≫, 1933년 6월 24일). 따라서 전통극의 원리나 그 계승 등에 대한 관심은 없고, 서구의 근대극을 연극의 교과서로 삼아 전통극을 재단하였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182)조동일, 앞의 책, 255쪽.

 ≪조선창극사≫는 사회주의운동가였던 정노식의 저술로 1940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판소리를 정리한 이 저술은 여류명창 8명을 포함하여 89명에 달하는 판소리 명창에 대한 약전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판소리 관계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하였다. 앞부분에 실은 ‘창극의 논고 및 자료’는 판소리를 언급한 단평들을 소개한 것이고, 판소리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인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조선창극사≫는 실증주의의 업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저술로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183)≪朝鮮唱劇史≫에 대한 소개는 李東英, 앞의 책, 302∼322쪽.

<崔起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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