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3. 국사학
  • 3) 실증사학

3) 실증사학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은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관심을 보인 역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방편의 하나로 역사학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순수학문을 표방하면서 식민주의사학에 학문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일군의 역사연구자들도 있었다. 이미 1920·30년대에 이르러 일본과 국내의 대학에서 근대 역사학을 공부한 연구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 역사연구자의 수가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현실정치의 논리를 초월한 학문적 논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실증사학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과학적·실증적으로 역사학을 연구하고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실증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활동을 목표로,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한국사를 연구한 학풍을 지칭한다.209)실증사학의 전반적인 논의는 다음이 참고된다.
金容燮,<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발달>2(≪文學과 知性≫9, 1972).
洪承基,<實證史學論>(≪現代 韓國史學과 史觀≫, 一潮閣, 1991).
李章雨,<實證史學의 반성과 전망>(≪韓國史 市民講座≫20, 1997).

 이들 실증사학자들이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조직된 靑丘學會에 자극을 받아 연구활동의 장을 마련하고, 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1934년에 창립한 것이 震檀學會였다. 물론 진단학회에는 李丙燾·李相佰·金庠基·孫晉泰·申奭鎬·柳洪烈·高裕燮 등 역사학자들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金允經·李秉岐·李在郁·李熙昇·宋錫夏·趙潤濟·崔鉉培 등 국어학·국문학·민속학 등 국학에 관련된 연구자들이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진단학회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은 모두 그들이 전공하는 분야와 시대가 있었다. 예컨대 이병도는 고대역사지리와 사상사를, 김상기는 대외관계사를, 이상백은 조선건국사와 사회제도사를, 손진태는 원시신앙과 민속을, 신석호는 조선정치사를, 유홍렬은 조선교육사와 사상사를, 그리고 고유섭은 미술사를 전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사 연구가 세분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대한 깊은 천착이 필요하다는,210)李基白, 앞의 글(1977), 176쪽. 즉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실증사학자들은 사료의 자의적 해석이나 일정한 공식에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적용시키는 역사연구 경향을 극복하고, 식민주의사학을 학문적 논리로써 극복하고자 실증사학을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민족주의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에서 제시하는 일정한 법칙이나 공식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사실의 연구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고 하였으며, 식민주의사학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211)李基白, 앞의 글(1994), 39쪽.

 예컨대 이병도는 일본 관학자들의 문헌비판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고증적인 연구방법으로 주로 고대사와 고려사에 업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漢四郡이나 三韓의 위치를 비정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민족주의사학자들이 만주로 비정한 한사군을 한반도에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또 辰國의 강역을 논급하고 箕子朝鮮을 부인한 韓氏朝鮮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상백은 조선건국을 田制改革이라는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또 조선 초기의 斥佛運動 또한 佛寺의 경제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동기가 있었다고 보았다. 김상기는 동학운동을 동학이념의 평등사상과 농민운동을 연결시켜 사회개혁운동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朝貢을 전근대 동양사회의 무역형태의 하나로 파악한 것도 그의 업적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구체적인 역사사실을 고증을 통하여 설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이나 국내에서 일본인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식민주의사학과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있었고, 민족주의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과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방법론과 역사인식을 잘 드러낸 것이 이상백이었다.

역사의 사실이란 것은 항상 인간성의 전체에 관련하는 것이다. … 즉 이 역사사실이라는 것은 인간성 전체 위에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개체가 전체에 관련하는 것은 그 개체를 조금도 變改함이 없이 전체에 관련시킬 수가 있다. 일개의 사건이 그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으면서 넓게 그 시대 전체에 관련하고 또 국민·민족의 전반에 관련하여 이해되고, 다시 인간 전체에 있어서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李相佰,≪朝鮮文化史硏究論攷≫, 乙酉文化社, 1947, 2쪽).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사실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러한 실증사학자들의 관점은, 바로 식민주의사학의 강요나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였다. 또 그는 “어떠한 원칙을 실증하고 결론을 단정함에는, 정밀한 관찰과 確乎한 사실을 전제로 할 것이요, 독단적 해석과 기계적 적용은 진리를 탐구하는 방도가 아니요, 참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는데,212)李相佰,≪朝鮮文化史硏究論攷≫(乙酉文化社, 1947), 9쪽. 바로 실증사학을 그대로 대변하는 주장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증사학의 등장에 대하여 정인보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는 실증사학자들이 일본인 학자들을 추종한다고 하면서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즉 그는 “≪三國史記≫등의 우리 사서가 남의 기록은 믿고 우리의 것은 배척하였는데, 우리가 문헌을 존중한다고 하면 역사를 顚倒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하였다.213)鄭寅普,<與文湖岩一平書>(≪薝園文錄≫, 延世大 出版部, 1967), 331∼337쪽.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의 학문적 방법론에 대한 의의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역사연구 목적론과 관련하여 역사 발전의 공식과는 무관하다는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214)李基白, 앞의 글(1994), 37∼39쪽 및 앞의 글(1991), 184∼187쪽. 즉 사회경제사학자인 이청원은 실증사학자들이 주도한≪진단학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제 이 학보 제3권의 내용을 보건대 그에는 당연히 제기하여야 할 상당히 귀중한 문제가 많이 있으며, 종래의 케케묵은 通俗史家들보다 엄청나는 발전의 자취가 보인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것은 선행자들과 전혀 본질적으로 다른 발전이 아니고, 오직 그들 선행자들이 제기한 명제를 일반화하고 수정하고 보충하고 다른 일면을 분리하였다는 의미에서 이다. 이 의미에서 우리 학계에 남겨준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좋지 못한 결과도 산출하였다는 것을 조금도 숨겨서는 아니된다. ‘사회적 운행을 초월한 純粹思惟’이니 ‘순수한 개인이 자기사상’이니 하는 따위의 ‘늘 점진적으로라는’ 기분 좋은 선율에 나아가는 관념적 사관으로, 이 나라의 젊은 학구자들에게 소화불량의 결과를 주었다는 것이 즉 그것이다. 우리는 늘 이상과 같은 관점과 준비 아래서만 이 會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李淸源,<震檀學報 第三卷을 읽고>,≪震檀學報≫4, 1936, 155쪽).

 진단학회의 학문적 분위기를 ‘순수사학’으로 보고 있던 이청원은≪진단학보≫의 업적을 종래의 역사학과는 다른 형태의 발전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로 사회성의 결여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발전이라는 것도 “선행자들과 전혀 본질적으로 다른 발전이 아니고, 오직 그들 선행자들이 제기한 명제를 일반화하고 수정하고 보충하고 다른 일면을 분리하였다는 의미”라고 제한시키고 있었다. 이 경우에 실증사학이 문헌비판적이고 합리성을 추구하고 있으나,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짐작된다.

 실증사학자들은 식민지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사명감에서보다는 한국사 연구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민족적이라는 생각에서 한국사를 연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스스로 밝혔듯이 일제에 대한 민족적이고도 학문적인 대결 의식이 연구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보인다.215)李丙燾,<創立에서 光復까지>(≪震檀學會六十年誌≫, 震檀學會, 1994), 231쪽.
李章雨, 앞의 글, 33쪽.
철저한 문헌고증으로 학문적인 수준을 크게 향상시켜 일본인 학자들의 업적을 넘어설 수 있던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무튼 실증사학자들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학문적 태도는 한국사학이 근대 역사학으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엄격한 사료 비판과 철저한 고증을 연구의 기본 전제로 삼아,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연구업적을 쌓았다. 물론 실증적인 연구방법은 실증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역사학 연구의 기본적인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실증사학자들이 일제 관학자들이 세운 한국사 인식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실의 해명에만 목표를 둔 이른바 사건 서술적인 역사학이었다는 비판도 있다.216)金容燮,<日本·韓國에 있어서의 韓國史 敍述>(≪歷史學報≫31, 1966), 147쪽.
―――, 앞의 글(1972), 508쪽.
또 실증사학자들이 밝혀낸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한 비판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그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며, 그 또한 극복해 나가야 할 점이었다. 다만 실증사학자들이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그러한 문제점의 극복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崔起榮>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