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 1) 일제 종교정책의 기조

1) 일제 종교정책의 기조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 자국에서 실시하던 종교통제정책의 연장이었으며, 그것의 더 가혹한 적용이었다. 일제는 서양 제국에게 자국이 문명국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하여 겉으로는 근대적인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격상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神道와 ‘天皇信仰’을 축으로 한 祭政一致를 추구하였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배타적인 國家神道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또한 민중을 교화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종교와 교육을 국민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함으로써 이를 철저히 국가가 통제·이용하는 전근대적인 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메이지정부가 전국에 걸쳐서 추진한 최초의 종교정책은 ‘神佛分離政策’이었다. 그 내용은 ‘神’과 ‘佛’을 같은 장소에 모시고 섬기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사실은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神佛이 혼합되어 신도가 불교에 눌려 있었으므로 이를 분리시켜 신도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신도국교화정책은 1868년부터 1871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추진되어 1871년에는 전국의 모든 神社를 국가의 종사로 하고 계층적 寺格制道를 마련하여 신사의 공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제사하는 이세징구(伊勢神宮)를 신사의 本宗으로 정하였다.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도 없지 않았지만, 이에 호응하여 수많은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사원의 경제적 기반이 삭감 위축되었으며, 불교의 信徒 조직인 檀家制度가 신사를 중심으로 한 氏子制度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신도 국교화정책이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자 일본 정부는 1882년 神社神道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이른바 제사와 종교의 분리 조치를 취하였다. 즉 일본 정부는 “신사신도는 국가의 제사이며,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신사신도의 초종교적 절대우위를 확립하고, 그것을 교파신도·불교·기독교 등 일반 종교위에 군림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사신도의 국가신도성을 확립하고 이를 통하여 타 종교를 지배 통제함과 동시에 신교의 자유, 정교분리론에 의한 국내외의 비판을 봉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217)東京辯護士會 編,≪靖國神社法案の問題点≫(東京:新敎出版社, 1976), 23쪽. 이어서 그들은 1889년 2월 발포한<대일본제국헌법>과 이듬해 10월에 반포한<교육에 관한 칙어>에서 천황의 절대적 권위와 국민의 복종과 충성의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국가신도의 교의를 법제적으로도 완성하였다.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는<제국헌법>제28조에서 “일본 臣民은 안녕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의무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信敎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하여 제한적 범위에서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891년 1월에 일어난 이른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불경사건’은 신앙의 자유라는 것이 국가적인 방침과 어긋날 때 어떠한 국가적·사회적 박해를 당하게 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이었던 우치무라가 천황이 하사한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칙어에 대해 최경례를 해야 할 때 잠시 망설였다는 이유로 불경한 사람으로 몰려 사회적 지탄을 받고, 교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그 충격으로 부인까지 잃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 문부성은 1899년 8월<문부성 훈령>12호라는 것을 발령하여 ‘교육과 종교의 분리’라는 미명으로 학교교육에서 종교교육이나 종교의식을 행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일본 정부는 학생들에게 ‘천황의 사진’이나<교육칙어>에 최경례를 하게 하고, 신사에서 거행되는 각종 애국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가 하면, 수신·지리·국사(일본사)·국어(일본어) 교과서에 神道와 천황에 대한 신화와 종교적 내용을 넣어 편성하여, 국가신도의 교의 내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주입하였던 것이다. 즉 신사신도는 사실상 일본의 국교였으며, 종교교육을 국가가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이미 1890년대 말부터 여러 종교단체를 더욱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른바 ‘종교법’을 만들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즉 1898년 제14회 제국의회에<宗敎法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법안의 성격은 “국가가 종교를 감독하여 사회질서의 안녕을 해치지 않고 또한 臣民의 의무를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일 뿐 아니라 그 직무에 속한다”라고 하는 당시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제안 설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종교단체에 대한 국가의 감독과 통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218)澤正彦,≪日本基督敎史≫(대한기독교서회, 1979), 138쪽. 이<종교법안>은 결국 종교계의 반대운동으로 제정이 저지되었으나, 이후에도 수차 의회에 제출되어 논란이 계속되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기에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얼마간 완화되었던 사상통제 정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1919년 한국의 3·1독립운동, 그리고 1923년 關東大震災 사건을 거치면서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1월에 발포된<국민정신작흥에 관한 조서>와 1925년 4월에 공포된<치안유지법>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다시 국민교화와 사상통제가 강화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20년대 후반기에 사상통제를 위한 종교법안 제정 논의가 다시 일어나자,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한국교회도 필연적으로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예상하여 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제1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26)는 韓錫振 목사를 위원장으로 咸台永·金永耈·朴容羲 목사를 택하여 종교법안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대책을 강구케 하였다.219)≪죠션예수교쟝로회총회 뎨15회 회록≫(1926), 22쪽. 이에 따라 위원회는 조선총독부에 종교법안 제정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이듬해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영구를 일본에 파견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게 하고 연합공의회 명의로 일본 貴·衆 양원에 “우리 조션교회에서도 종교법안을 반대함”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발송하였다.220)≪죠션예수교쟝로회총회 뎨16회 회록≫(1927), 28쪽. 이 종교법안이 다시 1927년 제52회 제국의회에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일본정부는 이를 다시 형식적으로 수정하여 1929년 제56회 제국의회에<종교단체법안>이란 이름으로 제안하였으나,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고, “국가의 종교 간섭은 시대착오”라는 반론에 부딪혀 그 제정이 저지되었다.221)澤正彦, 앞의 책, 138쪽. 한국교회는 이때에도 함태영 목사를 위원장으로 종교단체법안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4차에 걸쳐 이를 심의한 결과 “前 법안과 상위가 없으므로 이 법안 반대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全弼淳 목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반대의견서를 일본 문부대신·귀족원에 제출케 하는 등 활발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222)≪죠션예수교쟝로회총회 뎨18회 회록≫(1929), 47쪽.

 193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 정부의 종교단체법안 제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특히 전시체제하에서 일본 정부의 종교 통제 의도가 강화되어<종교단체법안요강>,<종교단체법초안>등을 마련하여 종교제도조사회에 형식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점차 그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마침내 1939년 제74회 일본제국의회에서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였다. 1940년 4월부터 시행된 이 법에 의해서 종교단체들은 통폐합되어 교단을 구성하고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활동하게 되었다. 이 법은 종교단체와 그 교화활동에 대하여 정부의 감독을 엄중히 하고 皇道精神·神國思想 등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에 위배되는 기독교를 비롯한 제 종교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그 존립을 위해서는 제도와 교리마저 변질을 강요당하였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신도 이외의 종교를 탄압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이들 종교를 회유하고 이용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었다. 1912년 2월 내무차관 도코나미 타케지로(床次竹二郞)의 주선으로 내무대신 하라 타카시(原敬)는 신도·불교·기독교의 세 종교 대표자들을 초청하여 국민도덕 진흥에 대해서 종교계의 협력을 요청하는 회합을 가졌다. 이것은 ‘三敎會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회합에서 그들은 “一. 우리 각각은 그 교의를 발휘하여 皇運을 扶翼하여 더욱 더 국민도덕의 진흥을 도모할 것을 기한다. 一. 우리는 당국자가 종교를 존중해서 정치·종교 및 교육과의 관계를 융화하여 국운신장에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것은 정교유착이라고 할만큼 정치 권력에 의해서 종교가 이용당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일본 정부에 의한 종교계의 이용과 통제는 1940년대<종교단체법>체제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9월에는 일본의 전종교계를 망라하여 그들의 이른바 大東亞共榮圈 건설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大日本戰時宗敎報國會를 결성하고, 당시 문부대신 니노미야 하루시게(二宮治重) 중장이 직접 그 회장을 맡았다. 이는 일본 정부가 ‘종교 교화 활동’을 완전히 군부의 통제하에 두고, 종교단체를 직접 통제·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국가신도 내지 神社神道를 정점으로 하여, 그 하위에 교파신도와 불교·기독교를 국가의 공인종교로 삼고 국가 시책에 충실히 따르도록 통제·이용하면서, 그 외의 종교는 유사종교단체라 하여 불법화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통제·탄압하였다. 그리고 공인종교라 하더라도 그들의 통치 방침에 비협조적이거나 위배될 때는 가차없이 탄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신도를 국교로 한 여타 종교의 통제·이용 정책이 그들의 종교정책의 기조였으며,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에서 제정에 실패한 제반 종교 관련 법안들까지 일찍부터 총독의 직권으로 제정하여 더욱 가혹한 형태로 그것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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