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3. 국사학
  • 2) 사회경제사학

2) 사회경제사학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도입되고 성행하면서 한국사를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세계사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일원론적 역사발전법칙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을 한국사에 적용하고자 한 이들은 한 시대의 생산관계를 해명하고, 또 그것이 역사의 어느 발전단계에 해당되는가 하는 시대구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이러한 경향의 역사학을 사회경제사학이라 지칭한다.200)사회경제사학에 관해서는 주 1)의 연구 이외에 다음이 참고된다.
李基白,<實證史學과 社會經濟史學의 問題>(≪民族과 歷史≫新版, 一潮閣, 1994).
―――,<唯物史觀的 韓國史像>(≪韓國史像의 再構成≫, 一潮閣, 1991).
姜晉哲,<社會經濟史學의 導入과 展開>(≪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1989).
방기중,≪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역사비평사, 1992).

 그 대표적인 인물이 東京商科大學 출신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있던 白南雲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는 한국사를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파악한≪朝鮮社會經濟史≫와≪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을 저술하였다. 각기 한국의 원시 및 고대와 고려사를 다룬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미간행된≪조선봉건사회경제사≫下는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사를 다룰 예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유물사관을 수용한 학자들은 백남운과 더불어 李淸源·金洸鎭·金台俊·李北滿·朴文圭·尹行重·朴克采·全錫淡 등을 들 수 있는데, 중국문학을 전공한 김태준을 제외하면 대개 경제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백남운은≪조선사회경제사≫의 첫 부분에서, 한국사 연구의 임무를 “과거에 있어서 역사적·사회적 발전의 변동과정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구명하는 동시에 그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삼고, 그 방법으로 “인류사회의 일반적 운동법칙으로서의 사적 변증법에 의하여 그 민족생활의 계급적 여러 관계 및 사회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그 법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하였다.201)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改造社, 1933), 5쪽. 그것은 결국 사적 유물론에 의해서만 한국사의 민중생활과 사회구성의 발전을 법칙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식민지 현실의 본질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한국사에 있어서 경제적 사회구성의 단계를 원시공산제사회-노예제사회(삼국 정립기)-아시아적 봉건제사회(삼국시기 말부터 최근세)-외래자본주의사회(일제하 현재)로 전개되었다고 보았다.202)白南雲, 위의 책, 序文 3쪽.

 따라서 백남운을 비롯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민족주의사학이나 식민주의사관을 특수사관으로 지적하며 비판하였다. 백남운은≪조선사회경제사≫의 앞부분에서 일제의 식민주의사학뿐 아니라 민족주의사학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최근 우리 선배들은 조선사학을 위하여 얼마만한 공헌을 하였을까.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 혹은 문헌고증을 위하여, 혹은 고적답사 및 유물수집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어느 것이나 필요한 일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우리 사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새로운, 그러나 불행한 각인으로서의 ‘특수사관’이라는 외래품을 일본에서 수입한 것도 우리 선배일 것이다. … 우리 선배의 기민한 수입은 국정의 격변으로 말미암아 부리를 내리지 못하고 골동품을 수집하는 편력학도로서 정치적으로는 버림을 받게 된 정세이지만,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조선문화사의 독자적인 소우주로서 특수화하려는 기도가 비교적 뿌리깊게 습관화되어 있다. 이러한 종류의 특수성 외에 이것과는 외관상 다른 官製의 특수성이란 것이 따로 규정되어 유포되어 있다. 그것은 관리 諸公의 ‘조선특수사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두 가지 형태의 특수성의 차이를 찾아보면, 전자가 신비적·감상적인데 대하여 후자는 독점적·정치적인 점을 지적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인류사회 발전의 역사적 법칙의 공통성을 거부하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따라서 반동적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사실은 닮은꼴의- 특수성은 조선사학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정력적으로 배격해야 할 현실적인 대상이다(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 改造社, 1933, 6∼7쪽).

 구체적으로 그는≪조선사회경제사≫에서 단군신화의 해석에 있어 설화적 관념표상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예로 신채호와 최남선을 거명하였고, 실증주의적인 편견성에서 임의적으로 평가하는 예로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와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오다 쇼오고(小田省吾)을 비판하였다.203)白南雲, 위의 책, 14∼15쪽. 즉 백남운은 식민주의사학이나 민족주의사학을 특수사관으로 보고 비판하면서, 일원적인 역사법칙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유물사관을 수용한 학자들의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은 백남운뿐만 아니라, 이청원이나 김태준에게서도 보인다. 특히 정인보가 제기한 ‘얼’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다.

儒敎訓話的이고 정책적이고 반봉건적인 ‘조선학’은 조선의 역사적 과정을 세계사와는 전혀 별개의 독립적인 고유한 신성불가침의 ‘5천년간의 얼’을 탐구하는데 열심이고, 그 공식의 천재는 ‘단군’에 분식하고, 그 전체적인 영웅은 ‘李舜臣’의 옷을 빌려 입고, 그 재간 있는 사람들은 ‘丁茶山’의 가면을 쓰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리하여 ‘얼’에 의하여 이루어진 신비적인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신흥 역사과학은 물론 이와 대립한다(李淸源,≪朝鮮社會史讀本≫, 白揚堂, 1936, 1∼2쪽).

 이렇듯 이청원은≪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정인보의<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비역사적인, 신비적인 역사를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김태준은 정인보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비난과 함께, “조선민족을 選民的으로 높이려 하고, 통일한 5천년간의 민족혼을 환기하려는 것은 역사의 왜곡된 선입견과 공연히 허장성세하려는 데서 오는 것으로 역사와 독자들에게 죄악을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극언하기에 이르렀다.204)金台俊,<鄭寅普論>(≪朝鮮中央日報≫, 1936년 5월 16일∼19일).

 이들은 단군신화를 들어 민족주의사학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백남운이≪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신채호 등의 예로 단군신화에 민족주의사학의 주장을 비판하였지만, 김태준도 같은 맥락에서 단군신화에 대한 일제 관학자들의 합리주의적 假象도 반대하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환상적·독자적인 것도 거부한다고 하였다.205)李基白,<唯物史觀的 韓國史像>(≪韓國史像의 再構成≫, 一潮閣, 1991), 179∼180쪽. 金台俊은<檀君神話硏究>를≪朝鮮中央日報≫1935년 12월 6일부터 24일까지 13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다.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실증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물론 일제의 관학자들이 실증을 가장하여, 합리주의의 명분 아래 식민주의사학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실증주의와 과학적 이론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실증은 역사적 구체성을 일반화하기 위한 예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백남운은206)白南雲, 앞의 책, 428쪽. 식민지 강점을 합리화하고자 한 식민주의사학이 가장한 실증주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207)방기중, 앞의 책, 138∼142쪽. 그리고 그것은 震檀學會를 주도한 한국인 실증사학자들에 대한 일정 부분의 비판을 포함한 것이었다. 김태준은≪震檀學報≫제3권에 실린 논문들을 언급하면서 역사연구에 있어 실증사관에 그치지 않고 유물사관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많은 역사적 소재를 갖고 있다. 하나 그를 충분히 비판할 만큼 예리한 칼이 없었다. 과학자의 유일한 무기-특수사관이 아닌 정상적 ‘물적 사관’-으로써 석기인의 생활을 엿보고 고려인의 회화를 보고 고대의 가요를 보고 雄鷄信仰을 보아서 현대와의 어떤 관련하에 流傳되어온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金台俊,<震檀學報 第三卷을 읽고>完,≪朝鮮中央日報≫, 1935년 11월 19일).

 이렇게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일원적 역사 발전법칙의 적용이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임을 강조하였다. 즉 백남운은 사적 유물론을 통해서만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고 하였고, 결국 그 방법론에 의하여 한국사의 발전단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계급투쟁을 역사의 기본 축으로 하여 한국사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조선 민족의 발전사는 그 과정이 아무리 아시아적이라고 하더라도 사회구성의 내면적 발전법칙 그 자체는 오로지 세계사적인 것이며, 삼국시대의 노예제사회, 통일신라기 이래의 동양적 봉건사회, 이식자본주의 사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선역사의 기록적 총발전단계를 나타내는 보편사적인 특징이며, 그것들은 제각기 특유의 법칙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조선사 연구의 법칙성이 가능하게 되며, 그리고 세계사적 방법론 아래서만 과거의 민족생활 발전사를 내면적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현실의 위압적 특수성에 대해 절망을 모르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白南雲,≪朝鮮社會經濟史≫, 改造社, 1933, 9쪽).

 나아가 그는 역사연구를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뒤적이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을 본질적으로 그대로 파악하는 동시에 장래를 보는 것”으로 주장하였다.208)白南雲,<朝鮮史觀 樹立의 提唱>(≪經濟硏究≫4, 1933), 3쪽.
≪彙報≫(이론과 실천, 1991), 81쪽.
역사학의 실천성이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일원적 역사 발전법칙 곧 유물사관의 공식을 받아들이면서, 특수성이 두드러져 보편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인 민족주의사학을 비판하였고, 실증사학도 일정하게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며, 식민주의사학에 대해서는 세계사의 보편적인 틀로써 대항하고 있었다. 물론 유럽의 역사발전을 기준으로 한 법칙을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한국사에 적용하려는 공식주의는 한국사 연구의 또 다른 한계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를 사회·경제의 관점에서 사회발전단계론을 통하여 이해하고자 한 점이나, 피지배계층을 역사의 무대에 세운 점은 사회경제사학이 갖는 사학사적 의의라고 할 것이다. 또한 식민주의사학의 허구성을 밝히고, 한국사를 세계사적 발전과정상에 놓으려고 한 점도 의미가 있었다. 다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회경제사학자들의 대부분이 북한으로 옮겨가게 되자, 남한에서의 학문적인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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