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 2) 무단통치기의 종교 억압·통제정책

2) 무단통치기의 종교 억압·통제정책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가장 고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문제였다. 당시 한국에는 유교·불교·천도교·대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있어 일제가 장악은 물론 파악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개신교 등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어, 자칫 종교를 무단으로 억압·통제할 경우 외교문제로 비화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감부 시기부터 서구 선교사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그들의 정책에 동조하도록 회유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내세워 종교인들이 될 수 있는 한 민족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헌병경찰들을 동원하여 종교계에 대한 감시와 억압을 자행하였다. ‘한일합병’이 공표된 당일에 발표한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의<諭告>에 종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것은 그들이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고심했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종교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信敎의 自由 文明 列國이 均認 바ㅣ라 各人이 其崇拜 敎旨 倚야써 安心立命之地 求은 固雖其所ㅣ나 宗派의 異同으로써 漫히 試其紛爭며 又藉名信敎야 叩議政事며 若企異圖은 卽 茶毒 良俗야 妨害安寧者로 認야 當히 按法處斷치 아니치못리라. 然이나 儒佛諸敎與 基督敎 不問고 其本旨 畢竟 人心世態 改善에 在故로 固히 施政之目的과 不爲背馳而已 뿐아니라 도로혀 可히 此 裨補者로 不疑니 以是로 各種宗 敎 待에 毫無挾於親疎之念을 勿論고 其布敎傳道에 對야 適當 保護便宜 與이 不吝이라. 本官이 今奉 聖旨而 莅此地은 一히 治下生民의 安寧과 幸福을 增進코쟈 欲外에 他念이 無이라. 此玆에 諄諄히 其適從바 諭示所以라(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官報≫, 1910년 8월 29일, 31쪽,<諭告>).

 여기서 그는 신앙의 자유는 문명국이 다 인정하는 바이지만, 종교를 빙자하여 정사를 논하거나 다른 기도를 하는 것은 풍속을 해치고 안녕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처단하겠다고 경고하고, 유교·불교·기독교는 총독부의 ‘시정목적’과 배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움이 되리라 의심치 않으므로 평등하게 포교·전도에 보호와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 본토에서와는 달리 공인종교인 神道 대신에 유교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과 종교를 ‘안심입명’과 개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극히 사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들의 ‘치안유지’나 ‘시정 목적’에 어긋날 때는 가차없이 탄압하겠다는 의도와 위협을 문맥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종교 억압·통제 의도는 이듬해의 시정보고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宗敎取締에 관해서는 明治 39년(1906년)<통감부령>제45호로 내지인의 종교선포 수속절차를 정한 바 있다. 하지만 조선인 및 외국인의 종교에 관한 것은 하등의 법규도 없어서 그로 인해 포교소가 함부로 설치되고 있어 그 폐해가 크다. 특히 조선인의 조직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天道敎·侍天敎·大倧敎·大同敎·太極敎·圓宗宗務院·孔子敎·大宗敎·敬天敎·大成宗敎 등의 여러 宗이 있는데, 그 종류가 너무 많고 잡다할 뿐 아니라, 그 움직임도 정치와 종교를 서로 혼동하여 순연히 종교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많아 그 취체가 불가피하다(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施政年報≫, 1911, 77쪽).

 그리하여 우선 그들의 통제가 가능했던 불교와 유교부터<사찰령>과<경학원규칙>을 제정하여 총독부가 직접 통제·장악을 꾀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이목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寺內總督暗殺未遂事件’이라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함으로써 그 활동을 위축시켰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매일신보≫는 이들 공인종교들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포교규칙>의 제정을 1911년 초부터 검토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朝鮮에셔 現在하 宗敎中에 專히 人心을 善導에 努力하者ㅣ有나 其中에 宗敎의 名色으로써 人心을 攪亂거나 不法의 金錢을 貪 者ㅣ잇슴으로 當局에셔 이에 對하야 當히 注意더니 今回에 朝鮮에셔 宗敎를 宣布하는 者에게 對야 耶穌敎, 佛敎及 朝鮮在來의 各種宗敎를 不問고 整理取締에 關 規則을 發布터이라더라(≪매일신보≫, 1911년 1월 7일,<宗敎宣布規則>).

 이<포교규칙>은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발포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총독부는 이 규칙에서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불도 및 기독교를 이름”이라 하여 이른바 공인종교를 일본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파신도와 불교·기독교에 한정하고, 이들 종교선포에 종사하는 자는 자격 및 이력서를 첨부하여 조선총독에게 신고하여야 하고, 포교에 관해서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종교용도로 쓰기 위한 교회당·설교소·강의소를 설립하거나 변경할 때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으며, 이를 어길 때는 벌금 또는 과태료를 물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법령을 필요한 경우에는 ‘종교 유사 단체’에도 준용할 수 있다고 하여,223)≪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8월 16일, 154∼155쪽. 이 법령으로 사실상 조선총독은 모든 종교단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반 종교관련 법규들을 통하여 정작 일본에서는 그 제정이 좌절되었던<종교법>을 조선총독이 입법·사법·행정 및 군사권의 전권을 가지고 있던 식민지 조선에서 제정·실시하였던 것이다.

 종교단체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이러한 종교관련 법규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총독부 관공리들, 특히 헌병경찰들을 통해서 신자 개개인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간섭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법률적인 근거가 되었던 것은 1912년 3월에 공포한<경찰범처벌규칙>이었다. 그 규칙 가운데 “단체 가입을 강청하는 자”,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또는 불온 문서·도화·시가의 게시·반포·낭독 또는 방음을 하는 자”, “함부로 길흉화복을 말하고 또는 기도·符呪 등을 하고 혹은 守札類를 수여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는 자”, “병자에 대하여 禁厭·기도·符呪 또는 정신요법 등을 실시하고 또는 神符·神水 등을 주어 치료를 방해하는 자” 등에 대하여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224)≪朝鮮總督府官報≫, 1912년 3월 25일, 213쪽. 이 규칙은 적용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가 지배하게 된 한국사회는 많이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유교가 지배하던 사회였고, 봉건적 윤리도덕으로서 유교는 일제에게도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상통한 면이 있어 이용가치가 높은 것이었지만, 의병전쟁과 순국투쟁으로 가장 강력하게 일제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던 세력도 유림들이었으므로 총독부 설치 초기부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와는 달리 유교를 표면적으로는 공인종교의 하나로 인정하는 듯하면서 회유와 통제에 착수하였다. 병합직후 유력한 양반 유생들에 대하여 ‘尙齒恩金’을 지급하고, 조선 귀족에게 작위를 수여하며, 이른바 ‘합방은사금’을 지급한 것은 유림에 대한 회유 매수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11년 6월 종래의 성균관을 폐지하고<경학원규정>을 발포하여 “경학원은 조선총독에게 속하야 경학을 강구하며, 문묘를 제사하며, 풍교덕화를 裨補한다”고 한 것은 유교계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지방의 향교에 대해서도 병합전에 이미<향교재산관리규정>(1910년 4월)을 발포하여 그 재산을 지방관이 관리하도록 하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도 관공립학교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11년 10월<지방문묘직원에 대한 규정>을 발포하여 향교에 직원을 두고, 부윤·군수의 지휘를 받아 문묘를 수직하고 업무를 맡되, 그들의 임면은 부윤·군수 등의 신청에 의해 도장관이 시행하도록 하여 그 직원을 친일적인 인물로 세워 총독부가 통제하였다. 이와 같이 주요 유교기관을 장악하게 된 총독부는 그들의 회유에 넘어간 유생들을 이용하여 경학원과 향교를 한국인의 ‘충량화’와 ‘동화’를 위한 사회교화기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1912년 3월 경학원 대제학의 추천을 받아 경성과 13도에 강사를 임명하고 명륜당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갖게 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학원 직원이나, 각도에서 선발된 강사들이 도내를 순회하며 강연하도록 하였다. 1913년에 발포한<경학원 강사 순강에 관한 건>이나, 1915년 10월에 발포한<경학원 강연 시행에 관한 요항>은 모두 이러한 腐儒들의 회유 이용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15년부터는 이른바<교육에 관한 칙어>를 경학원에 두고 강연회를 시작할 때 이를 봉독하게 하였다.225)이명화,<조선총독부의 유교정책(1910∼1920년대)>(≪한국독립운동사≫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91∼95쪽. 1918년 2월에는<서당규칙>과<서당규칙 발포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사설 서당까지도 지방관이 이를 단속·통제하여 부족한 관공립학교와 ‘교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가장 먼저 종교통제에 성공한 것은 불교계였다.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억압을 받아오다가, 1895년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로<도성출입금지령>이 해제되고, 일본불교의 각 교파들도 일찍부터 한국에 나와 한국불교계를 일본불교계에 예속시키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일제의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 李晦光 같은 친일 승려는 일본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의 사주를 받아 조선의 圓宗을 일본의 曹洞宗에 연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韓龍雲을 비롯한 臨濟 법통의 승려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렇게 분열된 조선불교계를 통합·정비·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6월 3일 제령 제7호로<사찰령>과226)≪朝鮮總督府官報≫, 1911년 6월 3일. 7월 8일 부령 제84호로<사찰령 시행규칙>을 발령하여,227)≪朝鮮總督府官報≫, 1911년 7월 8일. 조선총독이 직접 조선불교계를 통제·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1,300여 개의 사찰을 30개의 本山과 本末寺 관계를 맺게 하고 본산의 주지 임명은 총독이 직접 이를 승인하며, 그 밖의 사찰의 주지들도 지방장관이 승인하도록 하였으며, 사찰의 병합·폐지는 물론 일체 재산의 처분과 寺法의 제정까지도 총독의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이로써 총독부는 조선불교계의 전통적인 자율성을 말살하고 강력한 통제와 전제적 지배권을 확립하여228)李鴻範,<韓國で行なわれた日本の植民地宗敎政策>(≪新羅佛敎硏究≫, 東京:山喜房佛書林, 1973), 681∼683쪽. 그들의 식민지 교화기구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1915년 3월<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였다.229)≪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3월 24일, 325쪽. 이 규칙은 1911년 10월에 제정한 것을 개악한 것으로 개정의 목적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교수 용어도 일본어로 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교사직에서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교육이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식민지 교육과 배치되므로 이를 통하여 사립학교와 기독교를 탄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세키야 데이자부로(關屋貞三郞)가<사립학교규칙>개정의 요지를 설명한 것으로 ‘개정의 2대 요점’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와 교원 자격의 강화임을 밝히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는 식민지 교육을 총독부가 독점하고, 교원도 일본어에 능하고 그들의 식민지 교육 실시에 적합한 인물로 하겠다는 것으로 이 규칙 개정의 주요한 목적이 기독교계 교육의 탄압과 선교사의 교사 자격 박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230)≪朝鮮彙報≫, 1915년 4월호, 22∼27쪽.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일반 종교계에 대해서는 억압·통제정책을 실시한 반면에 신사신도에 대해서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법령정비를 통하여 관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지원·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일제는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조차·위임통치 등에 의하여 시정권을 얻으면 그 지역에 예외없이 官幣大社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중심으로 일본 거류민들이 세운 신사를 그 밑에 두고 현지인의 토속신앙을 교화한다고 하는 이른바 ‘종교적 지배체제의 정비’를 꾀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도 내무국 지방과가 중심이 되어 관립신사 건립 계획을 세우고 1912년부터 이에 대한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였다. 이 신사는 경성의 남산 중턱에 20만 평의 부지를 조성하여 건립하기로 하고, 祭神은 일본 내무대신에게 조회하여 ‘天照大神’과 ‘明治天皇’으로 하였으며, 1918년 12월 일본 내각 총리대신에게<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를 하여 일본 각의의 결의를 거쳐 1919년 7월 18일자<내각고시>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 공사에 들어가 1925년에 완공하였다. 이들의 이 신사의 건립의도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제출한 다음과 같은<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에 잘 드러나 있다.

아직 조선 全土의 민중 일반이 존숭해야 할 神社가 없어 민심의 귀일을 도모하고 충군애국의 念을 깊게 할 점에 있어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차제에 國風移植의 大本으로서 內鮮人이 함께 존숭할 神祇를 勸請하여 반도주민으로 하여금 영구히 報本返始의 誠을 바치도록 하는 것은 조선 통치상 가장 긴요한 일이라 생각된다(朝鮮總督府,≪朝鮮神宮造營誌≫, 1927, 9쪽;京城府,≪京城府史≫下, 1936, 636∼637쪽).

 일제가 메이지(明治)유신 초기에 강력히 실시하였던 ‘신도국교화정책’을 그들의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하여 일반 민중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고, 일본 풍속을 이식하여 ‘동화’시키는 것이 조선통치상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조선신사를 건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관공립 신사는 물론 민간 신사에 대해서도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2호로<신사사원규칙>을 제정·발포하여,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기존의 신사들도 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신사에 관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231)≪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8월 16일. 이어서 1917년 3월 22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神社로 공인받지 못한 소규모 집단의 小社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는 정책을 취하였다.232)≪朝鮮總督府官報≫, 1917년 3월 22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